•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4. 친족 조직과 활동
  • 문중의 조직과 활동
  • 선조와 문중의 현창 활동
전경목

선조나 문중의 위업을 드러내는 활동으로는 선조들이 남긴 글 등을 정리하여 문집으로 간행하고, 자기 문중 구성원만으로 이루어진 파보(派譜)를 발간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한두 사람의 힘이나 한두 해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선조들이 남긴 글을 수집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선조가 쓴 글이 초본(草本) 형태로라도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선조가 교유하던 인물이나 그들의 후손을 찾아가서 보존하고 있던 것을 빌려 오거나 아니면 그 내용을 일일이 베껴야 했다. 게다가 그 글을 수정하거나 내용을 교정하는 일은 자연히 학식을 갖춘 후손이 오랜 기간 정성을 다 기울여서 하여야 했다. 또 이를 출간할 경우에는 통상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이름난 학자에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인맥과 재력 등을 동원하여 청탁을 넣어야 했다. 더군다나 이를 인쇄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우반동의 부안 김씨가에서 출간한 문집으로는 김홍원의 『해옹집(海翁集)』이 있다. 이 문집은 1860년(철종 11)에 간행되었는데, 발문을 보면 발간을 주도한 인물은 김홍원의 8대손인 김용철(金用轍, 1822∼1909)이다. 김용철은 자신의 선조인 김홍원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 커다란 전공을 세우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관리가 되어 국왕에게 충성하며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았던 점을 거론하고, 김홍원의 이러한 공로가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지는 한편 마땅히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받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렇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김용철은 김홍원이 생전에 지은 글, 유명 인사와 주고받은 서간,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글을 모아 이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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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옹집』 서문
『해옹집』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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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옹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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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이 비록 이와 같이 『해옹집』 간행을 주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김홍원이 쓴 글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에는 여러 후손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홍원의 문집에 수록된 글들을 어느 후손이 어떠한 경로로 수집하고 정리하였는지는 관련 자료가 전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우선 김홍원의 5대손인 김득문의 활동과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득문은 집안에 전해 오는 자료를 모두 살펴보고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을 정리하였다. 정리 작업을 한 가장 뚜렷한 흔적은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간찰(簡札) 두루마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선조들이 친지와 주고받은 간찰을 정리하여 관련이 있는 것끼리 모두 이어 붙인 후 뒷면의 첫머리에 “○대조(○代祖)께서 친지들과 주고받은 간찰로 ○손(○孫) 득문이 (이를 정리하고) 기록하였다.”라고 써 놓았다.126)문중 내 여러 집안의 고문서가 전래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김득문처럼 자기 집안의 문서를 정리 보존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료 부족과 연구자의 무관심으로 이들이 정리를 위해 쏟았던 노력과 보존 과정 등이 전혀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그가 이와 같이 집안에 전래되어 오는 문서를 모두 수집·정리하는 과정에서 김홍원이 지은 상소문이나 시문을 일차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한편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은 문중 현창 활동의 하나로 1860년(철종 11)에 파보를 간행하였다.127)정구복, 「해제」,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3∼4쪽 참조. 이 파보는 실물이 현전(現傳)하지 않기 때문에 확언할 수 없지만,128)정구복 교수가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의 해제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이 파보는 종가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종가에는 이 파보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만 수록된 족보로, 파보로서는 처음으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이때에 와서 왜 대동보(大 同譜)와 별도로 파보를 간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아마도 부안 김씨 대종중(大宗中)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김홍원을 정점으로 다시 재결속하려는 의지에서 발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1860년 한 해에 『해옹집』과 파보 및 『간독(簡牘)』129)이 『간독』은 1860년(철종 11)에 3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표제가 『부령김씨가장간독(扶寧金氏家藏簡牘)』(청구 번호 한-고 조선 44-다4), 『우반김씨간독』(개인 소장) 등으로 소장처마다 각기 달리 전해지고 있어서 여기에서는 권수제(卷首題)를 따라 책명을 『간독』이라 명명하였다.이 동시에 간행된 사실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해옹집』은 김홍원의 문집이고, 파보는 그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간독』은 그와 그의 후손들이 중앙 정계의 유명한 인물에게서 받은 간찰을 수록한 것으로 모두 김홍원이 중심이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문건이 함께 간행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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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 정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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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 정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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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반동의 부안 김씨들이 이와 같이 김홍원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문중의 실질적인 중시조(中始祖)이자 우반동 입향조(入鄕祖)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각종 자료에 따르며, 대외적으로 이들의 중시조는 김홍원의 고조인 지평공(持平公) 김차손이며, 우반동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김홍원의 손자인 김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이 항상 김홍원을 떠받들고 추모한 까닭은 그가 우반동의 토지를 구입하 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곳에 들어와 세거(世居)할 수 있었고 또 우반동 김씨라는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 바로 그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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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첩-『동춘여제현간첩(同春與諸賢簡帖)』
간찰첩-『동춘여제현간첩(同春與諸賢簡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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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첩-『도암수독(陶菴手牘)』
간찰첩-『도암수독(陶菴手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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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첩-『우반김씨간독(愚磻金氏簡牘)』
간찰첩-『우반김씨간독(愚磻金氏簡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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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반동의 부안 김씨 후손들은 이러한 선조의 업적을 널리 드러내고 국가로부터 추증(追贈)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족보에서 김용철의 공적을 소개하는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즉, 그는 “고종 갑자년에 해옹 선조를 포양하는 일로 종질인 봉구(鳳九)와 함께 (상경하여 국왕에게) 상언하였다. (마침 국왕이 이를 받아들여) 숭질(崇秩)의 은전(恩典)을 내리자 고종 갑신년 3월에 분황연(焚黃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부안을 비롯한 인근) 일곱 고을의 수령들이 참석하였다. 갑진년 3월에는 해옹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130)『부안 김씨 대보』 권4, 91쪽. 김홍원의 추증을 위해 김용철과 함께 상경한 인물은 김봉구였는데, 그는 당시에 우반동의 부안 김씨 종손이었다. 현재 이 종가에는 고종 갑자년, 즉 1864년(고종 1)에 국왕이 김홍원을 자헌대부 호조 판서(資憲大夫戶曹判書)로 추증한 교지(敎旨)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131)『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8쪽, 교지 71. 김홍원은 이미 1655년(효종 6) 정월에 국왕으로부터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을 증직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6쪽, 교지 50 참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반동의 부안 김씨 문중에서는 선조와 문 중의 위업을 널리 알리는 현창 활동으로 문집, 간찰첩, 족보 등을 간행하고, 이들 활동을 바탕으로 선조의 증직을 청원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 중의 한 명이며 실질적 중시조로 인정되는 김홍원이 비록 증직이긴 하지만 정2품 자헌대부 호조 판서에 올랐다는 사실은 가문의 영예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884년(고종 21)에 증직을 알리는 분황연 자리에 무려 일곱 고을의 수령이 축하하러 왔다는 것과 1904년(광무 8)에 그의 묘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신도비는 원칙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정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나 학문이 뛰어나서 후세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학자가 아니면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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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원의 추증 교지
김홍원의 추증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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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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