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4. 친족 조직과 활동
  • 문중 소송과 갈등
  • 적서의 문제
전경목

조선 후기 문중의 가장 큰 갈등 중의 하나는 적서(嫡庶)의 문제였다. 사실 이 적서의 문제는 문중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서자(庶子)와 얼자(孽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과 관계없이 서얼차대법(庶孼差待法)에 의해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되었기 때문이 다. 물론 이 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점차 완화되었지만 서얼의 차별이 뿌리 깊은 관행(慣行)으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서 간의 갈등은 국가 차원에서뿐 아니라 공적 혹은 사적인 작은 조직에서조차 커다란 문제였다. 만일 서자가 문중 회의에 참석하면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무조건 적자의 아래에 앉아야 하고 적자에게 반말을 들어야 하였으며 행동거지(行動擧止)에도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향(時享) 등과 같은 선조의 제사에 참여하면 서자에게는 술을 올릴 수 있는 순번이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다. 서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살고 있던 모든 시공간에서 유형무형의 차별을 받았다.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도 역시 적서의 갈등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문서들을 살펴보면 부안 김씨들이 적서의 문제로 직접 갈등을 빚은 경우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신분 문제는 아니지만 소송 관련 문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적서 갈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그와 관련된 탄원서를 살펴보자. 이 탄원서는 김정하가 1797년(정조 21)에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에게 제출한 것이다.

부안의 유학 김정하137)『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99∼100쪽, 소지 16.

탄원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임진년에 김회규(金會奎) 부자는 저의 집이 화를 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틈을 타서…… 자기 집 문 앞에 있는 제 소유의 논 10마지기를 음흉한 (우리 집의) 서얼들과 짜고서 (저희) 몰래 샀습니다. 그러나 (제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소송을 제기하자) 끝내 이 소송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거짓으로) 저희 어머니가 쓴 한글 위임장(諺牌)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위임장의 일부를) 칼로 도려내기도 하고 글자를 겹쳐서 쓰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필체로 소출량을 늘리기도 하였으니 이는 정말로 문서를 훔쳐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절도하는 도적입니다. …… 이 전답은 저의 집에서 대대로 전 해 내려온 위토답(位土畓)인데 음흉한 서얼들이 (저희) 몰래 판 것은 적손(嫡孫)들을 망하게 하려는 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

작년에 우리 고을 성주(城主)께서 우리 집안의 음흉한 서손(庶孫) 종돌(終乭)을 잡아다가 (문초하여) 그의 형이 도적질해서 판 사실을 낱낱이 밝혀내고 또 죄인에게 자백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을의 성주께서 종돌에게…… 논 값을 속히 마련하여 회규에게 갚도록 지시하였으니 (이를 통해서 종돌 형제가) 논을 도적질하여 판 사실과 매매 과정상의 잘잘못이 확연히 드러나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규는 한글 위임장을 구실로 사람의 입을 막고 또 누더기가 된 문서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킵니다. 이는 교묘하게 꾸미려다가 오히려 치졸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이 못됩니다. 제가 유학자로서 명성이 있는데 (만일 어머니가 판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어머니가 판 것을 아들인 제가 도로 물리는 일을 (차마) 하겠습니까. ……

이에 감히 순찰하시는 아래에 엎드려 하소연합니다. 특별히 통촉(洞燭)하시어 앞의 회규가 순찰사나 성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죄를 엄히 다스리신 후 저의 억울함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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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탄원서
김정하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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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탄원서에 따르면 부안 김씨 서손인 김종돌 형제는 조상의 제사를 위해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위토답 중에서 김회규 집 앞에 있던 것을 종손인 김정하 몰래 훔쳐서 팔았다. 당시 김정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부득이하게 우반동을 떠나 같은 고을 하동면(下東面) 옹정(甕井)이라는 곳으로 이거하여 살고 있었다.138)그가 우반동을 떠나 같은 고을 하동면 옹정리로 이거한 때는 1795년(정조 19) 전후였다. 이에 대해서는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63쪽, 호구 단자 48 참조. 따라서 그는 자연히 우반동에 있던 위토답에 대한 관리가 전에 비해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김종돌 형제는 그 틈을 타서 위토답 중의 일부를 김회규에게 판 것이었다. 추측컨대 김회규도 이 논이 위토답이며 소유주가 김정하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 논이 자기 집 문 앞에 있어서 경작하기가 아주 편리하고 또 비옥하였기 때문에 구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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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현 지도
부안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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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토답이 몰래 팔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김정하는 부안현에 탄원 서를 제출하여 이를 찾아 주도록 하소연하였다. 탄원서를 살펴본 수령은 김종돌을 잡아다 문초한 결과 그의 형이 몰래 팔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또 그의 형에게 자백도 받았다. 그래서 수령은 김종돌 형제에게 논 값을 마련하여 김회규에게 돌려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김회규는 김득문의 어머니가 마치 김종돌 형제에게 이 논을 팔도록 부탁한 것처럼 한글 위임장을 거짓으로 작성한 후 이를 근거로 제시하며 이 논을 돌려주지 않았다. 김정하가 다시 부안현과 순영(巡營)에 수차례 탄원을 하였으나 김회규가 번번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아서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김정하는 다시 순찰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순찰사나 수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김회규를 엄히 처벌하고 아울러 자신의 억울함도 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사건의 발단은 서손인 김종돌 형제가 문중의 위토답을 종손인 김정하 몰래 김회규에게 팔아 치운 것이었다. 이 사건은 비록 서손과 적손 간의 직접적인 갈등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위토답과 같은 종중 재산을 놓고 서손과 종손 간에 간접적으로 갈등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우반동의 종손가에 전하는 문서를 살펴보면, 이와 같이 문중의 재산을 놓고 서손과 적손 간에 간접적으로 갈등을 빚은 예는 몇 건이 더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반동의 부안 김씨가에서도 적서 간의 갈등이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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