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4. 친족 조직과 활동
  • 문중 소송과 갈등
  • 문중원 간의 산송
전경목

조선 후기 문중에서 일어난 또 다른 갈등의 예로는 산송(山訟)을 들 수 있다. 부안현 하동면 옹정리(甕井里)는 부안 김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 중의 하나였는데, 그 근방에 있는 석동산(席洞山)은 부안 김씨 여러 문중의 공동 선산이었다. 김정하는 1772년(영조 48) 12월에 어머니 나주 나씨(羅州羅氏)가 돌아가시자 이듬해에 망모(亡母)를 석동산에 모시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일가인 김경효(金敬孝)가 자신의 선조 묘와 가깝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김정하는 부안현감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이곳에 무덤을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탄원서에서 자신이 입하(立下)에 거주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당시에 우반동이 입하면(立下面)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신을 죄민(罪民)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상중(喪中)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며, 이름을 김정렬(金鼎烈)이라고 하였는데 정렬은 그의 초명이었다. 그가 제출한 탄원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하면의 죄민 김정렬139)『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100쪽, 소지 17.

삼가 절통(切痛)한 사유를 말씀드립니다. 저의 9대조인 이조(吏曹) 좌랑공(佐郞公)의 분묘는 하동면의 석동산에 있는데 석동산은 저희 여러 문중의 선산입니다. 좌랑공의 묘 아래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일가인 김경효가 그의 조모를 묻어 저희들이 관에 고발을 하여 이를 파냈습니다. 그 후 김경효가 또 묘의 수십 보 아래에 그의 아버지를 묻어서 제가 즉시 이를 다시 관에 고발하여 파내도록 해야 하지만, 대저 저희 일가는 보수(步數)를 따지지 않고 주맥(主脈)도 가리지 않은 채 서로 묘를 쓰기 때문에 후의(厚意)에서 차마 다시 관에 고발하여 이를 파 옮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9대조 좌랑공의 묘 아래에 부장(附葬)을 하려고 하니, 김경효가 그의 (부친) 묘소에서 가깝다며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며 이를 저지합니다. 이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며 객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법리로 따지더라도 일가들이 서로 묘를 쓰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데, 김경효만이 여러 일가들이 행하지 않던 일을 유독 혼자서 시행하려고 합니다. 또 의리로 말하더라도 저의 어머니는 좌랑공의 적장손부(嫡長孫婦)임에도 좌랑공의 묘 아래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방손(傍孫)인 김경효는 그의 아버지를 장사 지낼 수 있다면 이는 말썽을 일으키는 조처가 아닙니까.

장사를 지내야 하는 날에 임박해서 이와 같이 커다란 변괴(變怪)를 만나 이와 같이 큰 소리로 애달프게 하소연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저의 사정을 참작하신 후 친히 적간하시고 공정하게 처리해 주셔서 제가 낭패를 당하지 않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정렬, 즉 김정하가 9대조라고 말하는 ‘이조 좌랑공’은 김석필을 가리키는데 그는 석동산에 묻혀 있었다. 김석필이 이곳에 묻힌 이유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부안 옹정으로 낙향하여 여기에서 살다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옹정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거하였으며, 그래서 후손 중에는 아들 김개(金漑)를 제외하고는 석동산에 묻힌 사람이 없었다.140)김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옹정을 떠나 임실현으로 옮겨가 살면서 ‘창립와가(創立瓦家)’하고 ‘축보작답(築堡作畓)’을 하였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사후에 그의 아버지가 있는 석동산에 묻혔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하가 그의 망모를 김석필의 묘 아래에 묻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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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탄원서
김정하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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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일가 중의 하나인 김경효가 이를 저지하고 나섰다. 자신의 망부 무덤이 김석필의 묘 아래에 있었는데 그 무덤과 김정하의 망모 묘소가 너무 가깝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김정하의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비록 석동산이 부안 김씨 일가들이 묻히는 선산이라서 묘소 간의 거리나 산의 주맥 등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9대조의 묘소 아래 그의 종부가 묻히지 못하고 촌수가 먼 방손이 묻힌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정하는 부안현감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친히 판결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부안현감은 이 탄원서를 살펴본 후 “묘를 쓰는데 대해 집안 내에서 일정한 법칙이 없고 (또) 여러 문중원들이 다 묘를 썼으니 (묘소 간의) 거리가 가깝거나 먼 것은 다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기일에 맞추어 장사를 치르되 만일 소란을 피우거든 엄히 단속할 일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부안 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나주나씨의 무덤이 석동산의 교리공의 묘 아래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교리공은 바로 김석필을 가리킨다.141)김석필은 내직으로는 이조 좌랑을 거쳐 이조 정랑과 승문원 교리를, 그리고 외직으로는 덕원부사와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따라서 후손들이 그를 호칭할 때에는 일반적으로는 정랑공 혹은 교리공(校理公)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강릉부사 같은 고위 관직보다 이조 정랑이나 승문원 교리 같은 청현직(淸顯職)으로 부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정하가 이 탄원서에서 왜 그를 좌랑공이라고 불렀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따라서 김경효가 부안현감의 처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김정하는 그의 망모를 김석필의 묘소 아래에 묻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산송은 대부분 오랫동안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이 특징인데 친족 간의 산송도 마찬가지였다. 문중 구성원 간에 산송이 일어나 관에 제소되면 수령은 대부분 이 소송을 문중으로 회부하였다. 문장을 중심으로 문중에서 원만하게 해결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문중에서 이를 중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적서 간이나 문중 구성원 간의 갈등이 심한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펴본 김경효와 김정하의 소송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김경효가 수령의 처분에 군말 없이 승복한 까닭에 의외로 빨리 해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김석필의 후손들이 옹정을 떠난 지 거의 9세대가 지난 후에 김정하는 왜 갑자기 망모를 옹정 옆의 석동산에 묻으려고 하였을까? 김정하가 거주하던 우반동에서 석동산까지는 적어도 20km가 훨씬 넘기 때문에 장사 지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후 관리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크게 유행하여 명당(明堂)을 찾아 선조를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 묻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김정하도 이러한 풍조에 따라 망모를 석동산에 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동산은 일종의 부안 김씨 공동묘지(共同墓地)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묘와 묘 사이의 거리나 주맥도 따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묘를 쓰려고 한 이유가 석동산이 명당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전하지 않아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유의할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김정하가 망모를 석동산에 묻은 지 얼마 안 되어 옹정으로 이거한다는 사실이 다. 현재 남아 있는 호구 단자를 살펴보면, 김정하는 1780년(정조 4)에는 우반동에, 그리고 1795년(정조 19)에는 하동면 옹정리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1780년과 1795년 사이에 우반동에서 옹정리로 이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정확한 이거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김정하의 망모가 석동산에 묻힌 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이거를 하였는지 아니면 옹정리로 이거하기 위해 미리 망모를 석동산에 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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