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4. 친족 조직과 활동
  • 문중 소송과 갈등
  • 재산 분쟁
전경목

재산 분쟁 또한 친척 간에 흔히 발생하는 갈등의 사례로 지적할 수 있다. 우반동 부안 김씨의 입장에서 보면, 김정하가 우반동에서 옹정으로 이거한 것은 커다란 하나의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우반동의 종가, 그에 딸린 건물 및 토지 등을 일가도 아닌 타인에게 팔고서 옮겨 간 것은, 선조들이 우반동을 동성 마을로 만들기 위해 쏟아 부었던 집념과 노고 등을 상기해 보면 조상의 유훈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그러나 김정하는 우반동을 떠날 수밖에 없는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관련 사료가 전하지 않아 상고할 길이 없다.142)김정하가 환퇴를 전제로 우반동 종가 등을 방매한 것을 보면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나 그 사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 김득문이 노비를 타살하여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다만 그는 반드시 우반동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점만은 분명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우반동 종가, 그에 딸린 건물과 토지 등을 환퇴(還退), 즉 반드시 도로 물리겠다는 전제하에 팔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환퇴 문제를 둘러싸고 친척 간에 큰 분쟁이 발생하였다.

우반동의 종가를 사들인 강재태(姜在泰)는 김정하의 아들인 김기정이 이를 돌려받으려고 하자 갖은 핑계를 대며 환퇴해 주지 않았다. 강재태가 환퇴해 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환퇴 기일이 지났다거나 그동안 건물을 개보수(改補修)한 비용을 추가로 내놓아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김기정과 강재태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부안현과 전라 감영에 여러 차례 탄원을 하는 한편, 노비와 고공 등을 동원하여 상대방의 재산을 침해하였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김기정의 친척인 양진형(梁鎭衡)과 이춘문(李春文)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나뉘게 되었다. 즉, 양진형은 김기정을, 이춘문은 강재태를 위해 일을 하였는데, 양진형이 이춘문을 데려다 묶어 놓고 강제로 인분(人糞)을 먹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은 끝에 김정하는 강재태에게서 우반동의 종가와 그에 딸린 건물과 토지 등을 돌려받았다. 양진형과 이춘문의 사건은 비록 재산을 되돌려받기 위한 소송 과정에서 생긴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재산을 둘러싸고 벌어진 친척 간의 갈등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143)『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171∼173쪽, 입안 4와 김성갑, 「19세기 가사전장(家舍田莊) 환퇴 분쟁(還退紛爭) 사례 검토」, 『장서각』 12,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20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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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입안 부분
김기정 입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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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있었던 친척 간의 갈등 중에는 족징(族徵)으로 인한 소송도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각종 세금이나 벌금 등을 미납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친척에게 이를 부과하여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경우 단지 미납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재산상의 불이익을 당하곤 하였다. 백성들은 관의 일방적인 징수 조처에도 불구하고 변변하게 항의조차 못하고, 또 대부분 이를 또 다른 친척에게 미루어서 친족 간에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1876년(고종 13)에 김낙휴(金洛休)가 부안현에 탄원한 문서를 살펴보자.144)김낙휴는 조선 말기에 우반동으로 들어온 부안 김씨 소윤공파(少尹公派)의 후손이었다. 소윤공은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을 역임하였다고 알려진 김세영(金世英)을 가리킨다.

화민(化民) 김낙휴145)『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107쪽, 소지류 39.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찬배 죄인(竄配罪人) 김중선(金仲宣)은 저의 12촌 족제(族弟)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또) 아름답지 못한 일을 저질러 벌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에까지 이르니 (일가로서)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말씀드리면 그의 가까운 친척으로 처가 내외 친척 중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하오니) 어찌 (저와 같이 촌수가) 먼 친척이 특별히 선정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는) 소중한 선조의 위토 문권(位土文券)을 잡히고서 벌금을 빌리려고 하는데, 자손으로서 (이 위토) 문권을 잡고 벌금을 빌려 주는 것이 무슨 도리이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문서를 잡히고 돈을 빌린다는 말은 매우 한심한 말이며, 그가 이와 같이 하는 행동은 선조를 망각하는 것이니 원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황공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러한 사연으로 우러러 하소연합니다. (수령께서는 저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신 후 벌금을 즉시 그의 당내(堂內) 가까운 친척들이 내도록 특별한 처분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낙휴의 12촌 족제(族弟)인 김중선은 유배 도중에 불미스런 일을 저질러 벌금까지 물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마련할 수 없었고 관에서 면제해 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경우 대개 관에서 그의 일가 중에서 돈이 많다고 알려진 사람을 일방적으로 지목하여 납부토록 명령하거나 그와 협의를 거쳐 친척 중에 이를 대신 납부해 줄 사람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추측컨대 김중선은 벌금을 대신 내줄 만한 사람으로 12촌 형인 김낙휴를 지목하고서 그에게 위토 문서를 저당 잡히는 조건으로 벌금을 대신 내주도록 제안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김낙휴의 입장에서 보면 이에 응할 경우 친척들에게 오히려 비난을 받을 여지가 컸다. 같은 후손으로서 위토, 즉 조상의 제사를 위한 토지를 저당 잡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친척들이 부도덕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낙휴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김중선의 처족(妻族) 중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으니 그들에게 벌금이 부과되도 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탄원서에는 관의 처분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알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김낙휴가 탄원서를 작성하기만 하고 실제로 관에 제출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족징(族徵) 혹은 대징(代徵)이 조선 후기 친족 사회 내에서 구성원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무릇 가족이나 친족과 같은 제도는 그 시대와 사회의 종합적인 산물이다. 그것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 사회 경제적 구조 및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 등과 씨줄과 날줄로 교직(交織)하며 촘촘히 짜여 있는 한 필의 직물과 같다. 따라서 어느 하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전체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다. 그렇지만 가족의 형태와 그 변천, 가계의 계승과 운영 방식, 친족 조직과 활동 등의 자취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나간다면, 가족이나 친족을 중심으로 한 당시대인들의 생활 모습을 조금씩 복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현재의 우리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 형성된 가족과 친족의 여러 모습이 근대에 이르러서 더욱 뚜렷이 정착되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최근에 근대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한층 빠르게 바뀌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크게 변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가족과 친족 제도가 정체적인 농촌 사회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가족과 친족은 한층 역동적인 산업 사회에 그 뿌리를 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급격한 변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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