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1. 정소, 조선 사회를 비추는 거울
  • 소지, 그 다양한 종류와 양식
김경숙

정소 문서인 소지류에는 소지, 단자, 상서, 발괄, 원정, 등장, 의송 등 다양한 종류와 양식이 있다. 정소인은 이들 가운데서 자신의 신분 직역(職役) 및 정소 기관의 등급에 따라 적합한 문서 양식을 선택하여 사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상황별로 적합한 문서 양식을 제시한 지침서(指針書)도 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간행된 『유서필지(儒胥必知)』는 유자(儒者)와 서리 (胥吏)가 반드시 알아야 할 문서 양식 모음집인데, 소지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유서필지』에 제시되어 있는 대표적인 소지 양식은 다음과 같다.

   ①某邑居身役姓名所志  
②右謹陳所志矣段 ③矣身……… ④千萬望良爲白只爲
  行下向敎是事
⑤城主處分
  ⑥年 月 日所志
【題音】
⑦官  (押) ⑧………………
  ……向事 ○日○○146)『유서필지(儒胥必知)』 소지류(所志類)에 근거하여 대표 양식을 정리하였음.

①은 시면(始面)으로 정소인의 거주지, 신분 직역, 성명을 기록하였다. ②는 기두(起頭)로 “삼가 이렇게 소지를 아뢰는 일은……”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③은 본문으로 정소 내용을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기재하였다. ④는 맺음말로 본문 내용을 “천번 만번 바라옵기에 처분해 주실 일”로 끝맺는다. ⑤는 소지를 받는 관장(官長), ⑥은 소지를 제출한 날짜를 기재함으로써 문서 작성을 마무리하였다.

정소인이 소지를 작성하여 해당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에서는 그 내용을 검토한 후 처분을 내렸다. 그 방식은 정소인이 제출한 소지의 좌측 하단에 직접 대자(大字) 초서체(草書體)로 처분 내용을 기재하여 정소인에서 돌려주었다. ⑦과 ⑧이 이에 해당한다. ⑦은 소지를 접수하여 처리한 사실을 확인하는 관장의 착관(着官)과 착압(着押)이다. 특히 착관은 관(官) 자를 호방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는데 이를 ‘빗긴다’고 하였다. 관에서 공증한 문서를 사출(斜出), 사급(斜給)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⑧은 구체적인 처분 내용으로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 할 일’이라고 끝을 맺고, 말미에 날짜와 처분 내용을 수행할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였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소지 양식으로 정소자 및 정소 기관에 관계없이 폭넓게 사용하였다. 그 밖의 문서 양식은 소지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소자의 신분 직역 및 숫자, 정소 기관의 등급에 따라 약간씩 변형된 형태를 보인다.

그 가운데 정소자의 신분 직역에 따른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문서로 단자와 상서, 발괄과 원정이 있다. 단자와 상서는 사대부들의 문서였다. 『유서필지』에서는 단자를 사대부가 직접 수령이나 관찰사에게 정소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분류하였고, 또한 실제 문서상으로도 하층민이 단자 또는 상서를 사용한 사례는 찾을 수 없다. 이들은 사대부의 전유물로 신분 사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 때문에 단자와 상서는 본문 내용을 작성할 때 이두(吏讀)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한문 문장으로 쓰려 한 특성을 지닌다.

<표> 단자와 상서 양식 비교
단자 양식 상서 양식
    某邑居民幼學姓名單子
  恐
鑑伏以……
城主處分
      年 月 日單子
  某邑居民幼學姓名 謹百拜上書于
城主閤下 伏以…………
城主閤下處分
          年 月 日

문서 양식은 모두 소지를 기본으로 하면서 다만 기두와 맺음말 부분을 변형하였다. 단자는 “삼가 살펴주십시오. 엎드려 생각건대(恐鑑伏以)……”로 시작하여 “간절히 바라옵기 그지없습니다(無任祈懇之地)”로 끝을 맺었다. 상서의 경우에는 “삼가 백번 절하며 성주 합하(城主閤下)께 상서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謹百拜上書于城主閤下伏以)……”로 시작하고 맺음말은 소 지와 비슷하였다. 일종의 편지 형식에서 시작된 양식이 아닌가 한다.

단자와 상서가 사대부의 문서라면 발괄과 원정은 비사족층(非士族層)과 여성이 주로 사용한 정소 문서였다. 특히 발괄은 소지의 이두식 표기로 범민(凡民) 정소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유서필지』에서는 발괄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첫째 범민 정소, 둘째 사대부가 노비의 이름으로 하는 정소, 셋째 여인 정소이다. 발괄은 기본적으로 범민, 즉 하층민의 정소 양식으로 사대부들은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부가 노비의 이름으로 정소할 경우에는 상서와 단자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지 또는 발괄 양식을 썼다. 그리고 여성은 사대부 부녀자인 경우에도 스스로를 낮추는 의미에서 발괄이나 원정 양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발괄, 원정에서는 상서, 단자와 달리 주로 이두식 표기를 적극 사용하였다. 내용 또한 특정 사안에 제한되지 않고 산송(山訟), 채송(債訟), 구타(毆打), 부세(賦稅) 등 생활 중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담고 있다.

한편, 등장(等狀)은 연명(聯名) 정소 양식으로 정소하는 사람이 두 명 이상일 때 사용하였다. 따라서 다른 문서와 달리 정소 날짜를 기록한 다음에 참여자의 이름을 나열하고 서명한 점이 특징이다. 연명 정소는 여론을 모아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정소의 효과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타난 형태였다. 등장 형식은 참여자가 여러 사람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소지와 다름없었다.

의송(議送)은 관찰사 또는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정소할 때 사용하는 문서 양식이다. 조선시대 정소 제도는 하급관(下級官)에서 상급관(上級官)으로 진행되는 절차가 있고 이를 넘어서면 월소(越訴)라 하여 접수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때문에 민원이 있을 경우에는 우선적으로 해당 지역의 수령, 즉 본관(本官)에게 정소하였고, 여기에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관찰사, 암행어사, 중앙 관청의 순으로 정소하였다. 의송은 이러한 단계적 정소 시스템에서 나타난 문서 양식으로, 본관에게서 해결되지 못한 사안을 관찰사 또는 암행어사에게 호소하는 문서였다. 『유서필지』에서 의송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의송은 감영(監營)에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사대부, 범민을 막론하고 본관에게 기송(起訟)하였으나 본관이 공정하게 판결하지 못하면 소송에서 패소한 자는 영문(營門)에 의송할 수 있다. 만약 본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문에 정소하면 영문에서는 청리(聽理)를 허락하지 않는다.147)『유서필지』 범례(凡例).

그렇다면 의송의 유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15세기에도 의송은 확인되지만 그 의미는 확연히 달랐다. 이 시기에는 관찰사에게 정소하는 문서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소지’라 하였고, 그 소지에 대한 관찰사의 처분을 ‘의송’이라 하였다. 15세기 고문서에서 의송의 용례는 “이 소지의 내용에 따라 추고(推考)하여 분간(分揀) 시행할 일을 순흥부(順興府)에 의송함” 등의 방식으로 관찰사의 제사에 등장하고 있다. ‘의송’을 행하는 주체는 관찰사, 받는 대상은 군현 수령이었다. 15, 16세기에 주로 등장하는 “의송을 받아 군현에 접수하다(受議送到付)”, “관찰사의 의송을 군현에 접수하다(使議送到付)”의 표현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관찰사 처분을 뜻하였던 ‘의송’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관찰사에게 올리는 소지의 의미로 변화해 갔다. 그 원인은 관찰사의 처분 방식 때문이었다. 관찰사는 소지를 받으면 직접 해결하지 않고 군현 수령에게 처분을 명하는 의송을 소지에 직접 기록하여 정소자에게 돌려주었다. 정소자는 이를 받아 첨부하여 해당 수령에게 다시 정소하여야 했다. 따라서 본래 ‘의송’은 소지 중에서 제사 부분만을 지칭하였으나,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의송이 기재된 문서 전체, 즉 소지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16세기 관찰사의 제사 방식이 15세기와 동일하면서도 마지막 부분이 “……할 일로 수명 관(受命官)에게 의송함”에서 “……할 일. 수명관”으로 ‘의송’ 용어가 탈락되어 가는 현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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