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2. 경제 생활, 거래와 공증
  • 거래, 문권으로 말하다
김경숙

오늘날에는 수많은 직업, 각종 부동산, 주식 및 펀드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이 가능하다. 이에 비하여 전통 사회의 경제 활동은 상속과 거래 등으로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 대상 또한 노비, 전답, 가옥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149)상속은 이 책의 2장 ‘가족과 친족 생활’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제외하고 거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거래, 즉 매매 활동은 조상의 재산을 그대로 승계받는 상속에 비하여 매우 적극적인 경제 활동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상속 과정에서 분재기(分財記)라는 상속 문서가 작성되었다면, 거래 과정에서 당사자는 소유권 이전을 명시한 ‘문기(文記)’를 작성하였다.150)최승희, 「토지 명문, 노비 명문, 점련 문기라는 고문서 명칭의 적부여부(適否與否)」, 『고문서 연구』 25, 한국 고문서 학회, 2004. 『유서필지』에서는 이를 ‘문권류(文券類)’로 분류하였다. 문기(문권)에는 재화를 사고파는 매매 문기를 비롯하여 상환(償還) 문기, 전당(典當) 문기, 환퇴(還退) 문기, 기상(記上) 문기 등이 있는데, 각종 거래 행위 문서가 모두 문기(문권) 양식으로 작성되었다.

다음 인용문은 조선시대에 사용한 일반적인 문기의 양식이다. 방매인(放賣人)이 매득인(買得人)에게 문서를 주는 형식으로 작성되어, “몇 년 몇 월 며칠 아무개에게 주는 명문”으로 시작한다. 이때 연대는 중국 연호(年號) 와 간지(干支)를 함께 병기하여 매매 날짜를 확실하게 하였다. 그 다음 매매 사유, 매물 내용, 가격, 단서 조항 등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재하고, 마지막에 재주(財主), 증인, 필집(筆執)의 순서로 직역과 성명을 쓰고 서명하였다.

  연호 월 일 …(매득인)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는 일은 …(매매 사유) 때문에 …(매물)을 값으로 쳐서 전문 …냥(가격)을 받고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하니, 후에 자손족속들 중에서 잡담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을 일
재주 직역 성명 (서명)
증인 직역 성명 (서명)
필집 직역 성명 (서명)

한편, 오늘날 계약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형태인 부동산 매매 계약서의 양식을 문기 양식과 비교해 보면, 매매 계약서는 매우 정형화되어 있고 복잡한데 비하여, 문기는 자유롭고 단순한 형태임을 시각적으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양자를 좀 더 세밀하게 비교하면 둘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과 함께 차이점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차이점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매매 사유이다. 이는 문기에서만 보이고 매매 계약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매매 활동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매매를 인정받을 수 있는 매매 사유가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현대 사회에서 매매 사유가 사적 영역에 속하며 거래할 때 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필요치 않은 점과 비교할 때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다.

거래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문기에서는 매매 주체가 당사자 간의 직접 거래이며 매매 사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증인과 필집 등 두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이에 비하여 현대의 매매 계약서에서는 거래 중개인이 매매 당사자 사이에서 매매를 주도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며 매매 사실을 책임지고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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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부동산 매매 계약서
오늘날의 부동산 매매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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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문기와 매매 계약서는 공통적으로 거래의 기본 요건인 매매 날짜, 매도인, 매수인, 증인(중개인), 참여인의 서명, 매물 내용, 가격 등에 관한 사항을 명확하게 표기하였다. 매매 사실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단서 조항 또한 상세함의 차이는 있지만 양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거래 문서의 양식과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조선시대의 문기는 현대의 매매 계약서 못지않게 매매 사실을 보증하고 소유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장치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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