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2. 경제 생활, 거래와 공증
  • 속량 노비와 자매 노비
김경숙

조선시대 노비는 대체로 거래 대상물이었으나 스스로 거래의 주체가 되어 자기 스스로를 사거나 팔기도 하였다. 노비가 상전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속량(贖良)하거나, 양인이 자신을 팔아 노비가 되는 경우이다.

노비는 예속(隷屬) 신분이었으나 독자적인 경제권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적 변동을 바탕으로 노비들 중 일부는 가산(家産) 경영을 잘하여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축적된 재력을 바탕으로 다른 노비를 매득하여 사환(使喚)하거나 스스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였다.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합법적인 방법 가운데 대표적인 방법이 상전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속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소유권 변동뿐만 아니라 신분에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하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상전으로부터 해방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때문에 노비가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상전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속량한 다음에 국가에 그 사실을 신고하고 허가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1734년(영조 10) 노 준석(俊碩)의 사례는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노 준석은 김 참의 댁 노비로 연안 사는 외거 노비(外居奴婢)였다. 그는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상전에게 은자 50냥을 지불하였다. 상전댁은 마침 조상 산소를 단장하는 공사를 추진하였는데 비용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공사 비용을 보충하려는 상전과 속량하고자 하는 준석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아 거래가 성사된 것이었다. 이때 작성된 속량 문서는 거래 당사자가 상전과 노비 사이였기 때문에 상전이 노비에게 주는 위임장인 배자(牌子) 양식을 사용하였다. 상전에게서 속량한 준석은 다음 단계로 노비 업무를 담당하는 장례원에 소지를 올려 그 사실을 공증해 줄 것 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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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준석의 소지와 속량 배자
노 준석의 소지와 속량 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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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노비는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고 있었다.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어 향리층(鄕吏層)과 결탁하고 호적을 고쳐 양인으로 모록(冒錄)하거나 도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특히 도망은 조선 초·중기부터 계속 증가한 결과 조선 후기에는 유력 양반가에서도 제어하지 못할 정도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노비층의 신분 상승 노력과 저항을 통하여 조선 후기 신분 체제는 동요하고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의 한편에서는 자유인이면서도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몰락하여 노비 신분으로 하락하는 이들도 분명 존재하였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나 가족을 스스로 팔아 노비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를 일반적으로 ‘자매(自賣)’라고 하였으며, 자신을 사는 상전과의 사이에 자매 문기라는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19세기 초 정복삼(鄭福三)은 몰락한 평민층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원래 처 심이(深伊)와 위로는 부친을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평범한 평민이었다. 자식 셋을 두었는데 큰 아이 득절(得節)은 당시 12살, 둘째 득심(得心)은 4살, 막내 득소사(得召史)는 돌도 지나지 않은 갓 난아이였다. 이들 여섯 식구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처지였지만, 고향에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 가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1809년(순조 9)의 살인적인 흉년은 이 가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 가족은 가난한 살림에 흉년까지 겹쳐 살길이 막막해지고 더 이상 고향에서 생계를 꾸려 나갈 방도가 없게 되자 노친과 세 자식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유랑길에 올랐다. 계절은 가을이나 초겨울쯤 되지 않았을까? 이들 여섯 식구는 여기저기 떠돌며 유리걸식(流離乞食)을 하다가 경주까지 흘러들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노친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먹지도 못하고 고달픈 떠돌이 생활이 노인에게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부부는 떠도는 처지에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언젠가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산비탈에 겨우 초빈(草殯)만 하고 돌아왔다.

때는 이미 한겨울이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어린 자식들과 강보(襁褓)에 싸인 갓난애를 데리고 더 이상 떠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노친을 이곳에 묻은 채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복삼 자신마저 추위에 얼다 보니 고질병이 재발하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남은 가족은 경주에 정착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계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처 심이와 세 아이를 노비로 팔아서 생계비를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을 노비로 산 사람은 경주 옥산(玉山)의 양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 집이었다. 그런데 이씨가에서는 그 거래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현재는 정복삼이 절박한 상황 때문에 처자식을 노비로 팔지만,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복삼은 이씨댁의 불안감을 덜어 주기 위하여 경주부에 그 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고 매매 사실을 공증 받아 이씨댁을 안심시켰다. ‘김 소사의 소지와 경주부 입지’는 정복삼이 처 심이를 시켜 관에 정소하여 받은 공증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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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의 소지와 경주부 입지
김 소사의 소지와 경주부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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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삼의 자매 문기
정복삼의 자매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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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입지를 근거로 드디어 거래가 성사되었다. 이씨가에서는 노비 억이(億伊)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거래하였기 때문에, 문기는 정복삼이 노 억이에게 주는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정복삼 자매 문기’는 바로 이 문서이다.

정복삼은 매매 문기에서 처자식을 자매하게 된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노비 값으로 전문(錢文) 35냥을 받고 후소생(後所生)까지 영원히 방매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경주부에서 발급받은 공증 문서, 즉 입지를 이씨 댁에 함께 넘겨주었다.

그런데 문기와 입지의 날짜가 어긋난다. 문기는 1809년 12월 4일 날짜로 작성되었는데, 입지는 다음해 1월 3일 날짜이다. 문기에 경주부 입지를 함께 준다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거래 성사 이전에 입지를 발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거래 이전에 입지를 먼저 발급받았으나 문서상으로는 거래 날짜가 앞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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