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2. 경제 생활, 거래와 공증
  • 구활 노비
김경숙

구활 노비(救活奴婢)는 진휼 정책의 차원에서 시행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환곡, 진제장(賑濟場) 등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고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제도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하거나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랑하는 사람이 급증하면 국가의 상시적인 정책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 경우 국가에서는 개인에게도 사회적 책임을 일정 부분 부과하였다. 즉, 그들에게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장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특별 해택을 주었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구활 노비’였다. 구활 노비 정책은 경제력이 있는 개인이 굶주린 사람을 데려가 먹여 주고 살려 주면, 양측 당사자 간의 합의 하에 그리고 관의 공증 절차를 거쳐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였다.

원래 국가에서는 개인이 양인을 노비로 억압하는 것을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 하여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다스렸다. 구활 노비는 이러한 국가의 기본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평민의 노비화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노비제가 해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상황 한편에서 새로운 노비가 창출되고 있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다.

1594년(선조 27)에 실시된 구활 노비 사목(事目)은 대표적인 시행 사례이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하고 생업을 잃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증가하자 이들을 구활하면 관의 공증을 거쳐 노비로 사환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구활 노비 사목이 시행된 바로 그 해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에 거주한 진성 이씨 이정회가(李庭檜家)에서는 국가의 정책에 부응하여 유랑민을 구활하였다. 다음은 1594년 11월 이정회가에서 진보관에 공증 절차를 거친 문서이다.

이정회가에서 유랑민을 구활하게 된 계기는 그 집안의 노 매읍금(每邑 金)이 횡성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제천 근방에서 아이들 셋을 만나면서였다. 그들은 9살 순개(順介), 7살 추양(秋陽), 7살 막분(莫粉)으로 오늘날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어린아이들이었는데, 부모 없이 유랑해 떠돌다가 길가에 굶주려 쓰러져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매읍금이 안쓰럽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누어 주자 아이들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진보현 북면에 피우(避寓)하고 있던 이정회의 집까지 따라갔다. 이정회가에서는 이들을 거두어 양육하고 그 해에 반포된 사목 내용에 근거하여 구활 노비 입안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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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회 댁 노 매읍금의 빗기입안
이정회 댁 노 매읍금의 빗기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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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회가의 입안 요청에 대하여 진보현에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구활 당사자인 세 아이를 불러와 사실 여부를 심문하고, 이어 면색장(面色長)인 김유규(金有奎)와 삼겨린(三切隣)인 황용(黃龍), 조풍군(趙豊軍) 등 증인의 진술도 확보하였다. 면색장은 오늘날 면장과 같은 성격으로, 이정회가 우거하고 있던 진보현 북면 색장이 자기 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증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삼겨린은 이정회의 집을 중심으로 양쪽 옆집과 뒷집에 사는 세 사람을 지칭한다. 구활 당사자 및 증인 진술을 확보한 다음날 진보현에서는 사목에 근거하여 구활 노비를 승인하는 입안을 발급하였다. 이로써 여자아이 세 명은 떠돌다가 길가에서 굶어 죽기 직전에 이정회가에서 양육될 수 있었던 대신 노비로 신분이 하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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