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2. 경제 생활, 거래와 공증
  • 토지 매매와 백문기
김경숙

조선 초기 노비 매매가 활성화된 것과 달리 토지 매매는 과전법(科田法) 체제하에서 제한되었다. 즉, 과전법 규정에서 “전객(佃客)은 자기가 경작하는 전지(田地)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팔거나 함부로 증여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주(田主)가 모르는 사이에 해당 전지의 전객이 바뀌게 되면 수조권(收租權) 실현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경작자가 함부로 변동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곧 전주의 수조권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정책이었다.

전지를 매매한 사실이 발각되면 국가에서 매매값을 몰수하고 처벌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사적 소유권을 국가에서 인위적으로 제한하고 금지할 수는 없어서 과전법 체제하에서도 토지 매매는 음성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국가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는지 1424년(세종 6) 결국 다음과 같이 토지 매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감사가 계(啓)하기를, “무릇 전지를 방매한 사람은 혹 부모의 상장례(喪葬禮), 혹 묵은 부채의 상환, 혹 집이 가난하여 살아갈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모두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인데, 그 값을 모두 관에서 몰수하니 원통하고 억울함이 적지 아니합니다. 또 서울 안에서는 주택을 건축할 터와 채마밭은 방매를 허가하면서 유독 외방(外方) 전지는 매매를 금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청컨대 매매를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그 가운데에 국세(國稅)도 청산하지 않고 관청 수속도 없이 처리된 것만 율(律)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159)『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3월 기해(23일).

이에 따라 국가의 금제(禁制)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토지 매매를 인정하되, 다만 관청의 수속을 거칠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여기에서 관청의 수속을 밟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이는 토지 매매를 허용하더라도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넘기지는 않겠다는 국가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토지 매매의 완전 자율이 아니라 토지 방매가 불가피한 경우에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방침이었다. 토지 방매는 부모의 상장례, 묵은 부채 상환,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을 때 등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에 한하여 허용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으로 인하여 토지를 거래할 때에는 문기에 방매 사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하여야 했다. 그리고 매득인은 공증을 신청하는 소지를 작성하고 문기를 첨부하여 관청에 제출하였다. 관청에서는 해당 문서를 검토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웃 또는 마을 사람들을 증인으로 불러 심문한 후에 입안을 발급하였다.160)『세종실록』 권29, 세종 7년 8월 병신(30일).

이에 따라 조선시대 토지 매매 문기에는 현대의 부동산 계약서와 달리 방매 사유가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특히 토지 매매를 제한적으로 허용한 조선 초기에는 방매 사유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재하였음을 15, 16세기 매매 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점차 내려오면서 토지 매매가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널리 행해짐에 따라 방매 사유를 기재하는 것도 점차 형식화되어 18, 19세기 토지 매매 문기에서는 대부분 “긴히 쓸 데가 있다.”는 의미의 ‘요용소치(要用所致)’, ‘유요용처(有要用處)’, ‘긴유용처(緊有用處)’와 같은 관용구로 대체되어 갔다.

17세기 후반 경기도 영평에 거주하던 양인 윤상운(尹祥雲)이 유 참봉 댁에 논을 팔 때는 매매 문기에 방매 사유를 상세하게 기재하였다. 그는 무슨 이유로 논을 팔았을까? 그는 유 참봉댁의 비부(婢夫)로 영평(永平) 조량면(助良面) 기산(機山)에 있는 논 9마지기를 매득하여 갈아먹고 있었다. 그런데 부채를 갚을 다른 방도가 없자 처의 상전인 유 참봉 댁에 25냥을 받고 논을 팔 수밖에 없었다.

토지를 거래할 때에는 본문기(本文記) 또는 구문기, 즉 이전의 모든 거 래 문기를 매득인에게 넘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새롭게 작성하는 거래 문기를 신문기(新文記)라고 한 데 반하여 옛 문기, 본래의 문기라는 의미에서 구문기 또는 본문기라고 하였다. 그런데 윤상운은 본문기를 매득인에게 줄 수 없었다. 어릴 적 사승(師僧)이었던 의천(義天)이 촌가(村家)에 두면 염려된다면서 삼각산으로 가지고 갔는데 당시까지 돌려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실을 관에 고하고 입지를 발급받아 본문기 대신 첨부하였다. 거래가 이루어진 후 유 참봉 댁에서는 노 영선(永先)의 이름으로 관에 공증 절차를 거쳐 빗기입안을 발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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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참봉 댁 노 영선의 빗기입안
유 참봉 댁 노 영선의 빗기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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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토지는 노비와 달리 도망가거나 움직일 수 없는 부동산이었다. 수십 년 수백 년이 흘러도 토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주위 사람들 모두 누구 집 토지인지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굳이 관에 작지 값을 납부하면서 공증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소유권을 증명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이러한 토지의 특성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가면서 토지를 거래할 때 입안을 발급받지 않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렇게 공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매매 문기 자체로만 남아 있는 문서를 ‘백문기(白文記)’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토지 거래 문기는 대부분 이러한 백문기이다.

전당 및 환퇴 문기도 대부분 백문기로 남아 있다. 전당은 오늘날 저당 잡히는 것과 비슷한 거래 형태이다. 방매인이 토지를 영영 파는 것이 아니라 기한을 정해서 임시로 팔고 토지 값을 받았다. 그리고 정해진 기한이 지나기 전에 토지 값과 이자를 갚으면 토지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만약 갚지 못하면 그 다음 단계는 영영 방매가 이루어졌다. 환퇴는 토지를 거래한 다음에 이를 취소하고 물리는 거래를 말한다. 거래 자체를 취소하고 물리는 경우와 함께 전당 잡힌 토지를 다시 찾아올 때도 환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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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엽의 전당 문기
임춘엽의 전당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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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848년(헌종 14) 유학 임춘엽(林春燁)이 작성한 토지 문기이다. 그는 시급한 사채를 상환하기 위하여 부득이 자신이 매득하여 갈아먹고 있던 논을 처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논을 영영 팔아 버리는 것은 내키지 않았고, 다행히 시간을 벌면 갚을 자신감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우선 논 10마지기를 전당 잡히고 100냥을 빌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3년을 기한 으로 환퇴할 것을 약속하고 만약 기한을 넘기면 영영 방매할 것을 조건으로 환퇴 문기를 작성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 매매, 전당, 환퇴 등 다양한 토지 거래에서 관의 공증을 거치지 않은 백문기가 통용되었고, 그 자체로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문기만으로는 아무래도 소유권을 확립하기가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매도인은 해당 토지에 대한 이전의 모든 거래 문서를 새로운 매득자에게 넘겨주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토지 거래에서는 입안 과정의 소지, 초사 같은 문서들이 점련되는 대신 대체로 구문기, 본문기와 함께 일괄 문서를 이루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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