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3. 사회 생활, 민원과 민의
  • 조선 후기 백성들의 최대 민원, 부세 문제를 해결하라
김경숙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주요 관심사가 위선 사업에 집중되었다면, 일반 백성들의 최대 현안은 역시 부세 문제였다. 부세는 국가 재정 수입의 삼대 원천인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조선 후기 삼정 운영이 한계에 이르러 각종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 속에서 부세 문제에 민원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철원 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백성들이 겪었던 부세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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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의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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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군정은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양인 장정(良人壯丁)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군포(軍布) 두 필을 징수하는 대립제(代立制)로 변화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영조대에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하여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포를 두 필에서 한 필로 감해 주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양반층의 확대 및 군역 면제자의 증가로 군포 수입이 줄어들자 관에서는 남은 백성들에게 군포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 친족이나 이웃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족징(族徵)과 인징(隣徵) 등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였다.

계해년(1803년 또는 1863년) 9월 강원도 철원 북면 원지리에 사는 평민인 김복동(金卜同)의 소지는 조선 후기 군역 문제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 다. 그의 집에는 군역을 지는 남정이 다섯 명에 달하였다. 그와 아우는 어영 보인(御營保人)이던 부친의 군역을 이어받아 어영보의 역을 지고 있었고, 세 아들 가운데 큰아들은 포보(砲保), 둘째와 셋째는 그와 마찬가지로 어영보였는데 둘째아들은 마병(馬兵), 셋째 아들은 보삼군관(補蔘軍官)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 집에서 다섯 명의 남성이 군역을 지는 그 자체로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데 계해년 9월에 또다시 새로운 군역이 부과되었다는 뜻밖의 소식이 김복동 집안에 전해진다. 이미 보삼군관으로 군역을 수행하고 있는 셋째 아들에게 호련 보인(扈輦保人) 군역이 중첩(重疊)해서 부과되었던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면임(面任) 윤도신(尹道臣)이 농간(弄奸)을 부린 것이었다. 즉, 같은 마을에 사는 이응규(李應奎)가 어떤 사연인지 벌을 받게 되자 어영 보인과 호련 보인 두 군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벌을 대체하였다. 그런데 면임 윤도신은 군역을 배정할 때 이용규에게 뇌물 8냥을 받고 그를 호련 보인 군역에서 빼주고 대신 김복동의 셋째 아들에게 중첩해서 배정하였다. 김복동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군포를 납부하라는 통지를 받고서야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철원방어사(鐵原防禦使)에게 소지를 올려 아들의 첩역(疊役)이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관에서는 27일 “지금 군포를 거두는 때를 당하여 거론함은 옳지 않다. 후일에 다시 정소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미 군포 배정이 다 끝나고 지금은 군포를 거두는 때이기 때문에 관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김복동의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하였지만 관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상황에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달 후인 11월 초 다시 철원방어사에게 소지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관에서는 “세 아들이 네 아들로 된 폐단을 상세히 조사 보고하여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할 것”을 면임에게 명하는 처분을 내렸다. 철원방어사의 처분 내용을 볼 때 김복동의 억울함은 바로 해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김복동은 이듬해 9월에도 같은 문제로 다시 소지를 올린 사실이 확인된다. 면임 윤도신이 방어사의 조사 명령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나도록 지연시키며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김복동의 정소를 받은 방어사는 “어찌 이렇게 늦게 정소하였는가? 후일에 사정할 때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라는 뎨김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다음달 11일 셋째 아들의 호련 보인역을 탈급(頉給)하고 관에서 다른 사람으로 대신 정할 것을 명함으로써 일이 마무리되었다.

군역과 함께 환곡 또한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거리였다. 환곡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 제도로, 봄철 춘궁기(春窮期)나 흉년에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가을 추수기(秋收期)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들였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환곡은 궁민(窮民) 구제라는 본디 기능에서 관청의 재정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띠었다. 관청에서는 환곡을 통해 이자를 늘렸고 그 과정에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까지 더해지면서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가중되었다. 환곡의 부담이 커지자 백성들은 환곡을 받아먹지 않으려 하였으나 관에서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환곡을 부과하였다. 환곡은 부세의 일종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조선 후기 삼정 문란(三政紊亂)의 대표적인 분야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임신년(1812년 또는 1872년) 3월 철원 갈말면(葛末面) 동막리(東幕里) 도기점(陶器店)에 사는 김서경(金西京)의 발괄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민원이었다. 동막리에서는 마을에 부과된 군포와 환곡을 마을 사람들에게 분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서경에게도 동포(洞布)와 환곡이 배정되었다. 그는 자식 하나 없이 맹인인 늙은 아내와 단둘이 사는 외로운 처지의 등짐장수였는데, 1년 전 일을 그만둔 뒤로는 생계가 막막하고 매우 궁박한 상태였다. 원래 환곡이라면 그처럼 궁벽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제하는 것이 원 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환곡은 이미 부세화하여 백성들이 기피하였기 때문에 관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듯이 강제적으로 환곡을 배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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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짐장수
등짐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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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김서경에게도 원치 않은 환곡이 배정되었고, 그는 가을철에 이자까지 더하여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분배 대상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그는 호소력을 높이기 위하여 앞으로 처와 떠돌이 생활을 할 예정임을 강조하였다. 지금 환곡을 받더라도 다른 마을로 유랑을 떠나 버리면 관에서도 그에게서 환곡을 회수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호소가 유효하였는지, 관에서는 그를 동포와 환곡 분배에서 제외해 빼줄 것을 담당자에게 명하였다.

이로써 김서경은 유랑 생활을 이유로 환곡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환곡은 본래 김서경처럼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실시하던 제도이지만, 오히려 환곡을 받지 않기 위해 관에 민원서를 제출하는 모습에서 조선 후기 부세 제도의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하층민의 부세 민원이 군역과 환곡에 집중되는 것과 달리 전세(田稅)에 대한 민원은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양반층에서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특히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숙종대 이후로 이와 관련한 민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대동법에서는 특산물인 공물(貢物) 대신 쌀로 통일하여 전답에 부과하였는데, 토지 1결당 쌀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대동법으로 국가에서는 전세 수입의 부족을 메울 수 있었고, 공인(貢人)의 등장으로 상공업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인의 입장에서도 가호당(家戶當) 징 수가 토지 징수로 바뀌었기 때문에 빈한층(貧寒層)의 부담이 줄고 부유층의 부담이 늘어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도 별공(別貢)이나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여 백성들에게 이중 부담을 주는 경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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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경의 발괄
김서경의 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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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백성들은 대동법 운영상 어떠한 문제를 민원으로 표출하였을까? 철원 갈말면 지습포리(芝濕浦里) 탄막동(炭幕洞)의 동 대표 네 명이 관에 제출한 등장을 통해 그 일면을 살펴보자. 신미년(1811년 또는 1871년)에 탄막동의 대동법 운영에서 대동주비(大同注非) 이경실(李景室)이 최성진(崔聖辰)으로 교체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최성진은 다른 고을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에서는 마을 회의를 열어 그가 대동주비에 합당하지 않음을 결의하고, 대신 김칠복(金七卜)을 선정하였다. 신미년 10월 동장(洞丈), 두민(頭民) 및 소임(所任) 두 명 등 마을 대표들이 연명으로 철원방어사에게 등장을 올려 마을의 결의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방어사는 “여러 사람의 호소에 따라 바꾸어 차출할 것”을 담당 아전과 면임에게 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칠복은 권중희(權重熙)의 노비였는데, 상전이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김칠복이 어리고 우둔하여 숫자를 모르기 때문에 상전인 자신이 대신 거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호소하였다. 김칠복을 대신하여 전답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김업이(金業伊)를 주비로 차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방어사는 “호소한 바에 따라 시행하되 만약 김업이가 다시 호소하면 칠복을 다시 차출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로써 권중희는 민원서를 통하여 대동주비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업이 또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서를 관 에 제출하였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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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막동민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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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의 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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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조선 후기 삼정의 폐단에 대한 민인들의 요구는 정소 활동으로 표출되고 있었으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민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함이 쌓이고 더욱 적극적인 정소 활동으로 이어져 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조선 왕조는 이미 사회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민의를 수용하려는 의지 또한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민의가 막힌 민인들의 요구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결국 민란으로 폭발하게 된다. 1862년(철종 13) 진주 지역에서 집단 봉기로 폭발하기 전 단계에 정소 운동이 추진되었던 사실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잘 보여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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