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3. 사회 생활, 민원과 민의
  • 여성의 민원
김경숙

조선 사회의 여성은 과연 국가를 상대로 민원서를 제출하여 요구할 수 있었을까? 조선은 성리학에 기초한 사회로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사회 활동이 제한되었고, 제사, 재산 상속 등 가정 내에서의 권리와 의무가 상당 부분 축소되었다. 따라서 성리학적 사회 질서에 잘 적응하여 칭송을 받은 효부와 열녀가 일부 부각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시대의 희생자로서의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조선 여성의 민원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 조선 사회는 여성의 민원을 금지하지 않았으며, 현재 남아 전하는 여성의 민원서도 상당수에 달한다. 정소 제도는 신분이나 성별에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이나 노비도 국가에 민원을 제기하여 요구할 수 있었다. 조선 여성은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분명 제약받는 측면이 있었지만, 정소 활동을 통해 국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정소 문서를 직접 작성하였을까? 관에 제출하는 소지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고 관용구, 칭호 등이 독특하여 전문적인 소양이 필요하였다. 또한 일반인이 평소 자주 접할 수 있는 투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여성 소지를 보면 통용되는 소지 양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정소자의 칭호에서 남성이 주로 사용하는 ‘민(民)’, ‘의 몸(矣身)’과는 달리 ‘의 여(矣女)’, ‘여의 몸(女矣身)’ 등으로 여성임을 드러내고 있다. 소지 양식에 매우 익숙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며, 문자 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던 여성이 직접 작성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여성은 대체로 친족이나 마을의 식자층, 또는 관청 근처의 전문 대필가(代筆家)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또한 여성 민원은 남편 없는 과부(寡婦)의 민원이 많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보다는 억울하게 사망하거나 옥에 갇힌 남편 또는 자식을 구명하기 위한 민원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조선 후기 성리학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한문 소지와 함께 한글 소지가 혼재하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여성 소지의 17% 정도가 한글 소지이다. 남성 소지에서는 한글 소지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점과 비교할 때 이 또한 여성 정소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 정소는 사족 부녀자보다 평민 부녀자가 주도하였다. 사 족 부녀자의 민원은 조선 후기 매우 침체된 현상을 보이는데, 가부장적 질서에서 남편이나 아들이 있는 경우 여성이 앞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족 부녀자의 소지에는 자신이 부녀자의 몸으로 정소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을 상세하게 밝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민원 내용 또한 입후(立後)와 산송 등 집안과 가문을 위한 일 또는 남편이나 자식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일 등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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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억의 처 조씨의 원정
유진억의 처 조씨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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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억의 처 조씨의 원정
유진억의 처 조씨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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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순조 16) 옥에 갇힌 남편의 방면을 위하여 구례현감(求禮縣監)에게 원정을 올린 유진억의 처 조씨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구례에 살고 있던 조씨의 시가(媤家)에서 재산 상속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남편 유진억은 서고모(庶姑母)에게 상속분을 주지 않고 쫓아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다. 시삼촌(媤三寸)이 나서서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수차례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씨는 믿고 의지하던 시삼촌마저 화를 당하자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직접 나섰다. 그는 현감에게 남편의 방면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다만 고모를 쫓아냈다는 ‘구축(驅逐)’ 두 글자만 지워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놈도 하지 않을 패륜 행위를 양반가에서 저질렀다고 무고(誣告)당하니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례현감은 죽어 지하에 돌아가서도 은혜를 갚겠다는 조씨의 구구절절한 호소에 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먼저 서고모 몫의 재산을 즉시 갖추어 준 다음에 남편의 일은 처분을 기다리라는 처분이었다.

한편, 평민 여성은 사족 여성에 비하여 민원 활동을 훨씬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내용 또한 일상생활 중에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가 그대로 투영되었다. 평민 여성은 사족 여성과 달리 조선 후기 백성들의 최대 문제였던 부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망한 남편의 부세를 면제해 달라, 부당한 부세 징수를 막아 달라, 감당할 수 없는 부세를 면제해 달라는 등의 호소를 하였다. 이 밖에도 옥에 갇힌 남편이나 아들을 풀어 달라는 호소, 이웃과의 다툼, 전남편의 횡포로 가업이 파산할 지경이라는 호소, 생계를 위하여 실절(失節)하고 첩이 되었음을 호소하는 내용 등등 살면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적극적으로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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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의 원정
김 소사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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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1812년 또는 1872년) 7월 강원도 철원 북면(北面) 외풍천리(外豊川里)에 사는 김 소사(金召史)는 철원방어사에게 아들의 부세를 면제해 줄 것을 원정으로 호소하였다. 김 소사는 고향을 떠나 유랑하다가 강원도 철원에 들어와 머물고 있는데, 여섯 살짜리 아들 밀억(蜜憶)의 이름으로 호역(戶役)이 부과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과부의 처지로 어린 아들과 구걸하며 떠도는 사정을 호소하며, 아들을 호역 명단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철원방어사는 마을의 좌수(座首)에게 상황을 조사하게 한 후에 아들을 호역에서 제외하고 같은 마을의 노비 차금(次金)을 대신 충당하였다.

김 소사가 여섯 살짜리 아들을 위하여 민원서를 올렸다면, 정해년(1827년 또는 1887년) 7월 만종리(萬宗里)에 살던 조원서(曺元瑞)의 처는 재혼한 딸을 구명하기 위하여 원정을 작성하였다. 그녀의 원정은 조선 후기 하층민 여성의 열악한 생활 환경과 정절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조원서의 처는 ‘남편 성명+처’의 형태이기 때문에 양반 여성인 듯 보이지만, 자신을 ‘고녀(賈女)’라고 칭하고 있어 장사로 생계를 꾸려 가는 평민 여 성으로 보인다. 자신을 소녀(小女)라고 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녀의 딸은 어린 나이에 혼인하였으나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정에 와 있다가 유씨 양반가에 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남편 있는 부녀자의 몸으로 재혼한 것이 실절의 죄목에 걸려 옥에 갇힌 것이다. 만약 남편이 사망하였다면 재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이 딸은 남편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붙들려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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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서 처의 원정
조원서 처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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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조원서 처는 딸이 실절한 것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미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딸이 수절하지 못하고 실절한 것은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은 되겠지만 법적으로 처벌 받을 이유는 없다면서, 딸을 다시 유씨(劉氏) 양반가로 돌려보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조원서의 처와 딸의 경우는 조선 후기 하층민 여성들의 정절 관념이 매우 현실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생계를 위하여 실절하고 재가하는 길을 택하였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는 사회 이념보다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더욱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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