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4. 법 생활, 소송과 사회 갈등
  • 조선 사회의 신분 갈등, 노비송
김경숙

국가에서는 소송을 억제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단송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소송을 모두 막을 수 없었고 이를 공정 하게 판결하는 것이 더 우선적인 과제였다. 특히 소송은 당대 사회의 문제 갈등이 표출된 것이기에 해당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조선 사회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소송은 노비 소송이다. 노비는 그 특성상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가치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었고, 신분제 사회에서 사회적 관심의 주요한 대상이었다. 이는 특히 양천교혼(良賤交婚), 즉 노비와 양인이 혼인한 경우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양천교혼의 결과 태어나는 소생의 신분과 소유권이 어떠한 방향으로 결정되느냐에 따라 당사자 및 관련 집단의 이해관계가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비가 양인 여성과 혼인하는 노양처교혼 문제는 국가와 노주(奴主)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국가는 양인 및 군액(軍額)을 확보하기 위한 양인화 정책으로 종모법(從母法)을 선호하였던 반면, 노주는 사적 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한 종부법(從父法)을 주장하였다. 양자의 입장은 15세기를 거치며 조정되는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는 결국 노양처교혼 소생에 대하여 종부(從父)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양자의 입장은 계속 대립하면서 변통책(變通策)이 제시되었다. 결국 현종대와 숙종대에 일시적으로 종모법을 시행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1731년(영조 7) 종모법의 시행으로 확정되었다.

이와 같이 조정에서 국가와 노주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을 때 향촌에서는 법의 적용을 받는 당사자들, 즉 노비와 노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특히 16, 17세기 노양처병산(奴良妻幷産) 종부법이 적용되던 시기에는 노주들이 노의 소생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양처교혼을 권장하는 한편, 노의 처가 양처이기를 강요하고 심지어는 양처가 아닌데도 호적에 양처로 올리는 등 불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왕실 및 국가 기관의 공노비는 사노비에 비하여 구속력이 약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노의 양처로 억압하는 압공위천(壓公爲賤)이 두드러졌다.

한편, 노비 측에서도 노양처병산법의 맹점을 이용하여 반주투탁(叛主投托)의 근거로 삼는 경향을 보였다. 양처가 양인신분을 포기하고 노비를 자처하면 그 소생은 노(奴)와 비(婢) 사이의 소생이기 때문에 종모법이 적용되었다. 때문에 양처는 노주에게서 벗어나 세력가 또는 공노비로 투탁하기 위하여 스스로 양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노주의 형세가 빈한하여 노비의 사역 부담이 가중되거나 노비 단속이 허술할 경우에 주로 발생하였다. 특히 내수사(內需司), 성균관(成均館) 등 왕실 및 국가 기관 소속 노비는 사노비에 비하여 신역(身役)이 가벼웠기 때문에 주요 투탁처가 되었다. 노비 측에서도 노양처병산법을 이용하여 상전에게서 벗어나 신역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6, 17세기 노양처병산 종부법 체제하에서 노주와 노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소송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640년(인조 18) 김유견(金愈堅)과 김광진(金光眞)의 소송은 전형적인 예이다. 김광진은 김유견이 소유한 노 신석(申石)과 그의 처 은춘(銀春)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었다. 이른바 노양처병산 소생이었는데, 그는 수진궁(壽進宮)의 노 구화(仇和)를 증인으로 내세워 어미 은춘이 수진궁 노비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유견은 은춘이 양녀임을 주장하며 은춘의 다른 아들 곽득(郭得)의 호적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이 소송은 경기도 고양에서 시작되어 형조와 사헌부를 거쳐 국왕에게까지 올라간 끝에 노비 측의 승소로 판결되었다. 즉, 은춘은 양처가 아니라 수진궁 노비로 인정받은 것이다. 김유견은 수진궁의 비(婢) 은춘을 노의 양처로 억압하여 압공위천한 죄목에 걸려 유배형을 떠나야 하였다.

한편, 16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에 살던 이지도(李止道)와 다물사리(多勿 沙里)의 소송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발생하였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판결되었다.176)소송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임상혁, 「1586년 이지도·다물사리의 소송으로 본 노비 법제와 사회상」, 『법사학 연구』 36, 한국 법사학회, 2007. 원고 이지도는 남평(南平)에 거주한 충의위(忠義衛) 이유겸(李惟謙)의 아들이고, 피고 다물사리는 이유겸의 전래노(傳來奴) 윤필(允必)의 처로 영암에서 살았으며, 소송관은 나주목사 김성일(金誠一)이었다. 소송의 판결문에 해당하는 결송 입안은 소송관이었던 김성일 후손가에 전해 오고 있다.177)문숙자, 「양자녀(義子女)와 본족(本族) 간의 재산 상속 분쟁(財産相續紛爭)」, 『고문서 연구』 8, 한국 고문서 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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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겸은 양부모에게서 노 윤필을 상속받았는데, 1517년(중종 12) 윤필이 13살의 다물사리와 혼인하여 딸 인이(仁伊)를 낳았고, 인이는 영암에 사는 구지(九之)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낳았다. 이유겸가에서는 다물사리를 양인으로 파악하고 노양처병산 종부법을 근거로 그 소생들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딸 인이를 비롯한 6남매는 수십 년 동안 이유겸가에 앙역(仰役)하거나 신공(身貢)을 납부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다물사리는 남편 윤필이 사망하자 영암으로 시집간 딸집으로 옮겨가 살았다. 그런데 1584년(선조 17) 7월 25일 다물사리가 자신은 양인이 아니라 영암군 장부에 올라 있는 성균관의 비 길덕(吉德)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하여 이유겸가에서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소송을 제기하였고, 관찰사는 소송을 나주로 이송하여 나주 목사 김성일이 소송관으로 소송을 진행하게 되었다.

소송의 쟁점은 다물사리의 신분이 양녀인지 성균관 소속 공노비인지를 분별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소송에서 주목되는 점은 상전 측에서는 다물사리를 양인이라고 주장한 데 반하여 다물사리 자신은 오히려 노비임을 자처하였던 점이다.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양측의 주장 을 살펴보면 그들의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상전집이 어려움에 처한 틈을 타서 양인 신분을 버리고 성균관에 투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다물사리는 상전인 이지도가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노양처교혼을 강요하였고 공노비를 양녀라고 우기면서 많은 소생을 사환할 욕심을 내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물사리의 주장대로라면 딸 인이 및 소생 6남매는 성균관 소속 노비가 되어 상전가에서 벗어나 공노비로 처지가 개선될 수 있었다. 반면 이지도의 주장대로라면 지금처럼 이지도가에서 계속적으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소송관 김성일은 심리 절차를 거치며 다물사리의 호적, 성균관 노비안(奴婢案) 등 증거 문서를 조사하고 증인 심문을 진행한 끝에 이지도에게 승소 판결을 내림으로써 소송을 마무리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노비 측에서 노양처병산 종부법을 이용하여 상전에게서 벗어나 공노비로 투탁을 시도하다가 좌절된 사건으로 판결되었다. 특히 다물사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양인에서 천인으로 신분이 격하되는 듯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소생들은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처지가 개선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다물사리는 뚜렷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성균관의 비임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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