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4. 법 생활, 소송과 사회 갈등
  • 조선 후기 대표 소송, 산송
김경숙

노비송이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에 기초한 소송이라면 산송(山訟)은 조선 후기 사회의 성격을 반영하는 대표 소송이다. 이는 분묘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송으로, 종법 질서의 강화 과정에서 부계 중심의 분산이 형성되는 16, 17세기부터 등장하였다. 산송의 직접적인 원인은 주로 투장(偸葬)과 금장(禁葬)의 충돌이었다. 투장은 타인의 분산 국내(局內)에 허락 없이 분묘를 조성하는 행위를 말하며, 금장은 타인이 자신의 분산 국내에 묘를 조성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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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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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분묘의 규모와 경계는 이미 법제적으로 정해진 보수(步數)가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무 관료는 1품은 사면 각 90보, 2품은 80보, 3품은 70보, 4품은 60보, 5품은 50보, 6품 이하는 40보의 범위를 수호 영역으로 인정받았다. 관직이 없는 생원(生員), 진사(進士) 및 일반 사족은 6품직 관료에 준하여 사면 40보를 수호할 수 있었다.178)『경국대전』, 예전, 상장(喪葬).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이를 둔 차등(差等) 보수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법제적 차등 보수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16, 17세기를 거치며 성리학적 의례 질서가 정착되어 감에 따라 후손 들에게 조상의 분묘는 중요성과 의미가 커졌다.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확대시키는 위선 사업이 활성화되고 부계 분묘로 이루어진 족산(族山), 종산(宗山)이 형성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사족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택지관(擇地觀)에 근거하여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까지 수호 영역을 확대시켜 갔다. 용호 수호(龍虎守護)는 불법적인 광점(廣占)에 해당하였으나 사족은 대부분 이를 관철시켰고 더 이상 『경국대전』의 차등 보수를 지키지 않았다.

이에 따라 1676년(숙종 2) 국가에서도 현실적인 용호 수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속대전』에 다음과 같이 정식 법 조항으로 확정되었다.

사대부 분묘는 품질(品秩)에 따라 각각 보수가 있으니 금지를 무릅쓰고 투장하는 자는 법에 따라 파낸다(주(註) : 비록 보수가 없는 사람이라도 용호 내의 양산처(養山處)에는 타인이 입장(入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용호 밖은 혹 양산이라도 광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이 있는 산과 인가(人家) 근처에 투장하는 자는 금단(禁斷)한다.179)『속대전』, 형전, 청리.

그러나 용호 수호의 인정은 갈등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소송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용호 보수(龍虎步數)는 객관적인 수치가 아니므로 수호 범위에 임의적인 성격이 컸고 금장자(禁葬者)와 입장자(入葬者)의 합의가 쉽지 않았다. 소송관이 누구인가에 따라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그뿐 아니라 산송은 조상의 분묘에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도리, 즉 위선을 실현해야 하는 후손으로서는 쉽게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가문의 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지역 사회에서 해당 가문의 사회적 위상까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산송은 다른 소송과 달리 한번 발생하면 해결이 쉽지 않았다. 패소하여도 판결에 불복하여 정소자를 바꾸어 가며 심지어 대 를 이어 계속 소송을 제기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이었다. 향촌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상경 정소(上京呈訴)로 이어져 국왕에게 상언·격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상도 선산(善山)에 살던 노상추(盧尙樞)와 박춘로(朴春魯)의 소송은 이러한 조선 후기 산송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분쟁은 선산 상구미면(上龜尾面) 성남촌(星南村)의 안강 노씨 세장지(世葬地)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안강 노씨의 선산 입향조(入鄕祖) 노종선(盧從善)에서 시작된 선산(先山)으로 그가 성남촌 왼쪽 산록에 입장한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계장(繼葬)하였다. 그의 5세손 노사성(盧師聖)의 사위 이민선(李敏善)과 그 자손들은 오른쪽 골짜기에 입장하였고, 이민선의 사위 박정실(朴鼎實)과 자손들은 왼쪽 골짜기에 입장하였다. 이들 이씨가와 박씨가는 각각 사위의 자격으로 노씨가 세장지에 입장하였다가 그 후손들이 계장함에 따라 세장지를 형성하였고, 노씨가와 함께 세 집안이 경계를 정하여 침범하지 않고 각자 수호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807년(순조 7) 1월 박정실의 후손 박춘로가 모친을 노씨가 분산의 대안지처(對案之處)에 입장하자 분쟁이 시작되었다. 박춘로는 세장지임을 주장하였지만 노씨가에서는 투장이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소송은 노씨가의 세장지가 분화하여 형성된 외손 계열인 이씨가, 그리고 이씨가의 외손 계열인 박씨가의 세장지가 연접해 있는 상태에서 분산 수호권이 충돌하면서 소송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소송의 쟁점과 판결은 간단하여 박춘로의 투장묘를 파내면 끝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향촌에서 선산부사-관찰사-암행어사를 거치며 1년여 동안 체송(滯訟)되었다. 그 과정에서 박춘로는 수개월 동안 옥에 갇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분묘를 이장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이에 절박해진 노씨가에서는 상경 정소로 확대시켜 1808년 3월부터 1811년 4월까지 약 2년 동안 소송을 전개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노씨가에서는 상언 5회, 격쟁 원정 2회 등 총 7회, 박춘로는 두 차례의 격쟁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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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장군 묘
윤관 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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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가에서는 향촌의 소송에서 승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묘를 파내지 못하고 계속 지체되어 가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국왕에게 정소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판결에도 불복하면서 전후로 모두 일곱 차례의 상언·격쟁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묘를 파내지 못한 채 자신이 비리건송(非理健訟)의 죄목으로 의금부에 수옥(囚獄)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노씨가는 국왕의 판결에 불복하여 상언·격쟁을 시도하다가 비리건송으로 좌절당하였지만, 국왕마저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경우도 있다. 18세기 중반 경기도 파주(坡州) 분수원(分水院)에 있는 윤관(尹瓘)의 묘와 심지원(沈之源)의 묘를 둘러싸고 파평 윤씨가(波坪尹氏家)와 청송 심씨가(靑松沈氏家)에서 소송이 발생하였을 때만 해도 250여 년 동안 계속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려 시중 윤관과 고 상신 심지원의 묘에 사제(賜祭)를 명하였다. 당초에 윤관과 심지원의 묘가 파주에 있었는데, 윤씨가 먼저 입장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심씨가 외손(外孫)으로서 그 산에 묘를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가 자손들이 산 아래에서 비석 조각[碑片]을 습득하여 심씨가 자손과 쟁송하여 끝이 나지 않자, 임금이 양쪽을 모두 만류하여 다툼을 금하게 하고 각기 그 묘를 수호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관은 고려의 명재상이고 심지원은 아조(我朝)의 명재상이라 하여 똑같이 치제(致祭)한 것이다.180)『영조실록』 권103, 영조 40년 6월 갑오(14일).

소송은 파평 윤씨가에서 실전한 윤관의 묘를 찾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 바로 앞에서 윤관의 묘비 파편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두 집안은 조선시대 왕비를 서너 명씩 배출한 대표적인 명문가로서 조상묘를 수호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무력까지 동원하며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영조가 나서서 두 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각자 수호하도록 중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은 해결되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 오늘날까지 25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2005년에 와서야 두 집안은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로 원한은 없다며 극적으로 화해하였다. 그리고 2008년 7월 문화재 위원회에서 심지원의 묘를 이장하는 계획을 승인함으로써 영조대 시작된 두 집안의 산송은 250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산송은 위선과 가문의 명예가 달려있기 때문에 한번 발생하면 좀처럼 해결되기 힘들었다. 이 밖에도 분쟁지가 분묘라는 점도 소송을 쉽게 해결할 수 없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상대방의 분묘가 아무리 불법적인 투장묘일지라도 마음대로 훼손하거나 파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관의 허락 없이 남의 분묘를 파내거나 훼손하는 것을 사굴(私掘)이라 하였는데, 이는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적용하여 유배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투장자가 소송에서 패소하였어도 투장묘를 파내지 않고 계속 거굴(拒 掘)하면서 버티게 되면, 관에서 나서서 관굴(官掘)해 주지 않는 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사굴은 관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장자들에게는 투장묘를 파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특히 평민, 노비 등 하층민은 양반 사족가에게 대항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사굴 금지의 규정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들은 암장(暗葬), 즉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몰래 투장한 후 자취를 숨기거나 도망가 버렸다. 심지어 투장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平葬)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 나타났다.

그러면 분산의 주인은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여도 투장자가 누구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하는 한 그 투장묘를 파낼 수 없었다. 관에 투장자를 찾아 달라고 정소하면 관에서는 투장자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처분만 내릴 뿐이었다. 분산 주인이 투장자를 찾아서 함께 관에 출두할 때까지는 소송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투장자를 찾아내고 소송이 시작된 이후에도 투장자가 계속 버티게 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관의 강력한 대응이 없는 한 투장묘를 파내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산 주인이 대처할 수 있는 것은 계속적으로 관에 정소하면서 투장묘를 파내 달라고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정소 활동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관의 적극적인 대응을 기대할 수 없을 경우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극단적인 방법이 바로 사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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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로의 원정
김성로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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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철종 9) 3월 김성로(金聖魯)가 성주(城主)에게 올린 원정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윤씨가에서 김성로가의 묘역에 분묘를 투장함으로써 소송이 일어났는데, 윤씨가에서 분묘를 파내지 않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성로는 한밤중에 사굴을 감행하였으나 마침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곧장 관가에 나가 사굴하였음을 자수하고 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그가 상대방의 발고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자수한 것은 그 또한 사굴이 중죄임을 잘 알면서도 감행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후손으로서 조상에게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관에 죄를 짓겠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사굴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관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굴은 숨겨야 할 죄가 아니라 위선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이러한 선택이 그 혼자만의 결심이었을까? 조상의 분산을 지키는 일은 한 개인의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분산의 후손들로 구성된 가문 차원의 중대한 일이었다. 때문에 가문의 논의를 거쳐 한 사람이 대표로 사굴을 감행하고 자청하여 유배길에 오르면 가문 전체가 나서서 남은 처자식과 유배인의 뒷바라지를 책임지고 지원하였다. 산송은 후손들 전체의 문제였기 때문에 가문 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김성로도 문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가문의 대표자로서 자처하고 나섰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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