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4장 문서로 본 공동체 생활
  • 2. 사족의 향촌 지배와 촌락 생활 문서
  • 향약과 동계
심재우

향안과 향규가 사족의 향촌 지배 실상을 보여 주는 자료라면, 향약과 동계는 조선시대 향촌민이 향촌 사회의 여러 가지 제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자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각종 규약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확대보기
『주자증손여씨향약』
『주자증손여씨향약』
팝업창 닫기

먼저 향약은 ‘향헌(鄕憲)’, ‘약조(約條)’, ‘입의(立議)’ 등 다양한 명칭으로 일컬어졌는데, 글자 그대로 ‘일향의 약속’ 또는 ‘향인 간의 약속’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향인 중에서도 사족이 주축이 되는 조선시대 향약은 사족이 향촌민에 대한 교화와 향촌 질서 안정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에서 보급되었다. 그 향약의 외형은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이를 주자(朱子)가 보완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의 보급은 16세기 초반부터 이루어졌으며,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유입된 주자향약은 1517년(중종 12)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이 언해본(諺解本)을 출간하면서 조선 사회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성리학자가 향촌 사회의 안정 원리로 주목하기 시작한 향약은 중종대부터 관의 주도 아래 보급 운동을 벌였다.186)이 시기 향약 보급 운동에 대해서는 한상권, 『16·17세기 향약의 기구와 성격」, 『진단학보』 58, 진단학회, 1984에 상세하다. 즉, 1517년 6월 조정에서는 향약 보급 문제를 논의하고, 7월에는 국왕이 적극적인 실시를 결정하였다. 이 시기의 향약 운동은 감사(監司)를 중심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향약은 주자향약의 언해본을 대본으로 한 획일적인 내용으로 백성 교화에 초점을 두고 있었을 뿐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는 조선적인 변형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중종대 향약 보급 운동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향약 추진 인사들이 제거되면서 중단되었고, 선조 초에 다시 예조(禮曹)와 사간원(司諫院)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향약 실시 논의가 일어난다. 이때 전국적으로 실시된 향약은 기묘사림의 향약에 비해 사회 개혁적 성격이 약하였으며, 주자학적 교화를 의미하는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 성격이 강하였다. 이후 더 이상 전국에 일률적인 향약을 시행하는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서 향촌마다의 특수성을 반영한 개별적인 향약을 시행하였다.

이처럼 향약은 향촌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고 교화를 이루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누가 참여하는냐의 문제, 즉 사족만 참여하느냐 상하민(上下民)이 모두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성격이 달라진다. 다음에서는 조선화된 향약의 대표적인 예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예안 향립 약조(禮安鄕立約條)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서원 향약(西原鄕約) 두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예안 향약은 퇴계 이황이 경상도 예안현에서 시행한 것으로 사족만 참여하였다. 16세기 향촌 사회에는 정부의 수탈, 흉년, 사족의 무단 행위 등 제반 문제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하층민이 유망(流亡)하는 등 사족의 향촌 지배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퇴계를 비롯한 예안의 사족이 향촌의 교화와 안정을 위해 추진하고 마련한 것이 사족 간의 약속을 정한 향약이었다.

확대보기
예안 향립 약조
예안 향립 약조
팝업창 닫기

예안 향약의 특징은 향약의 일반적인 성격인 백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에 관한 내용보다는 사족의 무단적 행위를 금지하려는 자기 규제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점이다.

향약 구성원인 사족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잘못의 등급에 따라 벌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극벌(極罰), 중벌(中罰), 하벌(下罰)로 나눈 것이 그것이다. 이 중 극벌에 해당하는 것을 보면 부모에게 불손한 자, 형제간에 싸우는 자, 가도(家道)를 거슬러 어지럽힌 자, 사건이 관청에 저촉(抵觸)되어 고을의 풍속을 어지럽힌 자, 망령되이 위세를 부려 관청을 소란스럽게 하고 마음대로 하는 자, 향장(鄕長)을 능욕하는 자, 절조를 지키는 과부를 꾀이거나 협박하여 간음하는 자 등이다.

확대보기
서원 향약
서원 향약
팝업창 닫기

이처럼 사족이 자기 규제를 통해 향촌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예안 향약에 비해 율곡의 서원 향약은 좀 더 적극적으로 향촌 사회 상하 신분 질서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1571년(선조 4) 이이가 작성한 서원 향약을 검토해 보자.

서원 향약의 특징은 예안 향약과 달리 사족뿐 아니라 고을의 상하민 모두가 참여한다는 것, 수령인 이이가 주도하여 만들었다는 점이다.187)서원 향약의 특징에 대해서는 박현순, 「조선 시기 향벌(鄕罰)의 내용과 추이」, 『국사관 논총』 105, 국사 편찬 위원회, 2004 참조. 즉, 앞서 소개한 예안 향약처럼 사족들만의 규약이 아니라 향약의 시행 대상이 경내(境內)의 상하민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하층민이 면리(面里) 단위에서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서원 향약의 조직을 살펴보면 읍-면-리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실질적 운영은 면의 계장(契長) 주관하에 계회, 처벌, 상장(喪葬)에서의 부조(扶助) 등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면을 단위로 하였다. 이처럼 향약은 단위를 행정 체계와 일치시켰고 시행도 수령이 주도하였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사족층이 담당하였다. 사족은 면 단위의 계장을 담당하여 면 단위의 분쟁 해 결을 주도하였고, 계원의 잘못에 대해 태(笞) 40대 이하의 형벌권도 가졌다.

이상 조선시대에 시행한 대표적인 향약 두 가지를 소개하였다. 향약은 일차적으로 향촌 사회의 구성원이 자치적인 질서 유지와 상호 협조 등을 위해 만든 유교적인 규약으로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등이 4대 덕목이다. 그렇지만 향약은 조선적 변용을 거치면서 예안 향약과 서원 향약의 예에서 보듯이 시행 주체, 구성원들에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한편, 향약과 함께 조선시대 향촌 사회 공동체적 조직으로 소개할 것이 동계이다. 동계는 구성원의 계약에 의한 조직의 하나로, 16세기 이후 사족층이 촌락 단위에서 실시하고 있던 각종 조직을 말한다.

일정한 규약을 바탕으로 운영된 동계는 개별 촌락을 단위로 독자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목적은 기본적으로 촌락 사회 구성원 전원을 결속하여 사족 중심의 지배 질서를 강화해 나가려는 데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을 간의 상부상조(相扶相助)는 동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동계는 자체 내에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규약을 갖추고 있었는데, 동약(洞約), 동규(洞規), 동헌(洞憲), 입의(立議) 등이라 한다. 그리고 동 구성원의 명단을 적은 동안(洞案)·좌목(座目), 동계 구성원 간의 공유 재산인 동물(洞物)·계물(契物) 등이 있었다.

동계는 16세기 이후 촌락 단위에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풍속에 안으로는 도하(都下)에서부터 밖으로는 향곡(鄕曲)에 이르기까지 동린계(洞隣契)나 향도회(香徒會)가 있어 사사로이 약조(約條)를 세우고 서로 검섭(檢攝)한다.”188)『선조실록』 권7, 선조 6년 6월 갑자.는 『선조실록』의 기사는 이를 증명한다.

16세기의 동계는 족계(族契)라고도 표현하듯이 촌락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촌락의 동족(同族) 양반 가문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임진 왜란 이후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하여 지역 사회 전 주민의 협력이 필요하였고, 또 하층민을 사족이 동반자로 인식하면서 양반의 상계(上契)와 상민의 하계(下契)를 합친 상하합계(上下合契) 형태의 동계가 만들어졌다. 하민을 통제하여 사족적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것, 이와 함께 상부상조와 동네의 각종 부역을 조정하는 것이 동계의 주요 목적이었다.

확대보기
『고현동약지(古縣洞約誌)』
『고현동약지(古縣洞約誌)』
팝업창 닫기

조선시대 시행된 동계의 예로 제시한 것이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고현동(古縣洞)에서 시행된 동계이다. 이 동계는 1475년(성종 6) 이 지역 출신인 정극인(丁克仁)이 향음례(鄕飮禮)를 실시한 이래 조선 말기까지 동계 조직이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고현동 동계는 주로 사족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하층민인 하계인(下契人)이 동계에 참여한 것은 1704년(숙종 30)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동계 운영을 위한 동곡(洞穀)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각종 잡일을 맡아 하는 노비인 동노(洞奴)도 두고 있었다.189)태인현 고현동 동계(洞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인걸, 「조선 후기 향촌 사회 통제책의 위기-‘동계’의 성격 변화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58, 진단학회, 1984, 106∼110쪽.

조선시대 동계에 관한 자료는 현재 지역별로 다양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각종 동계 관련 자료의 유형과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90)이하 동계와 동계 관련 고문서에 대한 설명은 이해준, 앞의 책, 36∼338쪽에 의거하였다.

확대보기
경주 옥산 마을의 각종 동안
경주 옥산 마을의 각종 동안
팝업창 닫기

첫째, 동계의 조직, 규약 등을 정리한 동약, 동규 등이 있다. 이들 자료는 동계 조직의 성격, 가입원의 자격, 동계의 운영 절차, 동계 재정 관리, 동계 규약을 어긴 구성원에 대한 처벌 규정 등도 담고 있다. 한 지역의 동계라 할지라도 이후 여러 차례 증수(增修)를 거쳐 규정을 개정한 경우도 있으며, 동계 규약의 변천 과정을 통해 동계 운영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동내(洞內) 사람이 모임을 통하여 합의한 내용을 문서화하여 남긴 동중완의(洞中完議)가 있다. 동중완의는 ‘동중입의(洞中立議)’, ‘완문(完文)’, ‘입안(立案)’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통해 동내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동계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명단을 적은 동계안, 좌목이 있다.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는 양반과 평·천민의 상계안(上契案)과 하계안(下契案)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통해 마을의 성씨 구성과 변화 등을 엿볼 수 있다.

넷째, 동계의 공동 재산 내역을 정리한 동계치부책(洞契置簿冊)이 있다. 혼례나 상례 때 부조를 위해 마련한 기금의 내역, 동내 소유 전답, 각종 수입·지출에 대한 결산 내역 등이 정리되어 있어, 동계의 재정 운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조선시대 동계 조직의 운영과 관련해서 현재 남아 있는 고문서로는 동계에서 소유하고 있는 전답안(田畓案), 동내 부세 운영과 관련한 수조안(收租案) 등도 있다. 이들 동계 문서를 통해 우리는 촌락 사회의 경제적 실상과 동민의 상호 공동체적 유대와 교류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