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4장 문서로 본 공동체 생활
  • 2. 사족의 향촌 지배와 촌락 생활 문서
  • 촌계·두레 등 촌락민 조직
심재우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사람은 지역 사회에서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생활해 나갔다. 그런데 촌락 내에서의 공동체 생활과 관련한 문서는 앞서 소개한 향약, 동계 등 사족의 향촌 지배에 관한 문서가 대부분이며, 정작 평민, 천민 등 일반 백성이 남긴 문서는 많지 않다. 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하층 촌락민의 촌락 조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촌계(村契), 두레, 동제(洞祭) 관련 문서가 있다.

먼저 살펴볼 촌계는 자생적인 촌락민 조직으로, 여씨향약이나 사족의 동계와 무관하다. 즉, 촌계는 조선 전 시기를 통해서 사족의 향촌 조직과 기원 및 계통을 달리하는 하층민의 공동체 조직이었다.191)촌계에 관해서는 이해준의 연구가 선구적이다. 촌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해준, 앞의 책 참조. 조선시대 자연 촌락 단위에서 촌계가 조직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촌계에는 모든 주민이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동약, 동계가 사족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촌계는 상민(常民) 마을에서 생활 공동체의 자생적 필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촌계류 조직은 성리학 중심의 사족 지배 체제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동약, 동계, 향약 조직의 하부 구조로 흡수되거나 기능과 역할을 통제받으면서도 계속 유지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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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총수』
『호구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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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계에는 계를 관리할 임원이 있었으며, 촌계원은 생활 공동체로서 마을의 생업에 공동으로 대응하거나 두레 등 공동 노동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동계, 동약 등이 사족 지배 체제의 발전 변화와 궤를 같이하면서 이념을 바탕으로 정착된 조직이었던 것에 반하여, 촌계 등 하층민 조직은 생활 공동체의 자생적인 필요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왔다. 따라서 그 지향하는 목적이나 조직, 성격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었다.

문제는 하층민이 중심이 된 조직이기 때문에 촌계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촌계 관련 문서에 대해 체계적으로 살피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앞서 살펴본 『선조실록』의 기사 내용처럼 사족의 향약 조직과 별도로 촌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촌계의 편린(片鱗)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현재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에서 실시하던 하회동계(河回洞契)를 들 수 있다.192)하회 동계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정진영, 『조선시대 향촌 사회사』, 한길사, 1998, 204∼210쪽을 참고하였다. 하회동계는 계약(契約), 작계(作契), 사상상조(死喪相助), 정벌(定罰), 작계유사(作契有司), 환난상구(患難相救), 강신(講信), 동안(洞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본 적으로 사족층의 향촌 지배를 위한 동계였다. 이 동계에는 다음과 같은 하층민이 별도로 조직한 촌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한 마을 전체를 통틀어 대계(大契)라 하고 상하 모두 가입하게 한다. 하인 중에 또 각기 그 마을에서 별도로 소계(小契)를 만들어 혹 20여 집이 대계에 가입하기를 원하면 아울러 허락한다.193)『하회동계(河回洞契)』 작계(作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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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도 마을 전경
하회도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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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회동계를 구성한 사족은 마을별로 하층민이 소계 조직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소계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촌락민의 촌계를 의미하며, 하회동계 이외의 여타 동계에서도 하층민의 별도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촌계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들 기층민 조직은 향약, 동계 문서 등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을 뿐인데, 동계 자료 가운데 ‘하계조목(下契條目)’ 등은 그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다음으로 두레에 대해 알아보자. 촌락민의 공동체 조직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농민의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이다. 두레는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으로 농사짓던 농민 생활 풍습의 으뜸이다. 두레의 기원 자체는 매우 앞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두레의 독특한 생산 과정과 생산 방식은 조선 후기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앙법(移秧法)이 보급되면서 함께 등장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앙법은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강력한 노동 조직, 두레의 출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촌락에서의 촌계 조직도 두레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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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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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두레의 구성에서는 지주층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오직 평민과 농민층만이 참가하여 농민 사회의 자율성을 높였다. 그리고 두레는 자연 마을을 단위로 10명에서 30여 명 내외로 구성하였는데, 대개 한 개의 자연 마을에서 한 개의 두레가 조직되었다.

두레 조직에서는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노동 회의로서 호미모듬을 가졌다. 이 호미모듬은 반드시 마을 농경 의례(農耕儀禮)와 결부되어 나타나 농경 사회의 풍요를 비는 집단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 모내기가 끝난 뒤 대동회의, 대동놀이를 하였고 호미씻이로서 농사를 마무리 짓는 회의를 가졌다.194)박경하, 「민의 조직과 생활 자료」, 『조선 시기 사회사 연구법』, 1993, 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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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놀이
두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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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본 촌계와 마찬가지로 두레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다. 이 중 두레 참여자들이 신참례(新參禮)로 선배에게 술, 음식 등을 대접한 내역을 기록한 진세책(進貰冊)은 두레의 조직과 관련한 내용을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밖에 보조 자료로 농사의 수확량을 기록한 추수기(秋收記), 두레 운영 경비 등을 기록한 치부책(置簿冊) 등이 일부 남아 있다.

여기서 두레에 들어가는 사람이 거쳐야 할 통과 의례를 기록한 진세책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195)진세책에 관한 이하의 서술은 주강현, 『두레 연구』, 경희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5, 180∼182쪽 참조.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일정한 의례를 거쳐서 두레의 일원이 되었는데, 술을 한턱내는 이같은 의례를 ‘진서턱’이라 하였다. 진서턱을 내는 의식은 조선 후기 가장 보편적인 두레 행사의 하나였는데, 이 진서턱을 문헌에서는 ‘진세(進貰)’라 하였다. 따라서 진세책은 진서턱의 내용을 기록한 책자이다.

진세책은 대개 두레의 책임자인 좌상(座上) 이름을 먼저 적고 두레에 참가하는 신참자 및 마을 유지들이 내놓은 술동이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작성하였으나, 농사일 전반을 관장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경우도 일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 진세책을 살펴보면, 진세원(進貰員)이 105명이며 호당 회비 납부액, 농사일에 소용된 임금 책정액 등이 함께 적혀 있다. 비록 두레 작업이 김매기에 국한되었다고 하더라도 진세책에 전 노동 과정을 담고 있는 점을 볼 때 두레가 모든 작업의 중심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한다. 아울러 두레가 일시적 조직이 아니라 항구적 조직이었음을 이같이 문서화된 진세책의 존재가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촌락민들은 자연 촌락을 중심으로 공동 신앙을 통해 마을 전체의 평안과 행복, 풍년(豊年), 풍어(豊漁) 등을 기원하는 제사를 행하였다. 동제는 마을 공동체 성원이 일정한 장소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연중행사(年中行事)의 하나이다. 동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였으나 보통 동제, 당제(堂祭), 마을굿 등으로 불렀다. 동제는 한밤중에 지내는 제사와 제사 후에 전 주민이 참여하는 축제로서의 굿, 동제 전후에 열리는 마을의 자치 회의인 ‘동회’라는 세 가지 행사를 모두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196)정승모, 「촌계·동제·두레」, 『조선 시기 사회사 연구법』,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3, 320쪽.

동제는 마을만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높이기 위한 행사이기 때문에, 이를 무속적 시각에서 미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동제 관련 자료를 통해 당시 마을민의 민속 제의(祭儀) 내용, 마을 행사의 주체와 위상, 특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동제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는 축문(祝 文)·홀기(笏記)·물목(物目) 등 행사 진행과 관련한 고문서, 읍지(邑誌), 문집(文集), 연대기(年代記) 그리고 문헌 이외에 구전(口傳) 자료 등도 있다. 다만 촌계, 두레 자료처럼 동제와 같은 종교적 행사도 기록이 많지 않아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음은 20세기 후반 민속 조사에서 소개된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의 정동(井洞) 당산제(堂山祭)에 관한 것이다.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에서는 주민들의 집단 신앙의 하나인 당산제가 최근까지 이어져 내려왔다.197)신학리 정동 당산제에 대해서는 박래경, 「민속 조사」, 『향토 문화 유적 조사-영암군 시종면-』 4, 향토 문화 개발 협의회, 1985, 184∼186쪽 참조. 신학리 정동 당산제는 밤에 횃불을 사용하고, 동네 남녀노소가 참여하며, 농악대 편성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같은 당산제 때 사용한 축문은 다음과 같은데, 유불선(儒佛仙)의 내용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新鶴里 井洞 堂山祭 祝文

歲次 甲子 正月 ○ 朔十四日 ○○

    總代表  ○○○  敢昭告于

井洞戶井 無事 無窮 永泉 富强 無病 出世 享樂 請願 訣 諳次 應

觀世音菩薩 聖天 決正之次祝 願耳

이 축문은 다른 축문 형식과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하였듯이 신학리 정동 당산제에 관한 내용은 최근의 현지 조사를 통해 파악된 것으로 시기가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시대 마을에서 행한 다양한 제의의 실상에 대한 파악은 문헌뿐 아니라, 인류학, 민속학 등의 조사 방법론이 적극 동원되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사족의 향촌 지배와 구별되는 평·천민들의 공동체 조직, 그와 관련한 문서를 촌계, 두레, 동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검토 과정에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시대 촌락민들이 남긴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자료가 많지 않다고 공동체적 생활 모습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조선 사회 속의 다양한 민의 조직, 생활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 분석 과정에서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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