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4장 문서로 본 공동체 생활
  • 3. 교육 기관과 여론 형성 관련 문서
  • 향교·서원의 문서와 유생안
심재우

앞서 향촌 사회 지배층의 향촌 지배 체제와 관련한 자료, 그리고 하층민의 공동체적 유대와 교류에 관한 문서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지역 사회의 유생은 배우는 과정에서 동료와 교유하였고, 때로는 그들 간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 그들만의 의사를 결집하거나 표출하기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서가 사용되었다. 이제부터는 유생 명부를 포함한 조선시대 교육 기관에서 생산한 주요 문서를 소개하기로 한다. 당시 교육은 신분이 높은 양반 자제(子弟)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소개하는 문서도 양반 지배층 중심의 자료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고 성리학적 가치의 확산과 보급에 주력하였다. 이처럼 유교 정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백성을 교육시키는 것을 중시하였고, 따라서 조선 정부의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유교의 정치 이념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각지에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198)이하 조선시대 교육 제도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전경목, 「교육 제도」, 『조선시대 생활사』, 역사 비평사, 1996 및 이승준,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두산 동아, 2005에 의거하였다. 즉,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 學)을, 그리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립하였다. 관학(官學), 즉 조선 정부가 주도하여 세운 교육 기관은 당연히 정부 차원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우선 강당(講堂), 학사(學舍) 등의 건물을 설립해 주고 아울러 유교의 교리에 밝은 사람을 교관(敎官)으로 임명하여 강의토록 하였으며, 각종 교재(敎材)를 간행 지급하고 학교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학전(學田)을 마련해 주는 등 건립과 운영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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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친림강론도(成均館親臨講論圖)
성균관친림강론도(成均館親臨講論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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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의 주도와 지원으로 설립한 관학과 달리 사학(私學)은 주로 지방의 사림(士林)이 설립하였다. 서원(書院), 사우(祠宇), 서재(書齋), 정사(亭舍), 서당(書堂)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학은 경우에 따라서 정부로부터 약간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개 각 지방 사족이 건립과 운영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조선 중기부터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관학의 고유 기능이 점차 쇠퇴하면서 서원이 교육 기관으로서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교육 기관을 몇 개 더 꼽는다면 향교와 서원 이외에도 양사재(養士齋), 사마재(司馬齋) 등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지방의 사족이 중심이 되어 인재 양성을 위해 기존의 교육 기관과는 별도로 설립한 것이다. 양사재는 흥학재(興學齋)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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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알성도(鄕校謁聖圖)
향교알성도(鄕校謁聖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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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향교와 서원에서 유생은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이들이 생활하면서 어떤 문서를 생산하였을까?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는 향교나 서원 자료는 유생의 생생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이 많지 않으며, 향교와 서원의 운영과 관련한 문서, 유생의 인명을 기록한 명단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자료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구체적으로 향교와 서원 관련 문서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향교는 조선시대에 정부가 각 지방에 설립한 교육 기관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유교 이념을 보급하기 위하여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으로 전국에 세운 관학이다. 1127년(인종 5)에 등장한 향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성종대에는 모든 군현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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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향교 대성전
장수 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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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향교는 학생을 가르치던 교육 기관이면서, 동시에 지방 양반이 출입하며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즉, 향교는 향청이나 서원과 마찬가지로 지방 양반의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향촌 기구의 하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향교가 본래의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향촌의 지배 세력이던 양반은 여전히 향교를 매개로 활동하였다. 특히 각 지역의 양반은 향교의 유생으로 등록을 해야 양반으로서 인정을 받 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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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향교의 청금안
장성 향교의 청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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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향교의 청금안
장성 향교의 청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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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향교 관련 문서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향교 유생의 명부인 청금안(靑衿案), 교생안(校生案) 등이 있다. 다음으로 향교 소속 전답 규모와 경작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향교 전답안(鄕校田畓案), 향교 소속 노비의 명부인 노비안(奴婢案) 등이다. 이 밖에 향교 교임의 명부인 교임안(校任案), 향교 건물의 연혁을 살필 수 있는 중수기(重修記)와 고문서 등을 들 수 있다.

향교 소장 문서의 소장 사례를 예시하기 위해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의 장성 향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향교 문서를 세 가지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1770년(영조 46)에 작성한 장성 향교 유생들의 명단을 적은 청금안이다. 이 청금안은 향교 소속 유생 전체의 명단이 아니며 향교의 숙소(宿所) 가운데 동재(東齋)에 거주하는 유생들만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향교에서 학생의 기숙사는 위치에 따라 동재와 서재(西齋) 두 곳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둘은 위치의 차이뿐 아니라 이용하는 학생들도 구별이 있었다. 동재에는 대체로 양반 유생이 출입하였고, 서재에는 서얼·평민이 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생의 명단을 적은 명부는 동재 유생의 것은 청색 표시에 ‘청금록(靑衿錄)’, ‘청금안’이라 불렀지만, 서재 유생의 명부는 단순히 ‘교생안’, ‘서재안(西齋案)’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199)윤희면, 『조선 후기 향교 연구』, 일조각, 1990, 8∼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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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향교의 교안
장성 향교의 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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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향교의 향교 전답 양안
장성 향교의 향교 전답 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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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향교 청금안에 등장하는 총 259명의 동재 유생들도 서재 유생들에 비해 신분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사망한 자는 이름 상단에 ‘선(仙)’이라 표시하였으며, 명단 말미에는 색장(色掌) 2명과 장의(掌議) 2명의 수결이 있다.

다음으로 장성 향교의 교안(校案)과 향교 전답 양안(鄕校田畓量案)이다. 교안은 고종 때에 재직하던 재장(齋長), 장의(掌議), 색장(色掌) 등 장성 향교의 임원 명단이다. 이를 통해 당시 장성 향교 임원의 구성을 알 수 있다. 향교 전답 양안은 1805년(순조 5)에 장성 향교에서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조사하여 작성한 양안이다. 이 양안을 통해 당시 장성 향교 소유 전답의 규모와 등급, 소재지, 경작자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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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도
도산서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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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에 이어서 서원에 대해 알아보자.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조선시대 중요 교육 기관의 하나였다. 조선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에 건립한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서원의 건립이 활발히 추진되어 서원의 수는 선조 연간(1567∼1608)에 크게 증가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중앙 조정에서의 당쟁(黨爭) 격화와 맞물러 각 지역별로 자기 학파나 가문의 위세를 강조하기 위하여 서원이나 사우를 남설(濫設)하는 현상이 크게 심화되었다. 그 후 영조대 탕평책(蕩平策)에 의해 당쟁이 점차 줄어들면서 서원의 남설 현상도 잦아들었다.

서원은 우선 교육 기관으로서 강학(講學)과 자아 단련을 위한 장소로서 기능하였지만, 서원에 모신 인물에 대한 제향(祭享)도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또 향촌 사림이 모이고 사귀는 공공 장소였다. 서원은 사림의 모임 장소이면서, 사림 세력들의 여론이 형성되는 정치의 장이기도 하였다.

서원은 조선 후기 지방 사족이 출입하는 공간이자 향촌 지배 기구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 사족의 동향과 인적 연계망, 이들의 향촌 사회에서의 교유와 생활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는 기구이다. 현재 서원에는 매우 다양한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자료를 통해 해당 서원뿐 아니라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사림의 존재 양상을 해명할 수 있다. 서원에 소장된 자료를 몇 가지로 나누어 유형화하면 다음과 같다.200)이해준, 「서원·사우 조사와 고문서 자료」, 『조선 후기 문중 서원 연구』, 경인 문화사, 2008.

첫째, 서원의 창건, 중수 등에 대한 사적(事蹟)을 기록한 자료이다. 서원, 사우의 역사를 말해 주는 자료로는 우선 관련된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한 서원지(書院誌), 사우지(祠宇誌)가 주목된다. 이들 서원지, 사우지는 서원, 사우의 연혁을 상세히 알려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원 자료가 아닌 후대의 정리물이라는 점에서 한계도 있다.

둘째, 서원에 배향(配享)된 인물과 관련된 자료이다. 해당 인물들이 남긴 문집(文集), 관련 금석문(金石文)뿐 아니라 그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 고을 유생이 올린 각종 청원 서류, 고문서도 여기에 포함된다.

셋째, 서원 조직과 관련한 문서이다. 서원 유생의 명단인 유안류(儒案類)와 서원 임원 명단을 적은 임원록(任員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 서원 운영과 관련한 각종 규약을 수록한 자료이다. 서원 운영의 원칙이나 규정을 담은 각종 규약, 절목, 완문, 학규(學規) 등이 이에 해당하며, 특정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마련한 홀기(笏記)도 포함된다.

다섯째, 토지, 노비 등 서원의 경제 기반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서원 소속 전답과 노비의 규모를 보여 주는 전답안(田畓案)과 노비안(奴婢案), 그리고 서원의 재정 현황을 보여 주는 회계 장부나 고문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상 소개한 것이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주요 자료이다. 현재 일부 서원 자료는 영인(影印)되어 활용되고 있지만, 아직 상당수가 학계에 공개되지 않았다.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원에 관련된 문서로 제시한 것이 대각 서원(大覺書院) 관련 인명 자료이다.

대각 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건립한 서원으로,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있다.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서원으로, 해당 지역의 학자인 진양 하씨 하항(河沆)을 비롯하여 손천우(孫天佑), 김대명(金大鳴), 하응도(河應圖), 이수(李壽), 유종지(柳宗智), 하수일(河受一) 등 모두 칠현(七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각 서원 봉안 집사안(大覺書院奉安執事案)은 1610년(광해군 2) 하항을 대각 서원에 봉안(奉安)할 때에 집사(執事)로 참가한 인사의 명단을 적은 것이다. 대각 서원 원임록(大覺書院院任錄)은 대각 서원의 원장(院長)·도유사(都有司) 등 원임(院任)을 지낸 인사의 명단을 적은 기록이며, 대각 서원 심원록(大覺書院尋院錄)은 대각 서원을 방문한 인사들의 명단, 즉 지금의 방명록(芳名錄)에 해당한다. 이들은 비록 단편적인 자료지만, 대각 서원과 연계된 각종 인물 명단을 종합해 보면 서원과 연계된 이 지역 주요 인사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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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 서원 봉안 집사안
대각 서원 봉안 집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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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 서원 원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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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 서원 심원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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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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