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4장 문서로 본 공동체 생활
  • 3. 교육 기관과 여론 형성 관련 문서
  • 여론 수렴과 통문·유소
심재우

앞서 보았듯이 향교와 서원은 단순히 교육 기관으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향교의 교육 기능은 약해졌지만, 사림은 향교에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 같은 향촌 의례를 주관하면서 여전히 향교를 이용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양반 사림들은 향교에 모여 향교의 교육 활동이나 문묘(文廟) 제향에 대한 문제를 의논할 뿐 아니라 향촌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더 나아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향촌 사회의 여론을 수렴하여 지방관에게 전달하거나 중앙에 올려 정책에 반영하려는 활동까지 펼쳤다.

향교와 서원에서 활동한 양반 유생들은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활동 과정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문서를 생산하고 남겼다. 그 중 하나가 통문(通文)이다. 향촌의 유생들은 통문을 중앙의 성균관이나 다른 지역의 향교나 서원과 연락할 때 활용하였다. 즉, 유생들은 향교와 서원에 모여 여론을 수렴하고 그것을 통문으로 작성하여 다른 지역의 유생들에게 알림으로써 여론을 확산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확대보기
『유서필지』
『유서필지』
팝업창 닫기

한편, 향촌의 유생들이 통문을 올려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문제는 해당 고을 수령에게 상서(上書)를 올리거나, 혹은 직접 상경(上京)하여 조정(朝廷)에 상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역에서 유생들이 여론을 결집하는 과정, 여론의 향방을 보여 주는 문서로 통문 외에 상서, 유소(儒疏) 등이 있다. 이 중 유소란 유생이 올린 상소를 특별히 부르는 말이다.

이들 문서의 작성 배경, 문서 형식을 살피기 위해서 먼저 통문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통문은 향교나 서원의 유생들이 공동된 의견을 결집하거나 공동의 관심사를 공론화하기 위해 왕래하는 일종의 연락 문서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국가의 정책에 관한 것에서부터 특정 사안에 대한 동의 요청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통문은 향교, 서원, 사우의 유생이 펼치는 교육 외적 활동상, 특히 사회적·정치적 활동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향촌 사회에서 유생의 위치와 역할 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201)국립 민속 박물관, 『생활 문화와 옛문서』, 1991, 137쪽.

통문은 조선 전기부터 상당히 보편화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통문, 격문(檄文)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뒤로 조선 후기에는 통문이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1,100여 건의 통문을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통문의 작성 주체, 내용은 매우 다양하였다.202)이하 현존 통문의 유형과 내용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김경숙, 「조선 후기 문중 통문의 유형과 성격」, 『고문서 연구』 19, 한국 고문서 학회, 2001에 의거하였다.

확대보기
경상도 사림 통문
경상도 사림 통문
팝업창 닫기

통문은 첫째, 서원, 향교 등에서 많이 활용하였다. 서원, 향교 등에서는 선현을 서원이나 사우에 향사(享祀)하는 문제, 선현의 문집 간행에 관한 일, 고을의 효녀와 열녀에 대한 표창 추진 등과 관련해서 통문을 이용하였다.

둘째, 문중(門中)에서 문중의 대소사와 관련해서 통문을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친족 질서는 17세기 전후로 부계 중심으로 변화하여 문중, 종족이 형성됨에 따라 위선 사업(爲先事業)과 족보 간행의 성행, 종회(宗會), 족계 형성 등의 양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변화 모습은 문 중 통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조상의 현창(顯彰), 족보 간행, 묏자리를 둘러싼 소송인 산송(山訟), 종회나 족계 등의 내용이 문중 통문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확대보기
송시열 문집 관련 통문
송시열 문집 관련 통문
팝업창 닫기

이 밖에 각종 계와 향회·향약 등 조직에서 향촌 사회의 여러 사안과 관련하여 작성하거나, 혹은 개인이나 특정 단체에서 발급하기도 하였다. 이제 실제 통문의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소개하는 경상도 사림 통문은 1768년(영조 44)에 경상도의 사림이 평안도 강계(江界)에 있는 경현 서원(景賢書院)에 보낸 것이다. 경현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이언적(李彦迪)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 통문에서 경상도 사림은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충효의 실적이 뛰어나므로 이전인도 함께 추향(追享)해 줄 것을 경현 서원 측에 요청하였다. 통문 말미에는 통문의 취지에 동의하는 사림의 명단과 수결(手決)이 찍혀 있다. 통문 중에는 이처럼 향교나 서원의 선현 배향 문제와 관련한 유생의 여론을 보여 주기 위해 작성한 것도 있다.

송시열 문집 관련 통문은 스승의 문집 발간을 위해 제자들이 연락 사항을 주고받는 내용이다. 즉, 1699년(숙종 25) 송시열의 제자 이희조(李喜朝) 등이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려고 각지에 돌린 통문이다.

통문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연락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에 사림 간에 특정 사안을 의논하여 여론을 모으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여러 사람에게 공지해야 하는 문서이기 때문에 각각의 사안에 적절한 다양한 통문 전달 방식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한편, 통문을 통해 수렴된 여론은 필요한 경우 상서, 상소를 통해 해당 고을 수령이나 조정에 표출되기도 하였다. 즉, 향교, 서원 등을 매개로 한 여론 결집 과정에서는 통문을 활용하였지만, 이를 통해 확보한 정치적 의사나 요구 사항은 별도의 문서로 작성하였다. 고을 수령에게 보고서나 진정서의 형태로 올린 것으로 품목(稟目), 상서 등이 있고, 국왕에 제출된 상소문으로 유소가 있었다.

확대보기
진주 향중 품목
진주 향중 품목
팝업창 닫기

먼저 품목을 보자. 품목은 서원이나 향교에서 그 지방의 수령에게 보고하거나 청원하는 문서의 하나이다. 대개 서원이나 향교의 권리, 특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수령에게 보고하거나 진정하는 내용이 많다.

진주 향중 품목(晉州鄕中稟目)의 품목은 1881년(고종 18)에 진주의 유생이 진주 목사에게 올린 것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인 하증(河憕)의 위토(位土)에 대한 영구 세금 면제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원래 하증은 임천 서원(臨川書院)에 제향이 되었다. 그런데 이 서원이 1868년(고종 5) 훼철되면서 하증을 제향하는 데 사용하던 위토가 징세(徵稅)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유생들이 이 위토에 대한 세금 면제를 요청한 것이 바로 이 품목이다. 품목의 하단에 휘갈겨 적은 것은 진주목사의 판 결문(題辭)인데, “이미 이러한 일로 창주(滄洲) 하 선생의 본손(本孫)에게 제사(題辭, 일종의 판결)를 내린 바 있다.”고 하여 이 문제를 다시 재론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유생들이 작성한 청원서, 진정서의 일종인 상서를 하나 소개한다. 진주 유생 등이 올린 상서는 특이하게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유생들이 제출한 것이다. 1842년(헌종 8)에 진주의 유학 이경상(李敬常) 등 경상 우도(右道) 유생들이 진주 사람 하진태(河鎭兌)의 효자 표창을 건의하는 내용으로, 암행어사가 효자 행적을 잘 모아서 조정에 보고해 달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에 대해 어사는 제사(題辭)에서 “이는 공의(公儀)에 달려 있으니, 굳이 번거롭게 소장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부정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마패(馬牌)가 찍혀 있는 것이 흥미롭다.

확대보기
이경상 등 상서(李敬常等上書)
이경상 등 상서(李敬常等上書)
팝업창 닫기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필요가 있을 경우 유생들은 때로 집단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많은 인물이 참여하여 향촌의 공론을 결집하고, 조정에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같이 고을 유생들이 올린 상소가 유소이다.

지역의 유생들이 상소문을 작성하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향촌 유생들은 일반적으로 연명(聯名)으로 상소할 일이 생기면 우선 향촌의 장로(長老)에게 상소할 뜻을 전달하여 허락을 구하는 한편, 상소를 올리기 위한 유사(有司)를 선발하였다. 그리고 해당 사안을 공론화하기 위해 대개 통문을 작성하여 향교와 서원을 비롯한 여러 곳에 전달하였다.

상소를 작성하기 위한 모임이 이루어지면 그 자리에서 상소문 제출 책 임자에 해당하는 소두(疏頭)를 정하고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상소문 작성 및 제출 과정은 사안에 따라 다양하여 일률적이지 않지만,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이기 때문에 상소문 양식은 일정한 원칙을 지켜야 하였다. 참고로 조선시대 상소문의 서식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로는 『공거휘편(公車彙編)』이 있다.

확대보기
『공거휘편』
『공거휘편』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공거휘편』
『공거휘편』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공거휘편』
『공거휘편』
팝업창 닫기

『공거휘편』은 조선시대 상소문 서식의 범례(凡例)를 제시하고, 각종 상소문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소개한 책이다. 편자는 알 수 없으며, 필사한 연대 또한 정확하지 않아 철종대 이후라는 것만 알 수 있다.

『공거휘편』 책의 앞부분에 실린 ‘소서차범례(疏書箚凡例)’는 상소, 차자(箚子)의 작성 요령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상소를 올리는 관직자의 자계(資階)와 관직명의 기재 순서, 상중평(上中平) 삼행(三行)을 쓰는 요령, 차자의 경우 연차(聯箚)와 독차(獨箚)를 할 수 있는 관직의 범위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공거휘편』은 관직에 있는 자들이 올리는 상소문의 형식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지방 유생들이 올리는 유소의 형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확대보기
충청도 유생 상소
충청도 유생 상소
팝업창 닫기

그럼 실제 유생들이 올린 상소문으로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충청도 유생들의 연명 상소문을 예로 들 수 있다. 상소문의 작성 시기는 1865년(고종 2)인데, 내용은 흥선 대원군 때 토호(土豪)들의 소굴로 민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헐려 나간 만동묘(萬東廟)를 다시 복설(復設)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만동묘를 훼철한 조치가 부당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720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였고, 이들의 성명과 수결이 상소문 말미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상소문의 길이는 무려 1,120cm에 달한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향촌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국왕이 답변을 하지 않아도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유소가 공론화된 이후에는 반드시 비답(批答)을 내려야 했으며, 18세기 이후에는 국왕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지방 유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 통제되기도 하였다.203)설석규, 『조선시대 유생 상소와 공론 정치』, 도서 출판 선인, 2002.

이상 조선시대 유생들의 출입처인 교육 기관 관련 문서를 개관하고, 각종 문서를 통해 본 유생들의 여론 수렴과 의사 표출 방식 등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향촌 사회 유생들은 향교와 서원을 출입하면서 필요한 경우 정치적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통문, 상소 등의 문서를 만들어 이용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