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4장 문서로 본 공동체 생활
  • 4. 각종 계와 결사 조직 문서
  • 보부상 문서
심재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달리 다양한 형태의 결사와 신앙을 장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사 조직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여러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특히 상인 조직의 경우 나름대로의 강고한 규율과 행동 강령을 갖고 단체 활동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보부상 조직과 관련 문서를 소개하기로 한다.

보부상은 조선시대에 향시(鄕市), 즉 지방의 정기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行商)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경제적 교환을 매개하던 전문적인 시장 상인이다.205)이하 보부상에 대한 서술은 정승모, 『시장의 사회사』, 웅진 출판, 1992를 참조하였다. 보부상은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범위로 형성되어 있는 시장을 돌면서 각 지방의 물품 교환을 촉진하였다. 보부상은 시장을 돌아다니는 일반 장돌뱅이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군현이나 비변사(備邊司) 등에 공인받고 독점권을 행사하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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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장날
울산 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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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은 봇짐장수, 등짐장수, 황아장수, 돌짐장수, 장꾼 등등 다양하게 불렸다. 봇짐장수와 황아장수는 보상을 일컫고, 등짐장수와 돌짐장수는 부상을 일컫는데 짐을 보따리에 싸서 이고 들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부상, 즉 등짐장수는 나무그릇·토기 등과 같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상품으로 하여,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이에 비해 보상, 즉 봇짐장수는 비교적 값비싼 필묵(筆墨), 금·은·동 제품 등과 같은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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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그림-김홍도
보부상 그림-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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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그림-김준근
보부상 그림-김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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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그림-김준근
보부상 그림-김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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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은 여러 종류의 휴대품을 소지하였는데 그 중에는 촉작대라는 막대기가 있었다. 촉작대는 물미장(勿尾杖)이라고도 하는데, 지게를 버티는 촉을 박은 작대기이다. 촉작대는 평소에 물건을 지탱하는 지팡이로 사용하였고, 유사시에는 무기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상은 유척(鍮尺), 즉 길이를 재는 놋쇠 자를 가지고 다녔다.

한편 보부상들은 보부상의 소속을 증명하는 일종의 증명서도 휴대하였는데, 이것이 첩(帖)이다. 예로 제시한 첩은 1891년(고종 28)에 보부상 조직의 전라 좌도 도반수(都班首) 한 모(韓某)가 김윤이(金允伊)를 부상 조직의 임원 중 하나인 도공원(都公員)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이 문서의 끝부분에는 ‘첩(帖)’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고, 도반수의 수결(手決)과 도장이 있다.

보부상의 조직이 언제 체제를 갖추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장시가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7세기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보상과 부상은 별개의 조직으로 성장하다가 1883년(고종 20) 중앙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이 설치되고 보상과 부상이 합해져 군국아문(軍國衙門)에 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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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帖)
첩(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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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직 관할에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1885년에 혜상공국은 상리국(商理局)으로 바뀌고 부상은 좌단(佐團), 보상은 우단(右團)으로 불렸다. 1894년(고종 31)에는 부상과 보상을 농상아문(農商衙門) 관할하에 두었다. 1897년(고종 33)에 황국 협회(皇國協會)로 이속된 후 2년 후에 다시 상무사(商務社)로 옮겨지면서부터는 부상은 좌사(佐社)로, 보상은 우사(右社)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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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작대
촉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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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조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되었으나 한산과 부여를 중심으로 하는 저산 팔읍(苧產八邑)의 상무사 조직만이 형식적으로 부활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저산 팔읍’이란 한산, 부여, 서천, 은산, 홍산, 비인, 남포, 임천 등 충청남도 일대에서 모시 생산으로 유명한 여덟 개 지역을 말한다.

보부상 조직은 특히 견고하기로 유명하였다. 각 도와 군에는 임방(任房)이 있었는데, 임방은 접소(接所)라고도 하였다. 임방은 도반수(都班首), 반수(班首), 영수(領首), 접장(接長), 유사(有司), 공원(公員) 등의 임원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직원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엄격한 규율로 처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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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문서
보부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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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철종 2)에 충청도 예산의 보부상 조직이 만든 문서인 『예산임방입의절목(禮山任房立議節目)』을 보면 잘못을 저지른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나오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모에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 없는 자는 볼기 50대를 친다.

•시장에서 물건을 억지로 판매하는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술주정하면서 난동을 부린 자는 볼기 20대를 친다.

•놀음 등 잡기(雜技)를 한 자는 볼기 30대를 치고 벌금 한 냥을 물린다.

•문상(問喪)하지 않은 자는 볼기 15대를 치고 벌금 5전을 물린다.

•계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 한 냥을 물린다.

이 처벌 규정에서 보듯이 보부상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였다. 불효 등 행실이 불량한 경우에도 엄한 처벌이 따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체벌(體罰)과 함께 벌금을 물리기도 하였다.

보부상은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속에서 상업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상 인 가운데 하나이다. 개항 이후 보부상은 끊임없이 관에게 조직을 인정받고, 나아가 그들의 영업 독점권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기꺼이 권력의 편에 서서 민중과 대적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보부상은 나름대로의 규율을 바탕으로 서로 간의 공동체적 유대를 강화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결사 조직의 하나였고, 이들의 강고한 동류 의식은 현재 남아 있는 보부상 관련 문서에서도 그 단편(斷片)을 확인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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