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3. 인사 문서
  • 서경과 사첩
박재우

조선시대 관리는 관직을 받으면 그 관직을 받는 것이 적합한가를 따지는 서경 과정을 거쳤다. 원래 고려는 1∼9품의 전 관리가 서경의 대상이 되었으나 조선은 초기의 논쟁 과정을 거쳐 5∼9품의 중하급 관리만 서경의 대상이 되었다. 서경은 기본적으로 대간(臺諫)이 담당하였는데, 이들 대간은 관리의 임명, 법의 제정과 개정, 기복(起復) 같은 문제에 대하여 서경을 하였다.

관리 임명에 대한 서경은 이조와 병조에서 해당 관리에 대한 서경을 대간에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서경의 심사는 첫째, 가계(家系)의 하자(瑕疵)를 살폈고, 둘째, 본인의 행실을 살폈으며, 셋째, 예전에 관직을 받은 것이 적절하였는가를 살폈다.

먼저 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호구(戶口)가 필요하였는데, 이는 서경을 받는 관리가 본인과 처의 사조(四祖)를 기록하여 대간에 바쳐야 했다. 이를 서경 단자(署經單子)라고 하였다. 서경 단자는 아직 실물이 확인되지 않으나 『전율통보』 「별편」에 다음과 같은 서경 단자식(署經單子式)이 나와 있다.

1  어떤 관계 전항의 관직 성명 본관 어디

2  부변                            처변

3  구함 이름                       어떤 씨 본적 어디

4  부 구함 이름                    사조를 나열하여 씀

5  조 구함 이름

6  증조 구함 이름

7  외조 구함 성명 본관 어디

8  모변

9  어떤 씨 본적 어디

10 사조를 나열하여 씀

여기서 보면 서경 단자에는 본인의 관계, 관직, 성명, 본관과 부변(父邊), 모변(母邊), 처변(妻邊)의 성씨, 본적, 사조가 수록되었다.

서경 단자를 올리면 이를 근거로 대간은 서경을 시행하였다. 서경 과정에서 본인과 처의 사조를 모두 확인하였는데, 간혹 처의 사조를 납부하지 않으면 가계를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서경을 받지 못하였다. 물론 가계에 흠이 있는 경우에도 서경에서 통과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1413년(태종 13) 6월에 유정현(柳廷顯)이 처 이씨가 서얼(庶孼)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서경을 받지 못하자 태종이 헌납(獻納) 은여림(殷汝霖)을 불러 서경을 재촉한 일이 있었다.236)『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6월 계해.

다음으로 본인의 행실이 문제가 된 사례는, 1415년(태종 15) 7월에 헌납 장진(張晉)이 가난이 싫어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고 새로 장가를 갔으므로 마음과 행실이 청렴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서경을 받지 못한 경우나,237)『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 7월 신유. 1444년(세종 26) 12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이선로(李善老)가 사람됨이 경망하고 오만하여 남의 윗사람 되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서경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238)『세종실록』 권106, 세종 26년 12월 경신.

서경은 사간원과 사헌부 각각 관리 세 명 이상이 논의에 참여하여 동의해야 통과할 수 있었다. 서경 기간은 50일로 정해져 있었지만 아무런 하자가 없는 관리들은 50일의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도 곧장 서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경우는 사안에 따라 시일을 끌어 50일이 다 돼서야 비로소 서경을 받기도 하였고, 심지어 서경에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경에 통과하지 못하면 대간은 사유를 국왕에게 보고하였고, 또 해당 관리의 고신을 이조나 병조에 돌려보냈다.

현재 관직 임명과 관련하여 서경에 통과한 문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시호(諡號)를 정하는 서경에서 통과된 문서는 남아 있다. 다음 사헌부에서 발급한 ‘김성일 서경(金誠一署經)’이239)최승희, 『한국 고문서 연구』, 지식 산업사, 1989, 226쪽. 그것이다.

1     사헌부 시호 서경 나옴

2  증이조판서 김성일. 시호를 문충으로 고침. 도덕박문왈 문, 위신봉상왈 충.

3     강희 30년 윤7월 26일

4  집의 (압)

5  장령 (압)

6  장령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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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서경
김성일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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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1691년(숙종 17) 윤7월에 사헌부가 김성일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고치는 것에 대하여 서경에서 통과시킨 문서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발급자인 ‘사헌부’와 발급 사유인 ‘시호 서경 나옴’, 2행은 수취자와 문서 내용으로 김성일의 시호를 문충으로 고쳤다는 것이며, 3행은 발급 날짜인 ‘강희(康熙) 30년 윤7월 26일’, 4∼6행은 발급자인 사헌부의 관리와 초압이다. 당시 서경에 참여하였던 사헌부 관리는 집의(執義) 한 명, 장령(掌令) 두 명으로 세 명의 동의가 있으면 통과할 수 있는 규정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사간원의 서경 문서는 이와 양식이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다음 사간원에서 발급한 ‘김성일 서경’을240)최승희, 앞의 책, 1989, 226쪽. 살펴보자.

1   신미 8월 27일 완의

2  증이조판서 김성일. 시호를 문충으로 고침.

3                                정언 (압)

4  행대사간 (압)  사간 (압)  헌납  

5                                정언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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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서경
김성일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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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1691년(숙종 17) 8월에 사간원이 김성일의 시호를 문충으로 고치는 것에 대하여 서경을 통과시킨 문서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발급 날짜인 ‘신미 8월 27일’과 발급 사유인 ‘완의(完議)’, 2행은 수취자와 문서 내용으로 김성일의 시호를 문충으로 고쳤다는 것이며, 3∼5행은 발급자인 사간원의 관리와 초압으로 행대사간(行大司諫) 한 명, 사간(司諫) 한 명, 정언(正言) 두 명 등이 서경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김성일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을 비교하면 양식상 차이가 확인된다. 첫째, 발급 사유가 전자는 ‘사헌부 시호 서경 나옴’인데 후자는 ‘완의’이고, 둘째, 발급 날짜가 전자는 문서 내용의 뒷부분에 있는데 후자는 서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셋째, 발급자가 전자는 서명하였던 관리만 기록하고 있으나 후자는 사간원의 모든 관리를 기록하고 그중에 참여 관리들만 서명하고 있다.

사실 이들 내용은 서경 문서의 기본 구성 요소이다. 그렇다면 서경에는 이들 기본 요소가 들어 있기만 하면 양식상 약간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는 시호 서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관리 임명에 대한 서경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경의 결과는 사헌부에서 이조나 병조에 통보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조나 병조는 해당 관리에게 서경에 통과하였음을 알리는 사첩을 발급하였다. 다음은 1403년(태종 3)에 발급된 ‘정전 사첩(鄭悛謝牒)’이다.241)정구복 외, 「정전 고신」, 『조선 전기 고문서 집성』,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1  이조가 조사를 준하는 일. 사헌부이방서리 이부영 영락 원년 7월  

2  22일 명관. 영락 원년 7월 16일에

3  비를 내려 정전을 통덕랑사간원좌헌납지제교로 삼은 것에 대해

4  조사를 거쳤으므로 이관한 바로 합행고첩수지고첩자.

5   이를 사헌부좌헌납지제교

6   정에게 고첩함                          이방

7  영락 원년 7월 22일

8   조사

9  첩  판사  전서(압)  지사  의랑(압)  정랑  좌랑

10                          의랑(압)

이 문서는 1403년(태종 3) 7월에 이조가 정전에게 서경에 통과하였음을 통보하는 사첩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발급자와 발급 목적인 ‘이조가 조사를 준하는 일’, 1∼4행은 발급의 근거 문서인 ‘사헌부이방서리(司憲府吏房書吏) 이부영(李符永) 영락 원년 7월 22일 명관(名關)’과 그 내용, 4행은 문서 양식인 ‘합행고첩수지고첩자(合行故牒須至故牒者)’, 5∼6행은 명관인 정 전에게 발급한다는 내용과 문서 종류인 고첩(故牒), 6행의 이방(吏房)은 문서 발급의 실무 부서, 7행은 발급 날짜인 ‘영락(永樂) 원년 7월 22일’, 8행은 문서 용도인 ‘조사(朝謝)’, 9행은 인장인 첩(牒), 9∼10행은 발급자인 이조의 관리와 초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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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사첩
정전 사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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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발급자가 이조인 것은 정전이 문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무반에 대한 사첩 발급은 병조가 담당하였다. 실제로 1409년(태종 9) 3월에 발급된 ‘심언충 사첩(沈彦冲謝牒)’은 무반인 수의부위용기순위사전령부사정(修義副尉龍騎巡衛司前領副司正)에 임명된 심언충에게 발급한 문서로서 병조가 업무를 담당하였다.242)정구복 외, 「심언충 조사첩(沈彦冲朝謝帖)」, 『조선 전기 고문서 집성』,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이조와 병조가 사첩의 발급을 담당한 것은 고려 말 이래의 제도였다.243)박재우, 「고려시대의 고신(告身)과 관리 임용 체계」, 『한국 고대 중세 고문서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0. 원래 고려는 관리가 서경에서 통과하면 그 결과를 어사대(御史臺, 사헌부)가 이부와 병부, 그리고 중추원(中樞院)에 각각 통보하였다. 이부와 병부에 통보한 내용은 해당 관리의 정안(政案)을 작성할 때 기초 자료가 되었고,244)박재우, 「고려 정안(政案)의 양식과 기초 자료」, 『고문서 연구』 28, 한국 고문서 학회, 2006. 중추원은 사첩 발급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중추원은 당후관(堂後官)이 발급 업무를 맡았는데 고려 말에 위조가 성행하는 등 제도 운영이 문란해지자 사첩의 발급 업무를 중추원에서 전리사(典理司, 이부)와 군부사(軍簿司, 병부)로 이전하고 인신(印信)과 서(署)를 하도록 하였고,245)『고려사』 권75, 지(志)29, 선거지(選擧志)3, 전주(銓注), 범선법(凡選法) 우왕 6년 6월. 위화도 회군 이후에 시행되었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전리사와 군부사에 사헌부에서 보내온 문서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고려 말에 전리사와 군부사에서 발급한 사첩은 남아 있지 않지만, 대신 조선 초기의 사첩은 모두 이조와 병조에서 발급하고 있어 고려 말에 변 화된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이조나 병조가 발급한 사첩이 사헌부에서 보내온 자료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임은 ‘정전 사첩’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문서에서 ‘이조가 조사를 준하는 일’이라는 것은, 이조가 조사를 하면서 어떤 문서에 준해서 업무를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정전 사첩’의 내용에서 이조가 준하였던 문서는 사헌부 문서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즉 사헌부이방서리 이부영이 보낸 관(關)이 그것이다.

사헌부의 관의 양식은 첫째, 관직의 임명 날짜인 ‘영락 원년 7월 16일’, 둘째, 임명 방식인 참상관(參上官)을 임명할 때에 사용하는 용어인 ‘비(批)를 내려’, 셋째, 관직 내용인 ‘통덕랑사간원좌헌납지제교(通德郞司諫院左獻納知製敎)’, 넷째, 서경에서 통과하였음을 뜻하는 ‘조사를 거쳤으므로 이관한 바로’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이 사헌부이방서리 이부영의 영락 원년 7월 22일 명관으로 이조에 통보되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사헌부의 관은 관직 임명과 관련하여 서경에서 통과하였음을 이조에 통보하는 성격의 문서였던 것이다.

사헌부의 관을 받으면 이조와 병조는 사첩을 해당 관리에게 곧장 발급하였다. 대간의 서경 기간은 50일이었지만, 사헌부의 관을 받고 이를 근거로 사첩을 발급하는 업무는 서경과 달리 처리 시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 단순 행정 업무였던 것이다. 또한 이조와 병조가 해당 관리에게 사첩을 발급할 때는 관리의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문서 종류를 달리하여 발급하였는데, 당상관은 관(關), 참상관은 고첩(故牒), 참하관(參下官)은 첩(帖)을 이용하였다. 정전의 경우는 관직이 참상관이었으므로 고첩의 형태로 발급을 받았다.

한편 종래에는 교첩과 사첩을 같은 문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교첩이 이조와 병조가 ‘왕지를 받들어’ 또는 ‘교를 받들어’ 관직을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왕명이 발급 근거였다면, 사첩 발급의 근거는 서경의 통과를 알려 주는 사헌부의 관이어서 성격상 차이가 분명하였다. 즉 이 들은 성격상 완전히 다른 문서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서경을 거칠 필요가 없었던 상급 관리는 관교만 받았지만, 서경을 거쳐야 했던 중하급 관리는 교첩과 함께 사첩을 받았다. 다만 현전하는 사첩이 모두 조선 전기의 사례여서 조선 후기까지 사첩이 발급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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