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4. 관부 문서
박재우

관직을 받아 관리가 되면 소속 관청에서 맡은 업무를 보았다. 담당 업무는 소속 관청에서 처리가 끝나는 사안도 있지만 다른 관청과의 협조를 통해 처리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이렇게 되면 다른 관청에 문서를 보내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이처럼 관부와 관부 사이에 관문서를 전달하는 방식은 정해진 법규가 있었다. 다음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내용이다.

무릇 중앙과 지방의 문서는 동등 이하는 관(關)을 쓰고, 이상은 첩정(牒呈)을 쓰며, 7품 이하는 첩(帖)을 쓴다.252)『경국대전』 권3, 예전, 용문자식(用文字式).

조선시대에 중앙과 지방에서 사용하였던 관문서에는 관, 첩정, 첩이 있었다. 이들 중에 관, 첩정은 관부의 지위가 동등 이상과 이하인 경우를 구분하여 사용하였고, 첩은 하급 관청 또는 관리에 제한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관에 대하여 살펴보자. 관 양식의 문서로서 현전하는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장성감무 관자(長城監務關字)’이다.253)노명호 외, 「장성감무 관(長城監務關)」, 『한국 고대 중세 고문서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0 ; 오창명, 「1407년 장성감무 관자(長城監務關字)의 이두문 해독」, 『고문서 연구』 7, 한국 고문서 학회, 1995.

1  감무관이 이접하는 일. 이번 달 초

2  9일 진시에 도착한 도관찰출척사의 관 내에, 이번 달 초7일에 도착한

   의정부사인사의 관

3  내에, 지난 8월 26일에 올린 문정공 이암의 손자 전 참찬의정부사 최유

   경, 철성

4  군 이원, 안성군 이숙번의 등장 내에, 우리들은 전라도 장성 땅 백암사

   를 조상 문

5  정공께서 삼촌 숙부인 왕사 복구와 함께 발원하여 사재로 창건하고 대

   장경을 맞이하여 안치하셨으며, 우리들

6  부모 일동의 장년보, 대장보, 기일보가 모두 300석이 된 후에 우리들의

   사촌형 전 양가 중호

7  가 전하여 주지를 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작법 축

8  상하옵는 때에, 자은종의 중덕 계천이 장성 읍내에 원래 속해 있던 자복

   사는 버리

9  고 한번 쉴 정도의 거리인 동 백암사를 자복사로 구하고 원하여 함부로

   관자를 받아 내려 와서

10 이전의 보장, 색장 등을 모두 내쳐 보내고 동 보장 등을 임의로 임명하

   니, 각 촌에 자복을

11 정한 뜻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들 조상이 원하는 뜻과 어김이 있

   는 까닭에 각각 민망하

12 므로, 이 촌의 자복은 판지의 내용대로 하고 동 백암사는 산문에 환속

   하여 예전대로

13 향화하게 해달라는 등장인 바로, 앞의 자복을 이접하는 것은 대용이 마

   련되는 사이에 먼저 처음에

14 판을 내리신 동군의 자복에 이접할 일이라는 관이었으므로, 앞의 백암

   사에 입접한

15 주지는 관의 내용대로 먼저 군의 자복사에 이접하고 보고할 일이라는

   관이며,

16 관 내의 사의로서 군 남쪽의 자복사를 이번 달 10일까지 이접할 일.

17 이를 백암사 삼강에게 관함

18 영락 5년 정해 11월 초9일    감무 서

監務官爲移接事

今月初九日辰 到付都時觀察黜陟使關內 今月初七日到付議政府舍人司關內去八月二十六日呈 文貞公李嵒孫子前參贊議政府事崔有慶 鐵城君李原 安城君李叔蕃等狀內 矣徒段 全羅道長城地白巖寺乙 祖上文貞公敎是 三寸叔父王師復同願 私財以營刱 大藏經安邀敎是旀 矣徒父母一同長年寶 大藏寶 忌日寶幷三百石後 矣徒四寸兄前兩衘中皓亦傳住領衆 作法祝

上爲白如乎 節慈恩宗中德戒天亦 長城邑內元屬資福寺乙良 棄置爲遣 一息程途是在同白巖寺乙沙資福寺良中求望 冒受關字下去爲去乎 向前寶長 色掌等乙 並只黜送 同寶長等 任意上下爲臥乎 各村資福定體之意不合爲白沙餘良 矣徒祖上願意 無違爲乎等以各各悶望爲去乎 右村資福乙良 判旨內貌如爲遣 同白巖寺乙良 還屬出門 依舊香火等狀是置有等以 向前資福移接乙良代用磨鍊問 先可初亦

判下敎同郡資福良中移接向事關是去有等以 向前白巖寺入接爲臥乎住持乙良關內貌如先可資福寺良中移接是遣 由報向事關是有旀 關內事意乙用良 郡南資福寺乙 今月十日及良移接向事

  右關白巖寺三綱

    永樂五年丁亥十一月初九日                        監務 署

이 문서는 1407년(태종 7) 11월에 장성감무가 백암사(白巖寺) 삼강(三綱)에게 보낸 관이다. 이암(李嵒)의 후손이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백암사가 자은종(慈恩宗) 승려에 의해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고 이암의 후손이 백암사 주지에서 밀려나자 이를 철회해 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내용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이암의 내외손인 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이 청원하는 등장(等狀)을 의정부에 올리자, 이를 검토한 의정부사인사(議政府舍人司)가 전라도에 관을 내렸고, 전라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정성감무에게 관을 내렸으며, 이를 근거로 장성감무가 날짜와 서명을 기록하고 백암사 삼강에게 관을 보낸 것이다. 여기서 장성감무가 백암사 삼강에게 보낸 문서가 관이지만, 의정부사인사가 전라도 도관찰출척사에게, 전라도 도관찰출척사가 장성감무에게 보낸 문서도 관이다. 즉 중앙과 지방 관청의 종류에 상관없이 동등 이하에 보내는 문서로 관이 이용되고 있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발급자와 발급 목적인 ‘감무관이 이접하는 일’, 2∼16행은 이두문(吏讀文)으로 이루어진 문서 발급의 근거 내용, 17행은 수취자와 문서 종류인 ‘이를 백암사 삼강에게 관(關)함’, 18행은 발급 날짜인 ‘영락 5년 정해 11월 초9일’과 발급자인 ‘감무 서(署)’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문서는 17행에 ‘관(關)’의 용어가 나타나 있어 문서 종류를 확인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 관의 양식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문투인 ‘합행이관 청조험시행 수지관자(合行移關請照驗施行須至關者)’가 나타나지 않는다. 생략하였을 수도 있으나 이후의 관 양식과 비교해 보면 아직 조선적인 관 양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13년(태종 13)에 발급된 ‘정전 사첩(鄭悛謝牒)’은254)남권희, 「정전 조사첩(鄭悛朝謝帖)」, 『고려시대 기록 문화 연구』, 청주 고인쇄 박물관, 2002. 관 양식이 상당히 정착하였음을 보여 준다.

1 이조가 조사를 준하는 일. 사헌부이방서리 김맹담 영락 11년  

2 5월 11일 명관. 영락 11년 4월 25일에

3 비를 내려 정전을 통정대부성균대사성집현전직제학으로 삼은 것에 대해

4 조사를 거쳤으므로 이관한 바로. 합행이관 수지관자.

5   이를 성균대사성

6   정에게 관함

7 영락 11년 5월 17일

8   조사                                 문선사영사 장

9                    정랑 신(착명)  좌랑 서(착명)

10 관  판서(착명)     정랑 박(착명)  좌랑 김(착명)

11                   정랑 정(착명)  좌랑 유(착명)

1 吏曹爲朝謝準事 司憲府吏房書吏金孟談 永樂十□□

2 五月十一日 名關 永樂十一年四月二五日

3 批鄭悛爲通政大夫成均大司成集賢殿直提學

4 朝謝由移關爲等以 合行移關須至關者

5   右 關 成均大司成 鄭

6 永樂十一年五月十七日

7   朝謝                                 文選司令史掌

8 關 判書 (手決)      正郞 申(狎)  佐郞 徐(狎)

9                    正郞 朴(狎)  佐郞 金(狎)

10                   正郞 鄭(狎)  佐郞 柳(狎)

이 문서는 1413년(태종 13)에 이조가 정전에게 발급한 사첩이다. 사첩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문서의 양식이 ‘관’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양식을 보면 ‘장성감무 관’에 비해 양식이 훨씬 정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1행은 발급자와 발급 목적인 ‘이조가 조사를 준하는 일’, 1∼4행은 발급 근거가 되는 문서인 사헌부이방서리(司憲府吏房書吏) 김맹담(金孟談)이 보낸 관(關), 4행은 문서 양식인 ‘합행이관 수지관자(合行移關須至關者)’, 5∼6행은 수취자와 문서 종류인 ‘이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에게 관(關) 함’, 7행은 발급 날짜인 ‘영락 11년 5월 17일’, 8행은 발급 사유인 ‘조사(朝謝)’와 실무자인 ‘문선사영사(文選司令史) 장’ 9∼11행은 발급자인 이조의 관리, 성, 서명, 그리고 11행은 인장인 ‘관(關)’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보면 4행의 ‘합행이관 수지관자(合行移關須至關者)’, 5∼6행의 ‘이를 성균대사성 정에게 관(關)함’, 11행의 ‘관(關)’을 볼 때에 이조가 정전에게 발급한 문서가 관이며, 문서 전체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양식이다. 그리고 양식이 변하고 있지만 관이 동등 이하에 사용되었음은 종전과 같이 나타난다. 이러한 양식은 기본적으로 『경국대전』에서 정착되었다. 다음과 같은 『경국대전』 「예전」의 평관식은 이후 계속 사용되었으며, 『전율통보』에서 표현 방식이 약간 달라졌으나 실제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1  어떤 아문이 어떤 것을 위한 일. 운운. 합행이관 청  

2  조험시행 수지관자

3  이를

4  어떤 아문에 관함

5  년 인 월 일

6  어떤 일

7  관  어떤 관직 압  어떤 관직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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