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5. 왕명과 상주문
  • 국왕의 명령
  • 유서
박재우

유서는 세종 때에 만든 왕명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내전소식(內傳消息)이라는 왕명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을 때에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리는 간단한 왕명이었다. 당시에 내전소식을 사용하고 있었음은 1416년(태종 16) 12월에 지신사(知申事) 조말생 (趙末生)이 내전소식을 받았다는 기록을270)『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12월 기미. 통해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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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전소식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서 유래하였다. 선전소식은 충렬왕대에 만든 왕명으로, 당시에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국정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는데,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선지(宣旨)를 반포하였을 경우에 의례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승선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작성하고 서명하는 선전소식이라는 간단한 왕명을 만들었다.271)『고려사』 권123, 열전36, 이분희 부습(李汾禧附褶)

이것이 기원이 된 조선의 내전소식은 국왕의 명령 가운데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거나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잡사(雜事)일 경우에, 비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어보(御寶)나 담당 관청의 인신이 없이 승지 한 사람의 서명만으로 시행하였던 왕명이었다.272)김경숙, 「소식(消息)의 의미와 문서명」, 『고문서 연구』 25, 한국 고문서 학회, 2004.

문제는 어보나 승정원의 인신이 찍히지 않았기에 위조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이다.273)『세종실록』 권30, 세종 7년 11월 정사. 세종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마침내 1443년(세종 25) 11월에 내전소식이 유서로 개편되었다.274)『세종실록』 권101, 세종 25년 8월 무자. 이때 유서에는 작은 어보를 찍었고, 승정원에서 다른 종이에다 ‘궐내에서 내린 유서 몇 번째 통을 공경히 받들다’라고 기록하고 관직과 칭신(稱臣) 성명을 써서 동봉(同封)하여 보내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유서에 작은 어보를 찍게 되면 내전소식보다 문서의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사안마다 다 사용할 수는 없다는 건의가 수용되어, 변경(邊境)과 기밀에 속한 내용이나 시한이 긴박한 일에만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고문서로 전해지는 유서는 그것이 변경 및 기밀과 관련해서 발급하였던 왕명임을 잘 보여 준다. 조선시대에는 관찰사, 절도사(節度使) 등 군사 동원권을 가진 관리가 국왕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군사를 동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발병부(發兵符) 또는 밀부(密符)를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발병부 또는 밀부와 함께 지급하였던 문서가 유서였던 것이다.

밀부와 유서를 함께 지급하였음은 곽재우(郭再祐)의 경우에서 확인된 다. 1597년(선조 30)에 경상도 방어사(慶尙道防禦使)로 있던 곽재우가 모친상을 당한 후에 1599년에 방어사로 기복할 것을 요구하고 유서와 밀부를 함께 보냈으나 그는 나오지 않았고, 그해 9월에 경상 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에 임명하고 유서와 밀부를 보내면서 잇따라 왕명을 내렸으나 기복에 응하지 않다가 모친상이 끝나자 부임하였다고 한다.275)『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87, 예고(禮考)34, 사상례(私喪禮), 기복(起復). 이로 본다면 밀부 곧 발병부를 발급할 때에 유서를 같이 지급하였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면 유서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다음 ‘이순신 유서(李舜臣諭書)’를276)「사부유서(賜符諭書)」, 현충사 유물관. 살펴보자.

1  유 삼도수군통제사행전

2    라좌도수군절도사 (이)

3    순신 서

4    경은 한 지방을 위임받았으니 책임이 가볍지 않다. 무릇

5    병사를 발하고 적절히 대응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제압함은)

     모두

6    일상의 일이니 스스로 옛 (법)이 있다. 염려컨대 혹시

7    내가 경과 함께 독단적으로 처치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8    밀부가 아니면 가히 행하지 마라. (또) 뜻밖의

9    간사한 도모는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비상한

10   명령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 의심할 것이 없는 후에야

11   마땅히 명령에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압)한 제10부를 주노니

12   경은 그것을 받으라. 고유하노라.

13   만력 22년 7월 14일

이 문서는 1594년(선조 27) 7월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行全羅左道節度使)에 임명하고 밀부 제10부를 내 리면서 지급한 유서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의 ‘유(諭)’와 3행의 ‘서(書)’는 문서 종류가 유서임을 보여 주고, 1∼3행은 수취자인 이순신, 4∼12행은 문서 내용인데 유서마다 차이가 있다면 밀부의 숫자만 다를 뿐이다. 12행은 문서 양식인 ‘고유하노라’, 13행은 발급 날짜인 ‘만력 22년 7월 1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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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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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발병부 제도는 1457년(세조 3)에 시작된 것으로,277)『증보문헌비고』 권112, 병고(兵考)4, 부록, 부신(符信). 이러한 밀부와 함께 발급한 유서에 대한 기록은 1460년(세조 6) 정월에 황해도 관찰사 김수(金脩)에게 지급한 사례나,278)『세조실록』 권19, 세조 6년 정월 을유. 1462년(세조 8) 9월에 황해도 관찰사 신영손(辛永孫)에게 발급한 사례에서 이미 확인된다.279)『세조실록』 권29, 세조 8년 9월 계묘. 그런데 이들 김수, 신영손 등에게 발급한 유서 내용을 보면 ‘이순신 유서’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즉 밀부와 함께 지급된 유서는 발병부 제도의 시행과 더불어 내용과 양식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유서의 내용과 양식은 『경국대전』에는 기록이 없고 대신 『전율통보』에서 확인되는데, 다음은 『전율통보』 「별편」에 수록된 유서식(諭書式)이다.

1  유 구함 성명

2    경은 한 지방을 위임받았으니 임무가 가볍지 않다. 무릇 병사를 발하

     고 적절히 대응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제압함은

3    모두 정해진 일을 따르니 스스로 옛 법이 있다. 염려컨대 혹 내가 경

     과 함께 독단적으로 처치해야 할

4    일이 있더라도 밀부가 아니면 가히 행하지 마라. 또 뜻밖의 간사한 도

     모는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으니

5    만약 비상한 명령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 의심할 것이 없는 후에야 마

     땅히 명령에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압 제

6    몇 부를 주노니 경은 그것을 받으라. 고유하노라.

『전율통보』 유서식의 내용과 양식은 발급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이순신 유서’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유서는 관리에게 부여하는 임무에 따라 내용과 양식에 약간 차이가 있기도 하였지만280)전경목, 「16세기 관문서의 서식 연구」, 『16세기 한국 고문서 연구』, 아카넷, 2004, 123∼126쪽. 조선시대 내내 기본적으로 같은 양식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선 전기에 사용한 발병부는 둥근 형태였다. 한 면에는 ‘발병(發兵)’, 다른 면에는 ‘어떤 도 관찰사’, ‘어떤 도 절도사’라고 쓰거나 제진(諸鎭)의 경우는 ‘진의 호칭’을 쓰고 가운데를 나누었다. 우부(右符)는 관찰사, 절도사, 제진에게 주고, 좌부(左符)는 대궐에 간직하였다. 군사를 징발해야 하는 경우에는 좌부와 교서를 내려 보내면 우부와 맞추어 본 뒤에 징발에 응하였다. 관찰사와 절도사는 각각 제진의 좌부를 받아 가지고 있다가 교서를 받으면 좌부를 제진에 보내 군사를 징발하였다.281)『경국대전』 권4, 병전, 부신(符信).

이에 비해 조선 후기의 밀부는 역시 둥근 형태지만 글자가 달라 한 면에는 1∼45까지 제 몇 부라고 쓰고, 다른 면에는 어압(御押)을 하였다. 그리고 수어사(守禦使), 총융사(摠戎使), 유수(留守)와 순찰사(巡察使), 병사(兵使), 수사(水使), 방어사 등도 밀부를 받아 수령 대상이 확대되었다.282)『증보문헌비고』 권112, 병고4, 부록, 부신(符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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