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5. 왕명과 상주문
  • 국왕의 명령
  • 유지
박재우

조선 초기에 쓰던 내전소식에 문제점이 있어 유서로 개편하고 변경과 기밀 사항에 사용하도록 하였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정치 운영의 성격상 승지가 왕명을 받아 작성하고 서명하여 시행하는 식의 간단한 왕명 자체가 없어지기는 어렵다. 이러한 기능을 하였던 왕명이 유지였다.

이러한 점은 1465년(세조 11) 10월 승정원이 왕명을 받들어 황해도 관찰사 남윤(南倫)에게 보낸 내용에서 잘 확인된다. 당시 승정원은 “경의 처가 병을 얻었으니 속히 와서 보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이에 대해 『세조실록』에서는 “전에는 유지(有旨)에 통정 당상(通政堂上)은 이(爾)라 칭하고 2품 이상은 경(卿)이라 칭하였다. 당시에 남윤의 관계가 통정이라 칭계(啓)에는 이(爾)로써 썼으나 어필 칭경이라는 글자를 쓰고 종이 끝에 이후로는 이(爾)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고283)『세조실록』 권37, 세조 11년 10월 임오.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경’이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어 설명하고 있지만, 이로 보아 승정원이 왕명을 받아 작성하여 황해도 관찰사 남윤에게 보낸 문서가 유지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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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원 유지
최흥원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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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승정원이 유지를 발급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는 국왕이 왕명의 내용은 물론 유지의 발급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595년(선조 28) 5월에 선조는 좌승지(左承旨) 이덕열(李德悅)에게 왕명을 내려 “혜빈 정씨(惠嬪鄭氏)는 광주에서, 숙빈 윤씨(淑嬪尹氏)는 남양에서, 숙의 이씨(淑儀李氏)와 신씨(愼氏)는 연안에서 음식을 공급하는 일로 감사 (監司)에게 유지를 내리라.”고284)『선조실록』 권63, 선조 28년 5월 무술. 하였다. 여기서 선조는 혜빈 정씨 등에게 음식을 공급하라는 유지를 내리라고 좌승지에게 명령하면서 발급 대상을 ‘감사’로 명시하였다. 이는 국왕이 승정원에 유지를 내리도록 명령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면 다음 ‘최흥원 유지(崔興源有旨)’를285)최승희, 앞의 책, 73쪽. 살펴보자.

1    의정부영의정은 열어 보라.

2     행도승지 유(서압)

3   지금 들으니

4  천사가

5  선유할 일로 근래 나오려고 한다 하니 무릇 일이

6   불가불 의논해서 처리해야 하고 또 접대할 때에

7   마땅히 체모를 갖추어야 할 것이니 경이  

8   말을 타고 와서 이를 일로 유

9  지함

10   만력 20년 8월 19일

이 문서는 1592년(선조 2) 8월에 국왕이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을 부르기 위해 발급한 유지이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와 황제의 명령을 전하고자 한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가 대처 방식을 논의하고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영의정 최흥원을 부르고자 보낸 것이다. 당시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피난해 있었고 영의정 최흥원은 행재소(行在所)를 떠나 성천에 있었기 때문이다.286)최승희, 앞의 책, 74∼75쪽.

양식을 보면 1행은 ‘의정부 영의정은 열어 보라’처럼 수취자와 ‘열어 보라(開坼)’는 서두이고, 2행은 발급자인 ‘행도승지 유’, 3∼8행은 문서 내용, 9행은 문서 종류인 ‘유지(有旨)’, 10행은 발급 날짜인 ‘만력 20년 8월 19 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유지는 승지가 작성해서 발급하는 비교적 간단한 왕명으로 조선시대 내내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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