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5. 왕명과 상주문
  • 신료의 상주
  • 계본
박재우

국왕이 왕명을 통해 국정을 이끌어갔듯이 신료들은 상주문(上奏文)을 올려 국정에 참여하였다. 계(啓)는 신료가 정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상주하는 문서이다. 큰일에는 계본을 사용하고, 작은 일에는 계목을 사용하였다. 계본과 계목은 조선 초기에 이름을 붙인 문서였는데, 1412년(태종 12) 12월에 의정부의 요청으로 상서(上書)를 상언(上言), 장신(狀申)을 계본, 소식(消息)을 계목으로 고치면서 생겨난 문서였다.287)『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12월 기사.

하지만 이들 문서는 1412년 이전에도 존재가 확인된다. 계본은 태조대에 이미 여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이른 사례는 1393년(태조 2) 2월에 “지중추원사 정요(鄭曜)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계본을 가지고 경성에 와서 현비(顯妃)가 편안하지 못하며, 평주, 봉주 등에 초적(草賊)이 있다고 아뢰자 임금이 기뻐하지 않았다.”는288)『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병자. 기록으로, 이는 태조가 천도(遷都) 후보지인 계룡산으로 행차하는 도중에 도평의사사가 계본을 올렸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계본은 1412년 이전에 이미 사용한 것이 분명한데, 이는 『홍무예제(洪武禮制)』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계본은 『홍무예제』에 명칭과 양식이 나타나 있고 조선 초기의 고문서는 『홍무예제』의 영향 속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289)박준호, 「홍무예제와 조선 초기 공문서 제도」, 『고문서 연구』 22, 한국 고문서 학회, 2003 ; 박준호, 「경국대전 체제의 문서 행정 연구」, 『고문서 연구』 28, 한국 고문서 학회, 2006.

계목은 『홍무예제』에 없지만 이 역시 1412년 이전에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410년(태종 10) 4월에 “형조 순금사(巡禁司)가 도인(徒人)과 유인(流人)에 관한 계목을 올리자 임금이 그것을 보았다.”는290)『태종실록』 권19, 태종 10년 4월 병진.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면 1412년의 제도 개혁은 이러한 변화를 추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먼저 계본에 대하여 살펴보자. 다음은 『경국대전』 「예전」에 수록된 계본식(啓本式)이다.

1    어떤 아문 어떤 관직 신 누가 삼가  

2   계하여 무엇을 하는 일. 운운. 삼가 계를 갖추어

3 아룁니다. 엎드려

4 교지를 기다리며 삼가 계합니다.

5    년 인 월 일. 어떤 관직 신 누구. 어떤 관직 신 누구.

조선 초기부터 계본을 이용하였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지만 모두 연대기(年代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고문서 자료로 전해지는 실물은 없다. 대신 현전하는 계본은 조선 후기에 발급된 것들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발급된 계본은 『경국대전』의 계본식과 약간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전율통보』 「별편」의 계본식에 반영되어 있다.

1   단함 신 성명 삼가

2 계하여 무엇을 하는 일. 운운. 하도록 혹은 하고 삼가 계를 갖추어

3 아룁니다.

4  연호 몇 년 몇 월 며칠. 단함 신 성 서명

이들 계본식에서 공통점을 보면 발급 목적인 이들 양식 1∼2행의 ‘삼가 계하여 무엇을 하는 일(謹啓爲某事)’과 문서 양식인 이들 양식 2∼3행의 ‘삼가 계를 갖추어 아룁니다(謹具啓聞)’는 같다. 그뿐 아니라 발급자, 발급 날짜 등에 대한 서술도 표현이 약간 차이 나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경국대전』에 있는 ‘엎드려 교지를 기다리며 삼가 계합니다’ 는 『전율통보』에 없다. 또한 문서 내용이 『경국대전』은 ‘운운’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는 ‘운운. 하도록 혹은 하고(云云爲白只爲或爲白遣)’로서 이두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계본의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다음은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계본(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申哲均啓本)’이다.291)『고문서』 권2, 계본(啓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1987.

1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 신철균이 삼가

2 계하여 포폄하는 일. 신이 우후를 다스리므로 금년 임신년 가을 겨울

  등의 포폄의 등급을 마련하여 뒤에 나열하였습니다. 삼가 계를 갖추어

3 아룁니다.

4    우후 남백영 견사풍생 합시반착 상

5 동치 11년 12월 초1일 병마절도사 신 신(압)

6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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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계본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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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1872년(고종 9) 12월에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이 우후(虞候) 남백영(南百榮)의 포폄(褒貶)에 대하여 국왕에게 아뢰는 계본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발급자인 신철균, 1∼2행은 문서 양식인 ‘삼가 계하여 포폄하는 일’, 2행은 문서 내용, 2∼3행은 문서 양식인 ‘삼가 계를 갖추어 아룁니다’, 4행은 문서 내용, 5행은 발급 날짜와 발급자 서명인 ‘동치 11년 12월 초1일 병마절도사 신 신(압)’, 6행은 인장이다.

이를 보면 이 문서는 『경국대전』보다 『전율통보』의 계본식을 근거로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국대전』의 계본식에 들어 있는 ‘엎드려 교지를 기다리며 삼가 계합니다’의 표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서 내용에 이두문을 사용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조선 후기의 계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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