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5. 왕명과 상주문
  • 신료의 상주
  • 계목
박재우

계목 역시 조선 전기의 고문서 자료로는 전하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계목의 양식을 보여 주는 자료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1414년(태종 14) 8월에 국왕에게 올린 변정도감(辨正都監)의 계목을 찾을 수 있다. “변정도감이 계목을 올렸다. ‘대소의 인원이 자기 비첩(婢妾) 소생을 이미 사재감(司宰監)에 소속시켰는데, 그중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인 역자(驛子)가 자기의 비첩 소생과 함께 사재감에 소속되는 것은 미편(未便)하니 의리상 마땅히 속공(屬公)해야 합니다. 공사의 천구(賤口)는 자기 비첩 소생이 공천(公賤)이면 속공하고, 사천(私賤)이며 노자(奴子)의 본 주인에게 결급(決給)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따랐다.”라고292)『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8월 계해. 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이 기록이 연대기 자료에 수록된 것이라고 해도 문서 양식을 상당히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문서에 나오는 ‘변정도감 계목, 운운, 어떻습니까?’ 하는 형태가 바로 계목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경국대전』 「예전」의 계목식(啓目式)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   어떤 아문

2 계목. 운운. 어떻습니까?

3   년 인 월 일. 어떤 관직 신 누구. 어떤 관직 신 누구.

여기서 보면 1∼2행의 ‘어떤 아문 계목, 운운, 어떻습니까?’의 양식이 ‘변정도감 계목, 운운, 어떻습니까?’의 양식과 같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의 계목식은 태종대에 형성된 것이 그대로 정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계목식은 이후 조선시대 내내 사용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약간 차이가 생겨났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전율통보』 「별편」의 계목식에 반영되어 있다.

1   어떤 관사

2 계목. 이번에 올리는, 점련하였으면 첩정을 점련하였습니다. 전번에

  어떤

3   일 운운. 전번에, 점련하지 않았으면, 운운. 어떻습니까?

4   연호 몇 년 몇 월 며칠.  단함 신 성 서명.  단함 신 성 서명.

『경국대전』의 계목식과 『전율통보』의 것을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으나 내용에서 큰 변화는 없다. 다만 문서 내용에서 전자는 ‘운운 어떻습니까?’인데 후자는 ‘첩정을 점련하였습니다 전번에’의 문투가 새로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의 계목에서 확인되는데, 다음 ‘예조 계목(禮曹啓目)’을293)최승희, 앞의 책, 161쪽. 통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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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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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조

2 계목. 첩정을 점련하였습니다. 전번에 먹을거리로 올린 바 각 과일 중에 마땅히 홍시를

3 봉진해야 하나 지금은 제철이 아니므로 전례에 따라 곶감으로

4 봉진하라고 하셨사옵는 바, 전에도 이와 같은 때는 이미 대신 올린 예가

  있으므로 지금 역시 보고한 바에 따라

5 봉진하라는 일로 분부하심이 어떻습니까?

6 광서 10년 12월 초4일   판서 신 이 (압) 정랑 신 고 (압)

7     계

8      광서 10년 12월 초4일

9 계의윤

10         우부승지 신 이 (압)

이 문서는 1884년(고종 21) 12월에 예조가 올린 계목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담당하여 허락을 받았다. 홍시 대신 곶감을 올리는 것이 어떻겠느 냐는 내용이다.

양식을 보면 1∼6행의 계목 부분과 7∼10행의 결재 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1행은 발급자인 ‘예조’, 2행은 문서 종류인 ‘계목(啓目)’, 2∼5행은 문서 양식인 ‘첩정을 점련하였습니다.’, 5행은 문서 양식인 ‘어떻습니까’, 6행은 발급 날짜인 ‘광서 10년 12월 초4일’과 발급자인 예조의 관리, 신(臣), 성, 초압이다. 그리고 7행의 계는 인장이며, 8행은 결재 날짜인 ‘광서 10년 12월 초4일’, 9행은 국왕이 허락한다는 내용이며, 10행은 담당 승지의 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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