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조선이 본 일본을 내면서
허동현

위풍당당한 통신사(通信使) 행렬을 그린 그림이 말해 주듯이, 앞선 문물을 뽐내며 전수한 통신사에게 일본은 미개한 야만국에 지나지 않았다. 1748년(영조 24)에 일본에 갔던 통신사 조명채(曺命采)의 기행문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우월 의식과 일본 문화를 야만시하는 기록이 곳곳에 실려 있다. 조명채는 통신사를 접견하는 일본인의 태도를 보고 “왜인(倭人) 선비는 문답하며 필담을 나눌 때 우리를 황화(皇華, 천자의 사신)라 부르니 사모하여 따르는 마음을 알 만하다.”며 우월감을 과시하였고, 생김새가 다른 일본의 닭을 보며 “짐승이 닮지 않은 것도 오랑캐와 중화가 다른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일본을 낮잡아 보았다.

조선시대 유교 지식인은 일본은 왜(倭), 일본의 수도는 왜경(倭京), 천황(天皇)은 왜왕(倭王), 관원은 대차왜(大差倭)나 호행왜(護行倭)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인은 사람이 아닌 ‘왜의 무리(群倭)’에 불과한 부정적 타자였다. 또한 멀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왜구(倭寇)와 임진왜란에서부터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 눈에 비친 일본은 끊임없이 재부(財富)를 약탈하고 생존을 위협하던 적대적 타자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전근대 시절,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에 발 빠르게 대응하여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일본형 국민 국가를 이루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 국가로 거듭났다. 1876년에 이루어진 개항(開港)은 조일 양국 간에 문화의 수혜자와 공급자가 뒤바뀌는, 문화 교류 사상 역전 현상을 초래하는 시점인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된 기점이기도 하다.

일찍이 1876년과 1880년에 일본 조정은 수신사(修信使)를, 1881년에는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 신사 유람단)을 초청하여 서구화된 문물 제도와 군사 시설을 소개하였다. 일본은 소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류를 조선에 기증하고 조선을 일본식 제도로 개혁하려 하였으며, 유학생 파견을 유도하였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에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경고하였으며, 1880년에는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중재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일본은 갑신정변, 갑오개혁 같은 일본식 근대화 운동에도 개입하였으며, 동학 농민군과 수차에 걸쳐 봉기한 의병 같은 반일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청나라와 러시아를 상대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벌였다. 한마디로 1876년 이래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를 자처하였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지식인이 타자로서의 일본에 대해 지닌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지식인의 왜양일체적(倭洋一體的) 이적관(夷狄觀)이다. 개항 이후에도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을 묵수(墨守)하던 보수적 유교 지식인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한 일본을 중화 문화권을 이탈한 것으로 간주해 서양과 마찬가지로 이적시하였다. 이들은 세상을 유교적 도덕이 지배하는 중화의 문명 세계와 유교의 교화(敎化)가 미치지 않은 야만 세계로 이분하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의거해 일본을 중화 문화권에서 이탈하여 서구의 양이(洋夷)와 같아진 야만국이라고 보았다.

둘째, 친일 개화파 지식인의 ‘따라 배워야 할 모델’로서의 일본 인식이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기치로 프랑스 혁명 이래 서구 국가가 만들어 낸 근대화 기제(機制)를 이입하는 한편, 고대의 천황제를 부활시킨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라는 특수한 ‘일본형 근대’를 만들어 냈다. ‘서구의 역상(逆像)’으로서의 일본 근대는 서구 근대가 ‘오해’ 혹은 ‘오역’되거나 ‘날조된’ 것으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친일 개화파 인사에게 당시 조선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일본형 국민 국가였다. 일본에 직접 가 보거나 일본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김옥균, 홍영식 같은 친일 개화파의 메이지 유신관은 유교적 세계관을 견지하던 전통적 위정척사파 지식인과 크게 달랐다. 세계의 신조류(新潮流)에 대응하려 한 개화파 지식인, 특히 시찰단 또는 유학생으로 일본의 문명개화를 경험한 이들은 기존의 화이관적 이적관에서 벗어났다.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효(朴泳孝)의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의 제목이 잘 말해 주듯이, 개화파에게 일본은 더 이상 문화적 열등자로서 ‘왜’라는 비칭(卑稱)이 아니라 따라 배워야 할 ‘화(和)’라는 존칭으로 다가왔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독립 협회를 이끈 개화 세력에게 근대 일본은 따라 배울 이상적 모델이었다.

셋째, 친미 개화파 지식인의 ‘후진적 근대’로서의 일본관이다. 19세기 후반 약육강식의 사회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에서 유교와 전제 왕조는 국가의 번영을 더 이상 담보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여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본 서구 지향의 친미 개화파에게 일본은 이상적 모델이 아니라 ‘후진적 근대’로 비판적으로 수용하여야 할 반면교사였다. 그들의 눈에는 천황 대권을 헌법에 규정하고 신도(神道)가 지배하는 천황제 국가 일본이 ‘후진 근대’로밖에 비칠 수 없었다.

‘새의 눈(bird’s-eye view)’을 빌려 근대 한일 관계를 조감해 보면, 두 개 의 전환점인 개항과 갑오개혁이 도드라져 보인다. 개항과 갑오개혁은 구래(舊來)의 중국 문화 지향에서 벗어나 서구의 아류(亞流)로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식 부국강병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려 한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근대 국민 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의 위협, 다시 말해 ‘일본의 충격’은 세계 질서의 변화에 눈뜬 몇몇 조선의 개화 지식인의 뇌리에 일본과 같은 국민 국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목표를 각인시켜 주었다.

1881년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근대 국민 국가로 거듭난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둘러본 어윤중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인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히 감행하므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국가의 체제를 세울 수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낡은 관습에 연연해 허송세월하며 날을 보낸다. 이로써 천하를 보면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행하는 자가 성공한다.”

1880년대 이후 선각(先覺)한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형 국민 국가를 모델로 조선에도 국민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그와 사상적 맥락을 함께한 김옥균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근대 기획은 좌절되었고, 10년 뒤의 갑오개혁도 물거품이 됨으로써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우리는 한 세기 전 국민 국가 형성 시기에 ‘서세동점’이라는 또 다른 세계화의 충격이 동아시아 지역에 도래하였을 때 ‘시간의 경쟁’에서 낙오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조심스럽게 공경하는 행실을 보이고 강직하게 인의(仁義)를 말해 일본인이 고집스럽고 편협하게 대하더라도 우리는 관대하고 후하게 대하였다.”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가 남긴 말과 “이웃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해 이웃이라 봐줄 것이 아니라 서양인의 방식에 따라 대해야 한다.”는 갑신정변 직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쓴 ‘탈아론(脫亞論)’의 한 구절은 그때 우리의 실패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준다. 일본이 이 미 서구 열강을 흉내 내는 아류 제국주의로 표변(豹變)한 상황에서 도덕률(moral politics)에 기초한 교린(交隣)의 의례(儀禮) 외교는 쓸모없는 것일 뿐이었다. 그때 조선 왕조는 이미 사멸해 버린 교린과 도덕률이라는 구시대의 질서에 따른 대외 정책으로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지배하는 열강 쟁패(爭覇)의 세상을 대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근대의 역사 시간을 허송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냉전 붕괴 후 다시 돌아온, 힘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을 맞아 다시 돌아본 우리의 현재는 한 세기 전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국제 질서가 도덕률에서 힘의 정치로 바뀔 때 이미 세계적으로 그 기능이 소멸한 구질서를 자력으로 청산하지 못하고 도도히 밀려드는 새 질서에 타율적으로 편입되는, 역사 시간의 지체 현상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일본은 서세동점의 시기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미국의 이익을 지켜 주는 ‘집 지키는 개(番犬)’ 노릇을 한 덕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어떤 제국주의 나라에 비해서도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주로 ‘혹독하고, 조직적이며, 강제 동원적인 식민 통치’를 펼쳤다. 그렇기에 일본 덕에 근대화되었다는 말에 공감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의 편협함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준 남북 분단과 동족상잔의 6·25 전쟁에도 일본이 져야 할 책임이 크며, 전후 일본의 부흥도 6·25 전쟁 특수, 즉 조선의 아픔을 딛고 섰기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프랑스가 독일에게서 받은 것처럼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본의 사과를 아직 받아 본 적이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러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적개심은 독일과 달리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오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 이면에는 그들보다 먼저 시민 사회를 이룬 선진 프랑스에 대한 열등의식과 수치심도 작용하였다고 본다. 사실 독일도 비서구 국가에게 저지른 과거의 악행에 대해서는 사죄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탓만은 아닌 것 같다. 프랑스나 핀란드가 그들의 점령자에게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대상이었던 데 비해, 한때 일본의 스승이었던 우리는 그렇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인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도 일본인과 당당히 연대하고 협력하는 새 시대를 여는 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역사 속에 미래가 있다. 아마도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는 지나간 역사를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앞으로 범할지도 모르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일 것이다. 하우봉, 한철호, 허동현 세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한 결실인 『조선이 본 일본』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일본인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거듭나기 위한 기억의 거울이 되기를 바라며 감히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2009년 10월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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