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1.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자타 인식
  •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자아 인식
하우봉

‘자아(自我)’와 ‘타자(他者)’는 이항 대립적인 개념이다. 문화 영역에서의 ‘타자’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서구-비서구, 식민자-피식민자, 근대-전통, 문명-자연, 남성-여성, 백인-흑인, 고급 문화-저급 문화, 보편-특수, 기독교-회교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때로는 ‘자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의도적으로 ‘타자’를 설정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민족이나 국가 내부의 차원도 있고 대외 관계에서의 타자도 있다. 제국주의시대 유럽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나, 일본에서 단일 민족주의론을 강조하기 위해 재일 한국인을 타자화하는 것이 좋은 보기이다.

‘타자화한다’는 것은 ‘반대’, ‘배제’, ‘방어’, ‘소외시킨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간혹 타자화하는 대상이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 중심에 대한 주변, 열등한 존재에 대한 멸시, 내부의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소외의 의미가 강하다.

조선시대에는 왕조 초기 자아 인식의 확립 과정에서 타자를 설정하였다. 그것은 화이관(華夷觀)의 수용과 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의 확립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스스로를 명나라와 함께 ‘중화(中華)’로 설정하고, 그들과 교류하던 주변 국가인 여진(女眞), 일본, 류큐(琉球),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이적(夷狄)’으로 타자화하였다.

확대보기
고대 중국인의 세계 인식
고대 중국인의 세계 인식
팝업창 닫기

조선시대 사람들의 세계 인식에서 대표적인 사고방식은 천원지방관(天圓地方觀)과 중화주의적 세계관이었다. 두 가지 모두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천원지방관은 고대로부터의 전통과도 연결되고, 중화주의적 세계관은 유교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유교가 지배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조선 초기에 확립된 세계 인식의 기본 틀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이관이었다. 화이관은 고대 중국인의 중화사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국의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그림 ‘고대 중국인의 세계 인식’과 같다. 그들은 문화적 우월 의식에 입각하여 한족(漢族)이 살던 지역을 ‘내(內)’, 그 종족 및 문화를 ‘화(華)’로 구분하였고, 주변 민족이 살던 지역을 ‘외(外)’, 그 종족 및 문화를 ‘이(夷)’로 구분하였다. 처음 문화적 우월 의식에서 출발해 종족적·지리적 관념이 결합된 형태로 전개된 중화주의적 화이관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 있다. 한대(漢代) 이래 유교를 국교화(國敎化)하면서 화의 기준이 유교 문화의 수용과 발달 여부로 정해졌다. 이때부터 화이관은 유교적 예(禮) 관념으로 이론화되어 국제 질서 규범으로 체계화하였다. 즉, 예 문화의 우열에 따른 계서적(階序的)인 국제 관계로서 중국 주변의 국가가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冊封)을 받는 이른바 사대조공(事大朝貢)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후 이 체제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국제 관계의 일반적인 틀이 되었다. 북방 민족의 침략을 받은 송대(宋代)에는 화이 의식이 더욱 강화되어 국제 질서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였고, 중화주의적 성격이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세계관은 이 송대 주자학에 의해 체계화된 화이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화이관은 문화 이념이고 그에 바탕을 둔 사대조공 체제는 국제 질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도(道)’와 ‘기(器)’의 관계로 밀접한 정합성(整合性)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의 대외 정책은 이와 같은 유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구체화되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로서, 여진·일본·류큐 및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교린으로서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보장받고자 한 정책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계관으로 중화주의적 화이관을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자아 인식으로는 소중화 의식을 확립하였다. 새 왕조를 개창한 조선 조정은 대내외적으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제가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이(華夷)와 내외(內外)의 구분으로 정립되었다. 화이와 내외를 설정하고 판별하는 것은 국제 관계의 계서적 질서 형성의 기본이며, 사회·국가 생활과 역사 인식의 근본적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고대·중세·근대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 형성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자아와 타자를 화이나 내외로 구분하는 의식에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자의식의 강화 속에 타자와의 차이성을 강조하고 타자를 소외, 배척해 나간다. ‘화’와 ‘이’는 선진-후진, 문명-야만 등의 대립적 코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관념은 농경 문화를 건설한 국가가 유목 단계에 있는 국가나 농경 문화의 후진국에 대해서 갖게 되는 차별 의식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은 중화주의적 화이관과 사대조공 체제에서는 ‘이적’으로 분류되지만, 유교 문화 면에서는 중국과 대등하거나 버금간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화’를 자처하였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중심부로 적극 지향하면서 나아가 동일시한 것이다. 조선은 스스로 ‘소중화’라고 하여 중화인 명나라와 일체화하는 한편 주변 국가인 일본, 여진, 류큐를 타자화해 ‘이적’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소중화 의식이다.

확대보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모사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모사본
팝업창 닫기

이 시기 조선 사람들의 국제 관념과 자아 인식을 잘 보여 주는 것이 1402년(태종 2)에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이 지도는 왕조 초기 체제의 정비와 국경의 확정 등에 따른 지도 제작의 필요성과 함께 건국의 정당성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1)이 지도는 좌의정 김사형(金士衡), 우의정 이무(李茂)가 주관하고 검상(檢詳) 이회(李薈)가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권근(權近)이 지도의 하단부에 발문(跋文)을 썼다. 제작 과정과 제작 방식을 보면, 중국의 세계 지도인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일본 지도, 조선 지도 등 네 종류의 지도를 합성하여 제작한 것이다.2)중국 지도는 1399년 김사형이 구해 왔고, 일본 지도는 1401년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구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지도는 1402년에 완성된 이회의 팔도지도(八道地圖)이다.

이 지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15세기 초반에 제작한 세계 지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도에 나타난 세계 범위를 살펴보면, 동아시아(중국, 조선, 일본, 류큐, 동남아 제도)뿐 아니라 서남아시아(인도, 아라비아), 나아가서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포괄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조공 관계에 있는 주변 국가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직방 세계(職方世界) 중심의 화이도(華夷圖)와 크게 다르다. 직방 세계란 화이관이 미치는 범위, 즉 중국과 조공 관계에 있는 주변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지도의 기본 관념이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탈피한 것은 아니다. 지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바로 오른쪽에 있는 조선은 면적을 크게 확대하여 그려 놓았다. 이것은 조선이 문화적으로 중국에 버금가는 중화국이라는 소중화 의식 또는 문화적 자존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작게 그려진 데다가 방향도 잘못되어 있으며, 류큐와 동남아 제국(諸國)에 관한 묘사는 편차가 더 심하다. 또 여진족이 살았던 만주 지역도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요컨대 이 지도에 반영된 세계관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세계의 중심으로서 ‘화’이고, 다른 지역은 ‘이’로 자리매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그 후에도 계속 수정, 제작되면서 조선 전기 세계 지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지도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소중화 의식의 모습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도식화해 보면 그림 ‘조선 전기의 소중화 의식’과 같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소중화 의식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주도하거나 국제 사회에서 모두가 공인하는 국제 질서로서는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변의 여진, 일본, 류큐, 동남아 제국을 주변 국가로 삼는 아류 국제 질서를 도모하였다. 즉, 여진과 쓰시마 섬(對馬 島)을 조선의 기미권(羈縻圈) 내에 편입시키면서 조공 질서를 지키도록 강제하였다. 이와 같은 소중화 의식과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은 대체로 태종대와 세종대에 확립되었다고 보인다. 즉, 세조대의 박시형(朴時衡)은 상소문에서 일본, 야인(野人), 삼도왜(三島倭), 류큐를 ‘사이(四夷)’로 간주하였고, 그들의 사신이 내빙(來聘)하는 것을 작은 나라가 왕도(王道)를 사모하여 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처럼 세조대에는 주변 국가를 ‘사이’로 간주하면서 이러한 의식과 외교 의례를 더욱 강조하였다.3)『세조실록』 권45, 세조 14년 3월 을유.

확대보기
조선 전기의 소중화 의식
조선 전기의 소중화 의식
팝업창 닫기

1471년(성종 2) 왕명에 따라 신숙주(申叔舟)가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와 1501년(연산군 7)에 좌의정 성준(成俊)과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저술한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는 일종의 ‘외국 열전(外國列傳)’에 해당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조선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동남방의 해양 국가인 일본, 류큐와 서북방 만주 지역의 여진을 ‘외이(外夷)’로 간주하여 기미교린(羈縻交隣)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중화 의식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이나 베트남도 각기 자신의 주변 지역 내에서 또 하나의 ‘중심’으로 자처하는 의식과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적 국제 질서나 일본 및 베트남의 국제 질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중국적 세계 질서를 모방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