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1.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자타 인식
  • 타자로서의 일본
하우봉

조선 초기에는 ‘사대교린’을 외교 정책으로 하여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보장받고자 하였다. 교린국이란 대등한 외교 의례를 나누는 국가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의 교린국으로는 일본, 류큐, 여진, 동남아 국가가 있었 다. 이 가운데에서 책봉 체제(冊封體制)에 편입되어 대등한 의례의 대상이 된 것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쇼군(將軍)과 류큐 국왕이었다. 조선 조정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여 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

무로마치 막부시대의 일본은 국력이나 문화 면에서 조선보다 하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京都)에 있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가운데 하나’라는 정도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문화 면에서도 9세기 후반 이래 500여 년간에 걸친 쇄국 체제의 영향으로 국풍 문화(國風文化)는 발전하였을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낙후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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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
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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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취한 대일 정책의 기본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건국 초기에 명나라와의 관계도 안정되지 않았고, 북쪽 변경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經略)도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왜구 대책에서 군사적 대응을 담보로 하면서도 회유 정책과 외교를 중시하였다. 회유 정책은 수직 제도(授職制度)와 경제적 위무(慰撫)를 통한 것이었다. 태조의 정책은 정종과 태종에게도 계승되어 태종대에 이르면 왜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조선 초기의 성공적인 대책으로 왜구들이 와해되면서 그들은 대부분 평화적인 통교자(通交者)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왜구들이 통교자로 전환한 형태는 향화 왜인(向化倭人), 흥리 왜인(興利倭人), 사송 왜인(使送倭人)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향화 왜인은 투항하거나 귀순한 왜구로 조선에 정주(定住)하게 되었고, 흥리 왜인은 조선 연해에서 독립적으로 상업 행위를 하는 일본인이며, 사송 왜인은 쇼군 이하 일본 서부 지역 호족(豪族)의 대조선 통교에 중개자로 활동하는 자로 조선 무역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군사적 대응을 담보로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회유 정책과 외교를 중시한 조선 초기의 대일 정책은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왕조 초기의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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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사대교린 체제
조선 전기 사대교린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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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은 일본, 류큐, 여진, 동남아 국가와 교린 관계에 있었지만 그 관계를 넓은 의미의 ‘기미교린’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외교 면에서 대등하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화이관에 입각하여 야만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막부 쇼군의 사절인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에 대한 조선 측의 접대 의식도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 국왕사를 항상 조정의 조하(朝賀) 의식에 참가시켰으며, 세종대까지는 조회(朝會)할 때 수직인(受職人)인 여진족 추장과 함께 3품 반차(班次)에 배열하였다.4)『세종실록』 권28, 세종 7년 4월 기유. 류큐 국왕사도 마찬가지였다.5)『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 11월 경오. 이것은 대등 의례가 아니고 조공 의례이다. 조선 조정이 일본 국왕사에게 이렇게 ‘대등하지 않은’ 대우를 한 이유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을 일본을 완전히 통괄하지 못하는 ‘여러 통교자 가운데 하나’로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무로마치 막부의 왜구 통제력 부족, 예의를 모르는 외교 자세, 일본 국왕사가 사행 시 이익을 구하는 태도, 경제적 지원을 청할 때의 저자세 등도 조선이 대일 멸시관을 갖게 된 요소이다.

타자 인식의 한 상징은 대상에 대한 호칭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 본을 ‘왜(倭)’로 표상화하였다. ‘왜’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민족의 명칭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타자 인식의 상징적인 코드(code)였다. 공식적인 외교 문서에는 ‘일본’으로 표기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왜’, ‘왜국’, ‘왜인’으로 불렀다. ‘왜’는 문화의 저열성과 야만성을 상징화한 것이다. 문화의 저열성은 특히 유교 문화의 낙후성과 외교 의례에 관한 무지와 무례에서 기인한 것이고, 야만성은 왜구 및 임진왜란 때 보인 침략성과 잔인성에서 비롯된 인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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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도권』 중 약탈
『왜구도권』 중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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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일본은 ‘왜구의 소굴’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지식인은 화이관에 입각하여 일본 이적관(日本夷狄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더해 조선 전기에는 일본을 ‘소국(小國)’으로 인식하였다. ‘일본 소국관’은 15세기 후반 일본의 ‘오닌(應仁)의 난’ 이후 확산된 이른바 ‘무로마치 막부 약체론’과 함께 일본 측의 제추사(諸酋使)나 위사(僞使)가 표현한 ‘조선 상국관(朝鮮上國觀)’ 또는 ‘조선 대국관(朝鮮大國觀)’에 기인한 바도 있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대에 이르러서는 서계(書契)에서도 조선에 대한 저자세가 두드러졌다. 즉, 조선을 ‘상국(上國)’이라 하였고, 조선의 국왕에 대해서도 ‘전하(殿下)’ 대신에 ‘폐하(陛下)’ 혹은 ‘황제 폐하’를 사용하였다. 나아가 세조에 대해 ‘불심(佛心)의 천자(天子)’라고 칭하였다. 세조대와 성종대 초기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일본 측 통교자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이 처한 절박하였던 상황과 상당수의 사절이 가짜 사신(僞使)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태나 서계 내용이 조선 측의 일본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확실하다. 그 결과 성종대 초기에 확립된 대일 통교 체제와 『해동제국기』를 보면 일본 측 통교자를 ‘조선적 국제 질서’ 속에 편입시키고 있다. 이렇듯 조선 전기의 일본 인식에는 ‘일본 이적관’ 위에 ‘일본 소국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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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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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후로는 일본 이적관과 일본 소국관이 더욱 심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 준다. 일본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뿐 아니라 16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에서도 그 크기가 매우 작게 그려져, 작은 원형의 섬에 일본이라는 국호만 표기된 정도이다. 주체의 관심과 인식의 크기가 비례한다고 볼 때, 지도에 묘사된 일본의 모습은 일본이 조선 조정의 관심 대상에서 멀리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15세기 중반 대일 통신사(對日通信使) 파견이 중지됨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국내 정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졌고, 변방이 안정되면서 일본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심화되었다. 중종대 이후로는 조선 초기와 같은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인 대일 정책 대신 명분론과 고식적인 대응책에 집착하였다. 일본 인식에서도 실용성과 문화 상대주의적 인식에 근거한 신축적인 이해가 결여되는 반면 일본 이적관이 경직화되어 갔을 뿐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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