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2. 통신사행의 파견
  • 600년 만의 국교 재개
하우봉

14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크게 소용돌이쳤다. 중국 대륙에서는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하였고, 1391년에는 북원(北元)이 멸망하였다. 이듬해인 1392년에는 한반도에서 조선 왕조가 창건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남북조시대(1336∼1392)가 끝나고 통일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의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 통일 정권을 구축한 명나라는 대외적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지향하였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자마자 대외 정책의 기본을 조공 제도(朝貢制度)의 재확립에 두고 주변 국가에 가입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369년 고려, 류큐, 베트남의 사신이 명나라에 조공하였고, 1371년에는 일본, 크메르, 타이의 사절도 명나라에 조공하였다. 동아시아 제국은 일단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에 편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명대에 조공 제도가 가장 잘 정비되었고, 가장 많은 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공 제도의 전형이 이루어졌다.

개국 이래 성종대에 이르는 조선 초기는 조일 관계에 여러 가지로 특징 적인 면모를 보이는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8세기 후반 통일 신라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한 이래 고려 중기까지 일본과 정식 교류가 없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고려에서 왜구의 금압(禁壓)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일본에서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교류가 생겼다. 중앙 조정 간의 사절 왕래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려 말기의 이러한 교류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한일 관계는 전반적으로 매우 소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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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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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일본에서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남북조를 통일하자 조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태조는 건국 초기 왕권의 안정과 통치 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대외 관계의 안정이 필수 요소라고 파악하여 대명·대일 외교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명나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삼국의 외교 과제는 새로 수립한 정권 간의 상호 승인과 관계 설정이 목표였지만 공통적인 외교 현안은 왜구 문제였다. 조선도 대일 관계에서 왜구의 진압이 일차적 목적이었으며 외교와 통상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대일 정책 목표는 남쪽 변경의 평화였고, 기본 방식은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은 대일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따라서 태조는 즉위 직후 무로마치 막부에 승려 각추(覺鎚)를 보내 왜구의 금압, 피로인(被虜人)의 쇄환을 요구함과 동시에 수호(修好)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회답사(回答使)를 보내 피로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편 무로마치 막부는 600여 년간의 국제적 고립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1401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자진하여 명나라에 조공하고 사대 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였다.16)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국내 구케(公家) 세력의 반발과 전통적인 외교 의례를 무시하고 명나라 중심의 책봉 체제에 편입한 이유는 우선 취약한 막부의 권위를 국제적인 힘을 빌려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명 무역의 독점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막대한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다. 이듬해 그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日本國王)에 책봉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급진전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404년 조선 국왕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스스로 ‘일본 국왕’이라고 칭하였다. 조선 조정은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일본 국왕과 외교권의 주체로 인정하면서 국서(國書)를 접수하였다. 이는 양국 중앙 조정 간에 정식으로 국교(國交)가 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은 600여 년간에 걸친 국교 단절 상태를 끝내고 국교를 재개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이 율령 국가 시대 이래 지켜 왔던 쇄국 체제에서 벗어나 조선과 같이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 체제에 편입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일본은 단절하였던 국교를 재개함으로써 비로소 국제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과 일본 양국의 조정은 각기 정권 수립 초기로서 대외적 안정의 필요성을 공유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교류에 임하였다. 또한 두 나라는 의례 면에서도 대등한 교린국으로서 외교 관계를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사신의 왕래가 매우 활발하였다.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 전까지 65회의 사행을 파견하였는데, 그 가운데 48회가 태조에서 세종대에 이르는 개국 초기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의 경우 무로마치 막부 쇼군이 파견한 일본 국왕사만도 71회에 달하며, 그 밖의 다른 통교자들까지 합하면 4,824회에 이를 정도로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17)한문종, 『조선 전기 대일 외교 정책 연구』, 전북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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