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2. 통신사행의 파견
  • 통교 체제의 확립
하우봉

조선 국왕과 무로마치 막부 쇼군이 교린국의 처지에서 국서를 교환하였다고 하여 바로 조일 외교 체제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과의 통교 체제는 중앙 조정 간의 일원적 관계만이 아니라 다원적 통교 형태를 띠고 있었고, 막부는 그것을 통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통교 체제의 정비가 필요하였으며 양국 간 외교 현안이던 왜구 문제도 과제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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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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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책과 회유책을 중시한 조선 초기의 성공적인 대책으로 왜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대신 통교를 목적으로 하는 도항자(渡航者)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 가운데 경제적 이익을 노리는 자가 급증하여 조정의 재정적 부담이 늘어나자 조선 조정은 통교를 규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대에서 세종대를 거쳐 성종대 초기까지의 대일 통교 체제 확립 과정은 바로 통교 제한 또는 긴축 정책의 강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이 펼친 통제책의 골자는 쓰시마 섬(對馬島) 도주(島主)에게 특수한 권한을 부여하여 통교 체제 확립에 주요 역할을 맡기고, 무역에 대한 제한을 엄격히 하여 경제적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도항자를 제한하는 구체적인 방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 수도서제(授圖書制)이다. 수도서제는 통교상의 공로자나 조선에 복속하기를 희망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이다. 도서(圖書)를 받은 일본인을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고 하는데 조선에 내조(來朝)할 경우 서계(書契)에 이 도서를 찍어 증거로 삼았다. 수도서인은 공식적인 교역권을 인정받고 세 견선(歲遣船)도 정약(定約)받았으므로 엄격하게 선별하였지만, 계속 늘어나 1471년(성종 2)에는 32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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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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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개항장(開港場)의 설치와 포소(浦所)의 제한이다. 초기에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평화적인 통교자에 대해서는 남해안 지역의 어느 포소에서건 자유로이 무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에 경제적 부담과 군사적 위험 요인이 되자 1407년(태종 7)에 개항장을 부산포(富山浦)와 내이포(乃而浦)의 두 개 항구로 한정하였다. 그 후 1426년(세종 8)에 염포(鹽浦)를 추가하여 세 개 항구를 개방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포(三浦)이다. 삼포에는 왜관(倭館)을 설치하였으며, 서울에는 동평관(東平館)을 두었다.

셋째, 서계에 의한 통제이다. 서계란 일본인 통교자가 조선 조정 앞으로 발송하는 일종의 외교 문서인데, 조선 조정은 이것을 입국 증명으로 간주함으로써 도항하는 일본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 1420년(세종 2)부터 조정 방침에 따라 쓰시마 섬 사람은 도주의 서계, 규슈(九州) 지역의 사송인(使送人)은 규슈 단다이(九州探題)의 서계를 지참하도록 하였다.18)『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7월 임신. 그런데 서계를 위조하거나 개서(改書)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이후에는 서계 외에 문인(文引)을 요구하였다.

넷째, 행장(行狀)·노인(路引)·문인에 의한 통제이다. 행장은 도항 왜인의 신분과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 거주지의 호족이 발급한 것으로 일종의 신분증명서이다. 이 제도는 고려 중기 이래 여진인 통제책으로 사용하였는데, 흥리 왜인에 대한 통제 방식의 일환으로 전용하게 된 것이다. 노인과 문인은 일종의 도항 증명서로서 흥리 왜인과 사송 왜인에 대한 통제 방식이다. 노인은 본래 국내 상인에게 징세와 왕래 제약을 위해 발급한 것이다. 이를 일본인 통교자에게 전용하여 입국 증명으로 삼았는데, 후일 문인으로 통일되었다.

문인에는 선박의 대소(大小), 사신과 선부(船夫)의 숫자 등이 적혀 있어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문인 제도는 1438년(세종 20)에 쓰시마 섬 도주와 문인 제도를 정약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조약의 주 내용은 기존의 여러 호족에게도 허용하였던 문인 발행권을 쓰시마 섬 도주에게만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문인 제도는 점차 확대 적용되어 조선 근해에서 조업하는 일본 어부들에 대한 통제책으로도 활용되었다.

문인 발행권의 단일화는 조선으로서도 통교 일원화를 위한 효과적인 통제책이 되었다. 또 흥리 왜인, 상왜(商倭) 등으로 불리던 일본인 무역 상인은 서계, 행장, 문인 등의 규제책으로 인해 형식상 사송 왜인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사송선(使送船)에 필요한 서계와 문인의 발행권을 쓰시마 섬 도주에게 줌으로써 일원적인 통제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한편 쓰시마 섬 도주는 이를 이용하여 도내(島內)의 지배력을 장악하였고, 문인 발행에 따른 수수료의 수취, 교역 물품에 대한 과세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통교 무역의 독점적 권한과 이익을 향유하였다.

이상의 여러 규제책은 모두 입국 왜인에 대한 평화적 통교자로서의 증명과 입국 시 통제 및 접대를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제도를 사용 한 이유는 그만큼 일본인들의 위반이 심했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보면 삼포왜란(三浦倭亂) 전까지 서계, 도서, 행장, 노인, 문인을 차례로 사용하거나 혼용하였다. 그러다가 쓰시마 섬 도주와 문인 제도를 정약한 이후로는 문인으로 일원화되었다.

한편 도항자에 대한 여러 통제책이 쓰시마 섬 도주에게 위탁하는 형식으로 되었기 때문에 운영상의 모순과 한계가 있었다. 결국 조선 조정은 통교자의 도항 횟수와 세견선 수, 교역량을 직접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견선의 정약과 계해약조(癸亥約條)의 체결, 접대 규정의 정비로 나타났다.

세견선의 정약이란 조선 조정이 매년 도항하는 사송선의 수를 정하는 것이다. 1424년(세종 6) 규슈 단다이에게 봄가을로 두 차례 허용한 것이 세견선의 시초였다. 이후 1443년(세종 25) 대마도 체찰사(體察使) 이예(李藝, 1373∼1445)가 쓰시마 섬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와 도주 세견선 등의 수를 정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계해약조이다. 현재 두 항목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쓰시마 섬 도주에게는 매년 200섬(石)의 쌀과 콩을 하사한다.

○ 쓰시마 섬 도주는 매년 50척의 배를 보낼 수 있고,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정해진 수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보낼 수 있다.

이 사항만으로 보면 계해약조는 쓰시마 섬 도주와 세견선, 도주 특송선, 세사미두(歲賜米豆)를 약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쓰시마 섬 도주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조선 초기 대일 통교 체제의 기본 약조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조약을 계기로 다른 통교자와도 세견선 정약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조대에는 쓰시마 섬 도주 소 사다모리 일족(一族), 수도서인, 수직인, 일본 본토 각지 호족들의 사송선에 대한 정약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일본 국왕사 6척, 여러 거추사(巨酋使) 20척, 규슈 단다이 30척, 수직인 27명 각 1척, 수도서인 15명 각 1척 등으로 세견선 수가 정해졌다.

그런데 이 결과 사송선이 연간 400여 척에 이르게 되자 성종대 초기에 다시 정비하였다. 『해동제국기』와 『경국대전』에 규정된 것을 보면 1년에 입국한 선박 수는 220여 척이고, 입국한 왜인 수는 5,500명 내지 6,000여 명이었다. 또한 무역을 제외한 순수 접대 비용은 1만여 섬에 달하였다.19)이현종, 『조선 전기 대일 교섭사 연구』, 한국 연구원, 1964, 107쪽. 그런데 실제로는 규정된 것보다 훨씬 많았다. 1509년(중종 4)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한 해의 접대 비용이 2만 2000섬에 달하였다고 한다.20)『중종실록』 권8, 중종 4년 3월 갑인. 세사미두도 쓰시마 섬 도주에게 주는 200섬을 비롯하여 쓰시마 섬에만 연간 350섬을 지급하였다.

이로써 조선 초기 이래의 교린 체제 확립 과정이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즉, 세견선 정약을 축으로 사송선의 통제책이 계통적으로 운영되었고, 이에 따르는 여러 제도가 갖추어져 성종대 초기에는 일본 국왕사 이하 모든 통교자가 통일적으로 체계화되어 통교 체제가 확립되었다. 계해약조 다음에도 삼포왜란 후 1512년(중종 7)에 체결한 임신약조(壬申約條)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후 1547년(명종 2)에 약정한 정미약조(丁未約條) 등으로 내용이 바뀌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두 계해약조를 기본으로 하여 조정하였다. 이 점에서 계해약조는 조선 전기 대일 통교 체제의 기본 조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견선의 정약과 함께 조선 조정은 승선 인원수, 체류 기간, 접대 방식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규정하였다. 입국하는 일본 선박의 수와 승선 인원을 제한한 이유는 그들의 위반 횡포와 질서 문란을 규제하고, 접대 및 비용의 절감을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접대 규정은 성종대 초기 예조 판서였던 신숙주에 의해 정비되었다.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일본으로부터 오는 사송인을 일본 국왕사, 거추사, 규슈 단다이 및 쓰시마 섬 도주 특송사, 제추사의 4등급 으로 나누어 접대하였다.21)신숙주(申叔舟),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제사정례(諸使定例). 성종대 초기에 이루어진 통교 체제의 개혁과 접대 규정의 정비책에 의해 각 사절은 이 등급에 따라 분류되었다. 또한 『해동제국기』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에는 사송선의 수와 크기, 급료, 각종 접대연, 일공(日供), 하사품, 포소 정박 기간 등 각종 응접 규정이 29개 항목에 걸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세견선 수의 정약과 이에 따른 접대 규정이 완비됨으로써 비로소 조선 전기의 대일 통교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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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일본 사신의 상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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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기 이래 많은 과정을 거쳐 성종대 초기에 확립된 대일 통교 체제의 구조와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초기 조일 교섭은 명나라와 관계없이 조일 간에 독자적으로 전개되었지만, 태종대부터는 명나라 중심의 책봉 체제라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공통적으로 편입되면서 교린국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국왕과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대등한 자격으로 수호하고 사절을 교환하는데, 이를 적례교린(適禮交隣)이라고 한다.

둘째, 조선 조정은 무로마치 막부와의 일원적인 통교만이 아니라 막부의 고위 관리나 유력한 영주, 서부 지역의 호족, 쓰시마 섬 도주, 수직인, 수도서인 등 다양한 통교자와도 독자적인 통교 관계를 가졌다. 이른바 ‘다원적인 통교 체제’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과의 통교 형태는 조공 무역이었다. 이를 기미교린이라고 한다.

일본 통교자들의 목적은 교역을 하는 것이었지만, 조선 조정은 모두 기미 질서에서의 외교 의례와 조공 무역의 형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일본 국왕사 이외의 모든 통교자는 사송선의 형식을 취하여야 했다. 그들은 도서 가 찍힌 서계와 쓰시마 섬 도주의 문인을 지참하여야 했고, 포소에 도착한 후에는 조선 국왕에게 숙배(肅拜)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한양까지 올라오는 거추사의 경우 지정된 도로를 통해 상경하여 국왕에게 숙배하고 토산품을 진상하는 조빙(朝聘) 의례를 행한 후 회사품(回賜品)을 받아 가는 의식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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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접왜도 부분
동래부사접왜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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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조선 조정은 쓰시마 섬을 매개로 하여 모든 통교자를 통제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쓰시마 섬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통교 체제의 일원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1443년(세종 25)에 체결한 계해약조를 통해 쓰시마 섬 도주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여 대일 외교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조선 조정의 의도에 따라 쓰시마 섬 도주 소 사다모리는 도내의 통치권을 확립하였고, 조일 외교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조선 조정의 노력에 의해 조일 통교 체제는 고려 말 이래의 다원적인 관계에서 중앙 조정끼리의 적례교린과 쓰시마 섬을 중심으로 하는 기타 세력과의 기미교린이라는 중층적 관계로 정비되어 갔다. 계해약조 이 후 조선의 대일 교린 정책은 무로마치 막부와의 적례교린과 쓰시마 섬 도주와의 기미교린이라는 이원 체제로 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의도와 달리 일본에서는 계속 다양한 세력이 사절을 파견하여 다원적인 통교 형태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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