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2. 통신사행의 파견
  • 사절단의 왕래
하우봉

조선 전기의 대일 관계는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392년(태조 1)에서 1419년(세종 1)까지로, 중앙 조정 간에 국교를 체결하고 왜구 진압 정책에 진력(盡力)한 시기이다.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왜구가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른바 조일 통교의 성립기 또는 준비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1420년(세종 2)에서 1471년(성종 2)까지이다. 이 시기는 쓰시마 섬 토벌 이후 문인 제도 정약, 계해약조 체결 이래 각 통교자와의 세견선 정약, 조빙 응접 규정의 완비 등이 이루어진 단계로 통교 체제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다.

제3기는 1472년(성종 3)부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의 시기이다. 성종대 초기에 확립된 통교 체제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乙卯倭變) 등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임신약조, 정미약조 등 조약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중반 이후로는 중앙 조정 간의 왕래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쓰시마 섬과의 교류만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이 시기는 조일 통교의 변천기 또는 쇠퇴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일본에 파견한 사행의 횟수는 막부 쇼군과 여러 호족, 쓰시마 섬 도주 등에 대한 사절을 모두 포함하여 총 65회에 달한다. 이를 파견 대상별로 구분해 보면 무로마치 막부 쇼군 20회, 규슈 단다이 2회, 오우치 도노(大內殿) 2회, 쓰시마 섬 도주 32회, 이키 섬 도주(壹岐島島主) 4회, 미상 (未詳) 5회이다. 여기에는 중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앙 조정의 대표인 막부 쇼군보다 쓰시마 섬 도주를 비롯한 지방 호족에게 파견한 사절이 훨씬 많다는 사실에 주목된다. 이는 조선 전기의 대일 외교가 막부 쇼군과 일원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지방 호족 등과도 통교하는 다원적인 체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태조대부터 선조대까지 양국의 사절 파견 상황을 『조선 왕조 실록』에 근거하여 왕대별로 살펴보면 표 ‘왕대별 사절 파견 상황’과 같다.

65회를 시기적으로 분석해 보면 건국 초부터 세종대까지가 48회로 초기에 사절 파견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태종대에는 재위 기간 18년에 24회, 세종대에는 재위 기간 32년에 15회 사절을 파견하여 이 시기에 왜구를 금지하고 통교 체제를 정비하려는 조선의 적극적인 외교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왜구가 진압되고 통교 체제가 확립된 이후 사절 파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조선 조정은 계해약조를 체결한 1443년(세종 25) 이후로 막부 쇼군과 쓰시마 섬 도주 외에는 일절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

<표> 왕대별 사절 파견 상황
왕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조 명종 선조 합계
재위 기간 7 2 18 32 2 3 14 1 25 12 39 1 22 25 201
사절 횟수 7 2 24 15 - 2 4 - 6 1 2 - 1 1 65
✽세조대와 중종대는 즉위년이 곧 원년으로 재위 기간이 1년씩 많음.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22, 탐구당, 2003, 399쪽.

이에 비해 일본은 시종 활발하게 사절을 보냈다. 접근 동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16세기 이후로 조일 간 통교가 상업적 성격으로 바뀌면서 조선은 더욱 통제적이었던 반면 일본은 적극적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65회라는 사절의 횟수는 조선에 온 일본인 사행의 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다. 또 일본 통교자들은 사행과 교역이라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사절의 경우 외교적인 임무만 수행하였다. 국왕사의 경우 대의명분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만큼 사행 시 식량과 경비를 모두 가지고 갔다.

조선은 일찍부터 사행 시 사적인 교역을 금하였으며, 1439년(세종 21)에는 사무역(私貿易) 금지를 입법화하였다. 이 또한 사명(使命)을 가리지 않고 교역을 하면서 사행 경비도 조선에 부담을 지웠던 일본 사절과는 대조적이다. 또 조선의 경우 모든 사행이 조정에서 파견한 국가 사절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 개인 자격으로 파견된 사절은 전혀 없었다. 이 점에서도 국왕사 외에 거추사, 제추사 등 다양한 통교자로 구성된 일본과 대비된다.

일본에 사절을 파견한 목적은 왜구 금지 교섭과 수호 관계 수립, 왜구 금압과 피로인 쇄환에 대한 감사 표시, 일본 국왕사에 대한 보빙(報聘), 막부 쇼군과 쓰시마 섬 도주의 습직(襲職) 축하와 조위(弔慰), 각종 조약의 체결과 규정 엄수 요구, 규약 위반에 대한 책망과 범죄 단속 요구, 일본 국정과 왜구 정황에 대한 탐색 등이었다.

이에 따라 대일 사행의 종류가 다양하였다. 국왕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명칭이 통신사(通信使),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등으로 다양하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통신사만큼 체계화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사행의 형식은 국왕의 명의로 막부 쇼군에게 보내는 사절과 예조 명의로 규슈 단다이와 대호족, 쓰시마 섬 도주 등에게 보내는 사절로 나뉜다. 사절 파견 횟수로는 쓰시마 섬 도주가 32회로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였다. 특히 쓰시마 섬과 이키 섬에 보낸 사절의 명칭을 보면 경차관(敬差官), 수문사(垂問使), 초무관(招撫官), 체찰사 등 국내의 지방에 파견하는 관명(官名)과 같아 이 지역들을 속국(屬國) 또는 부용국(附傭國)으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왕 사절단의 사행 구성은 어떠하였을까? 1479년(성종 10) 통신사 파견을 준비하면서 만든 일본국 통신사 사목(日本國通信使事目)을 보면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각 1명, 통사(通事) 3명, 압물(押物) 2명, 의원(醫員) 1명, 군관(軍官) 약간 명, 영선(領船) 2명, 반당(伴倘) 5명, 악공(樂工) 3명, 지로왜(指路倭) 3명, 선장(船匠) 2명, 야장(冶匠) 2명, 화통장(火筒匠) 2명, 취라장(吹螺匠) 2명, 나장(螺匠) 4명, 집선 관노(執饍官奴) 2명, 선상 관숙(船上慣熟) 55명 등의 인원이 나열되어 있다.22)『성종실록』 권100, 성종 10년 1월 정축. 이 인원 외에 배를 젓는 격군(格軍)을 합치면 150∼200명으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국왕 사절단의 대표인 정사는 정3품에서 종4품 사이의 관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사행의 노정(路程)을 보면, 국왕사의 경우 대선(大船) 두 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를 출발하여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을 거쳐 규슈의 무역 도시인 하카타(博多)에 이른다. 이어 세토 내해(瀨戶內海)를 거쳐 오사카(大阪)에 상륙한 후 육로로 교토에 도착, 무로마치 막부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였다. 수로와 육로를 번갈아 가는 험한 노정으로 다녀오는 데에 대개 9개월 정도 소요되었다.

그런데 사절 파견 양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이 있다. 국왕 사절단인 통신사의 경우 실질적으로 일본의 막부 쇼군을 접견(接見)하여 국서를 전달하는 직능을 완수한 사행은 1443년(세종 25)의 통신사 변효문(卞孝文) 일행이 마지막이었다. 통신사 파견을 마지막으로 시도한 것은 1479년(성종 10)이었다. 그러나 이 사행은 쓰시마 섬에 머물고 있을 때 일본에서 내란이 일어나 지체하다가 정사 이형원(李亨元)이 중병에 걸려 사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 이후에는 통신사의 파견 시도마저 없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후반 통신사 파견이 중단된 이유는 통신사행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점, 무로마치 막부가 약체화되어 막부 쇼군이 일본 국왕으로서의 외교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점, 통교 체제 확립에 의해 통제책이 나름대로 잘 기능하고 남쪽 변경의 안전이라는 외교 목적이 달성되고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와 대조적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 조선 국왕 앞으로 보낸 일본 국왕사 만도 70여 회에 달한다. 그 이유는 조선 조정과의 교섭이 막부의 권위 유지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막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일본 국왕사를 17회에 걸쳐 파견하였다.23)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 쓰시마 섬 도주에 의한 가짜 사절(僞使)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수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일본 국왕사의 파견 목적은 국교 재개와 수호, 회례와 보빙, 조선 왕실의 경조사에 대한 문위(問慰), 명나라에 대한 통교 주선 요청, 조선의 국정 탐색 등 정치적인 것과 함께 대장경(大藏經) 증여 요청, 사원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 요구 등 문화적·경제적인 것까지 다양하였다. 공식적인 사행 목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일본 국왕사의 경우에도 공무역(公貿易)을 통한 교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거추사와 제추사의 경우 사행 명목은 왜구 진압 보고, 피로인 쇄환, 조약 체결에 따른 교섭, 대장경 구청(求請) 등이 있었지만 교역이 주목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일본 국왕사의 구성과 규모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일본 자료에 실상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데 1424년(세종 6)에 온 일본 국왕사 일행이 523명이란 것이 『조선 왕조 실록』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사절단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24)『세종실록』 권23, 세종 6년 2월 기유.

형식적으로 볼 때 조선 전기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은 도항 왜인이 모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교역만을 목적으로 온 경우에도 반드시 외교적 절차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입국한 ‘일본인 사절’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선 왕조 실록』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4800여 회를 헤아린다.25)한문종, 앞의 책, 1996. 건국 초부터 규슈 지역의 호족을 비롯한 사절이 경쟁적으로 내도(來到)하였고, 제추사의 통교가 쓰시마 섬 도주의 문인 통제로 일원화된 이후에도 사송 왜인들이 계속 도항하여 절대적인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경제적 실익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