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3. 조선 전기 대일 사행원의 일본 인식
  • 『학파선생실기』로 본 이예의 일본 인식
하우봉

이예는 1373년(공민왕 22) 울주군에서 태어나 1445년(세종 27) 73세로 생을 마감한 인물로 호는 학파(鶴坡)이며, 1910년 순종에게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선대는 본래 사족(士族)이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 이르러 새 왕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향리 신분인 울주의 기관(記官)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와 현달(顯達)함에 따라 이예는 중시조(中始祖)가 되었고 울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다. 그는 부친의 직을 계승하여 울주군의 기관으로 지내던 중 25세 되던 1397년(태조 6)에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였다. 1396년(태조 5) 12월 지울주사(知蔚州使) 이은(李殷)이 쓰시마 섬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이 생겼다. 이때 이예는 이은을 따라가 수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함께하면서 정성껏 시종하였고, 기지를 발휘해 이듬해 2월 이은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이 공로로 그는 관직을 제수(除授)받았고, 이후부터 대일 교섭의 일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 후 3년 만인 1400년(태종 즉위년) 회례사 윤명(尹銘)을 따라 쓰시마 섬, 이키 섬, 혼슈(本州) 등을 필두로 일본과 류큐를 오가면서 이후 40여 년간 사행원으로서 피로인을 쇄환하고 조일 간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직접 관여하였다.

특히 이예는 쓰시마 섬 문제에 정통하였던 듯하다. 예를 들면, 1426년(세종 8) 사물 관압사(賜物管押使)로 쓰시마 섬으로 사행을 떠나기 전 임금이 그에게 쓰시마 섬을 왕래한 횟수를 묻자 모두 16번이었다고 대답하였다. 1438년(세종 20) 이예가 경차관으로 쓰시마 섬에 파견되었을 때 조정에서 상경 왜인(上京倭人)의 유관(留館) 기간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세종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모두 “이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건의하였고, 이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36)『세종실록』 권81, 세종 20년 6월 13일 을축. 당시 조정에서 일본 및 쓰시마 섬과 관계되는 사항은 반드시 이예의 의견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연유로 그는 대일 관계의 실무 사항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렇듯 이예는 이러한 외교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태종대와 세종대의 대일 교섭에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세종실록』의 ‘동지중추원사 이예의 졸기(卒記)’에 따르면, “왜국에 사명을 받들어 가기가 무릇 40여 차례였다.”고 하였다.37)『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 2월 23일 정묘. 태조대에서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파견한 사행은 모두 48회이다. 그 가운데 이예가 사행원으로 40여 회 참여하였다면 조선 초기 대일 사행에 대부분 참가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그의 경력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걸쳐서도 가장 많은 셈이다. 사행 시에 맡은 직책을 보면 보빙사, 회례관, 회례사, 통신사, 체찰사, 경차관 등으로 여러 가지여서 다양한 목적의 사행에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대일 교섭 활동 내용을 볼 때 이예야말로 직업적인 외교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대에는 태종의 재위 18년 동안 13회에 걸쳐 일본, 류큐 등지를 왕래하면서 모두 600여 명의 피로인을 쇄환하였다. 세종대에는 우선 1419년(세종 1) 쓰시마 섬 토벌(己亥東征) 때 중군 병마 부수(中軍兵馬副帥)의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큰 공을 세워 1421년(세종 3)에는 공패(功牌)를 하사받은 동시에 행 좌군 사직(行左軍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대마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쓰시마 섬과의 교역에 근간이 된 문인 제도를 쓰시마 섬 도주와 정약하였다. 이어 1443년(세종 25)에는 71세의 고령에도 대마도 체찰사를 자청하여 서해안에 침입한 왜적을 추쇄(推刷)해 오는 한편, 쓰시마 섬 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 이 공로로 이예는 종2품에 해당하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까지 올랐다. 이와 같이 그가 고위 관직까지 오르고 후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는 공로는 모두 대일 교섭에서의 활약 때문이었다.38)이예(李藝)의 활동과 『학파선생실기(鶴坡先生實紀)』에 대해서는 한문종, 「조선 초기 이예의 대일 교섭 활동에 대하여」, 『전북 사학』 11·12, 전북 사학회, 1989 참조.

『학파선생실기(鶴坡先生實紀)』는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통 문집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이예가 직접 쓴 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13대손 이장찬(李璋燦)이 행장(行狀)과 관계 기록을 모아 1872년(고종 9)에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파선생실기』는 이예 자신의 저술이 아니라 주위의 인물이 쓴 행장과 『조선 왕조 실록』 등에 나오는 관계 기사를 편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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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파선생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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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파선생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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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는 「공패(功牌)」, 「해외일기(海外日記)」, 「조야기재합록(朝野記載合錄)」 등의 사적과 행장, 시장(諡狀)이 수록되어 있다. 2권에는 이예를 모신 용연사(龍淵祠)의 기문(記文)과 비문(碑文) 19편, 3권에는 ‘석계사봉안시제영(石溪祠奉安時題詠)’ 등 시 13편과 이가환(李家煥)의 ‘지(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학파선생실기』의 내용 가운데 조선 초기 조일 관계와 이예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공패」와 「해외일기」이다.

이예는 쓰시마 섬 토벌 후인 1421년(세종 3)에 공패를 하사받았는데, 「공패」에는 쓰시마 섬 토벌 당시 그의 활동이 기술되어 있다. 「해외일기」는 제목과 달리 일본에 대한 견문이나 사행 일기가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종사관(從事官)이 기술하였다고 하는데, 태조대에서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이예가 일본, 류큐 등지에 사행한 사실과 쓰시마 섬 토벌 시의 활동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학파선생실기』는 이예가 죽은 지 400여 년 뒤에 후손이 편집한 것이 라는 점, 이예가 주로 활동하였던 세종대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소략하다는 점 등이 아쉽다. 그런데도 『학파선생실기』는 조선 초기 이예의 대일 교섭 활동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예는 신분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대일 교섭에 고급 관료로서 정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실무를 맡았던 전문가였다. 『학파선생실기』와 『조선 왕조 실록』의 기사를 통해서 그의 일본 인식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실용적 관점으로 일본의 문물을 인식하였다. 이예는 일본의 화포와 병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였으며, 그들의 무기와 병선을 조선의 것과 비교하여 우수한 면이 있으면 적극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건의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왜선이나 무기를 연구하여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무기뿐 아니라 화폐 사용의 편리성을 지적하였고, 왜수차(倭水車)의 우수성과 단점을 관찰해 수용하도록 건의하였다. 일본의 농산물 종자를 도입할 것도 건의하는 등 일본의 경제와 기술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좋은 점이 있으면 수용하자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태도는 이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종대에 두드러지는 양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16세기부터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른바 일본 이적관을 이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또 쓰시마 섬 사람이나 일본의 혼슈에 대해 어떤 민족적인 특성을 강조하거나 둘을 구분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단지 쓰시마 섬 도주의 위약(違約)을 지적하고, 쓰시마 섬 사람들이 이익을 탐하고,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변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점 정도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정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일 뿐 특별한 선입관을 가진 것은 아니다. 쓰시마 섬에 대한 대책으로 그는 외교적인 방법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물론 군사적인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름의 해방 대책(海防對策)을 강구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쓰시마 섬 사람을 평화적인 외교 수 단으로 회유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예가 오랫동안 쌓은 외교 경험의 소산으로 보이며,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한 그의 관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셋째, 일본 서부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상황 변화에 따른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왜구의 존재 실태와 통제 방법, 그에 따른 대일 통교의 방책을 세밀하게 제시하였으며, 서부 지역의 호족 가운데에서는 오우치 도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그의 이러한 정확한 관찰에 따른 건의는 대부분 채택되어 조선 조정의 대일 정책에 반영되었다.

넷째, 당시 조일 간의 외교 체제나 일본 국내의 정치적 권력 관계 등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인식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예의 일본에 관한 기록 가운데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권력이 서부 지역의 슈고 다이묘와 쓰시마 섬 등의 소호족(小豪族)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작다는 사실은 기술하고 있으나, 천황(天皇)의 존재나 막부의 쇼군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또한 일본의 사회와 문화 등에 대해서도 기록한 바가 없다. 그는 일본의 정치권력 관계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을 아직 형성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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