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3. 조선 전기 대일 사행원의 일본 인식
  • 『일본행록』으로 본 송희경의 일본 인식
하우봉

송희경은 1376년(우왕 2)에 출생하였으며, 호는 노송당(老松堂)이다. 1402년(태종 2) 별과에 급제하여 관계(官界)에 진출한 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예문관(藝文館) 수찬(修撰)을 역임하였고, 36세 때인 1411년(태종 11)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0년(세종 2)에는 회례사로 선발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전라남도 담양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1446년(세종 28)에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송희경은 이예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청직(淸職)과 현관(顯官)을 역임하였고,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또한 문장에 뛰어나 조선 초기 대명·대일 외교에도 활약하였다. 이예가 일본 등지를 40여 차례 왕래한 실무급 전문가인 데 비해, 송희경은 사족 출신으로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하였고, 대명·대일 사행을 다녀오는 등 좀 더 고위급의 외교 활동을 하였다.

송희경의 일본 인식을 알려면 그가 일본에 가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회례사로 사행을 가기 전해인 1419년(세종 원년)에 쓰시마 섬 토벌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과 일본은 긴장 관계였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섬을 관장하던 쇼니 미쓰사다(小貳滿貞)가 무로마치 막부 쇼군에게 쓰시마 섬 토벌의 사실을 과장, 왜곡하여 보고하였다. 게다가 명나라가 조선과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일본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원구(元寇, 여원 연합군의 일본 침공을 일본에서 부르는 역사 용어)’ 이래의 대외 공포심과 결합되어 인심이 흉흉하였고, 막부에서도 쇼니 미쓰사다의 보고를 사실대로 믿어 조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막부에서는 료게이(亮倪) 일행을 사신으로 보내 쓰시마 섬을 토벌한 조선의 의도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일본 국왕사 료게이 일행은 1419년 11월 조선에 도착하였다. 세종은 이듬해 정월 사절단을 인견(引見)하면서 쓰시마 섬 토벌에 관한 경위를 설명하고, 그들이 요청한 대장경을 하사하는 한편 회례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조선 조정은 쓰시마 섬 토벌이 왜구 침입에 대한 징계일 뿐 다른 지역이나 무로마치 막부에 대한 침략이 아니며, 명나라와 연합하여 침략한다는 소문도 근거가 없음을 알리고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회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행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국내 사정은 흉흉하였으며, 당시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도 쇼니 미쓰사다의 보고를 믿 고 조선에 대해 의구심과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송희경 일행은 이렇게 쓰시마 섬 토벌을 둘러싸고 조일 중앙 조정뿐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와 쓰시마 섬, 규슈 단다이와 쇼니 미쓰사다 간의 입장이 서로 뒤얽혀 있던, 미묘하고 긴장된 시기에 일본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국 간 혹은 일본의 국내 사정을 잘 모르고 사행을 간 송희경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막부 쇼군 요시모치는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달리 책봉 체제에서도 이탈하는 등 아버지가 취하였던 외교 정책을 모두 되돌려 놓았다. 그러한 만큼 본래 책봉 체제에서 교린 관계를 맺었던 당시 조일 관계도 다소 불편하였다. 요시모치는 일본에서 말하는 ‘전통적 외교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국서에 명나라의 연호를 쓴 것을 트집 잡는 등 조선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래서 송희경 일행이 처음 국서를 전하고자 하였을 때 요시모치는 이를 거부하고 송희경 일행을 심수암(深修庵)에 감금하는 식으로 박대하였다. 이에 료게이, 진외랑(陳外郞) 등이 중재하고 요시모치가 국서의 내용을 본 후 태도를 바꿈으로써 해결되었다. 그 결과 송희경 일행은 사행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양국 간에는 긴장이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이 사행은 송희경의 적절한 조처와 기개로 쓰시마 섬 토벌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위기를 해소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행을 통해 일본 국내의 복잡한 사정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실제로 『일본행록(日本行錄)』과 통사 윤인보(尹仁甫)의 계문(啓文)에 나오는 바와 같이 송희경 일행은 무로마치 막부와 쓰시마 섬의 관계, 규슈 단다이와 쇼니 미쓰사다, 쓰시마 섬 도주의 관계, 쓰시마 섬 내에서 도주의 통제력, 막부 쇼군의 지방 통제력 등에 관해 비로소 실상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박서생의 복명이나 이예의 상계(上啓) 등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권력이 미약하고, 그에 따라 왜구를 금지하려면 막부 쇼군뿐 아니라 서부 지역의 유력 호족들에게 의뢰하는 것이 더 실질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그 후 그것이 조선 조정의 대일 통교 정책으로 구체화되기도 하였지만, 요컨대 그러한 일본 국내의 권력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쓰시마 섬 토벌 이후 최초의 대일 사행인 송희경 일행이 이룬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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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선생일본행록(老松先生日本行錄)』
『노송선생일본행록(老松先生日本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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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행록』은 송희경이 일본 사행에서 돌아온 직후 저술한 책이다. 본래 『일본행록』은 송희경이 필사본(筆寫本)으로 완성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유실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거치며 임진왜란 때 피로인 정경득(鄭慶得)이 일본에서 필사해 왔고, 1799년(정조 23) 그의 후손들이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책의 내용은 출발에서부터 귀국 후 복명하기까지의 과정과 일본의 산천, 풍속, 정치 상황 등에 대한 견문, 그가 겪었던 사건과 체험 등을 날짜별로 서술하되 기행시(紀行詩)로 구성하여 표현하였다. 기행시는 모두 227편으로 대부분 칠언 율시(七言律詩)이고, 오언 고시(五言古詩)와 사언(四言)으로 된 찬(讚)도 있다. 시 앞에는 거의 ‘시서(詩序)’가 있는데,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지방과 건물 등에 대한 내력과 역사적 사실, 사건의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 일기체의 글도 섞여 있고, 뒷부분에는 계문이 있어 사행의 전체 윤곽을 파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일본행록』은 산문체의 사행 일기가 아니라 시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견문록’이 따로 없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일본 사행록과 비교할 때 사실적 구성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일본행록』은 조선 초기 대일 사행원이 쓴 일본 사행록 가운데 현전하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또 쓰시마 섬 토벌 이후 조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쓰시마 섬 도주, 규슈 단다이, 무로마치 막부의 각각 다른 입장과 조선에 대한 태도, 일본 국내의 정치 정세, 사회상, 제도, 풍속, 문화 등에 대한 폭넓은 견문이 서술되어 있어 조선 초기 조일 관계사와 송희경의 일본 인식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송희경은 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일본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예를 들면, 처음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쇼니 미쓰사다를 쓰시마 섬 도주로 알고 있었다. 『일본행록』에 실린 글도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분석적인 것은 없고 대부분 견문할 당시의 즉흥적인 느낌을 적어 놓은 정도이다. 더욱이 일본 내의 흉흉한 인심과 긴박하였던 당시 상황에 무사 귀환을 염려하여 일본의 문물을 깊이 있게 살펴볼 여유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송희경은 높은 식견으로 비교적 광범한 분야에 걸쳐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 주었다. 『일본행록』을 중심으로 송희경의 일본 인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송희경은 기본적으로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인을 이적시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두 나라는 한집안이 되어 태평의 날을 맞이하자.”라는 상당히 외교적인 표현으로 친근감을 표시하였다.39)송희경(宋希璟), 『일본행록(日本行錄)』 5월 1일, 별감호등수야전(別監護藤狩野殿). 그러나 양국을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적 관계로 인식하였다. 즉, 그는 조선을 ‘상국(上國)’으로 자칭하고 조선의 사신을 ‘천사(天使)’라고 하였다.40)송희경, 『일본행록』 2월 17일, 이어(尼語). 또 조선 국왕의 국서를 ‘상국 보서(上國寶書)’라고 하여 조선이 일본의 상국임을 강조하였고,41)송희경, 『일본행록』 4월 25일, 호왜개유(呼倭開諭). 스스로 ‘화인(華人)’으로 자처하였다.42)송희경, 『일본행록』 5월 1일, 심수암즉사(深修庵卽事) ; 8월 4일, 야노원수원의진래견(夜老元帥源義珍來見).

일본에 대해서는 규슈 단다이의 노래와 그들의 언어를 듣고 ‘오랑캐의 소리(侏離)’라 하였고, 일본인을 ‘원인(遠人)’, ‘원융(元戎)’, ‘섬오랑캐(島 夷)’ 등으로 표현하였다.43)송희경, 『일본행록』 정월 15일, 과선산관용전운(過善山館用前韻) ; 8월 4일, 야노원수원의진래견. 원인이라는 표현에는 변방 또는 문명의 교화가 제대로 되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쓰시마 섬은 부용국 또는 속국으로 보았다. 예컨대 쓰시마 섬에 도착하여 대마도 만호(萬戶) 사에몬타로(左衛門太郞)를 ‘같은 왕의 신하’라고 하였다.44)송희경, 『일본행록』 2월 21일, 도박대마도동면선여관(到泊對馬島東面船餘串). 이때는 쓰시마 섬 토벌 직후 쓰시마 섬이 경상도에 부속된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명백히 쓰시마 섬 속국관(屬國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는 혼슈의 일본인과 쓰시마 섬 사람을 특별히 구분하여 인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송희경은 민족 또는 집단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관념과 개인적인 체험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듯하다. 즉, 그는 전체적인 일본 민족관과 달리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이들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료게이와 감호(監護) 후지카리노 도노(藤狩野殿)에 대해서는 “왜풍(倭風)이 없고 근후(謹厚)함이 조선인과 다름없었다.”고 평하였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접촉한 이들에 대한 호감이 일본을 우호적으로 인식하는 데 연결되기도 하였다.45)송희경, 『일본행록』 6월 25일, 별예서기(別倪書記), 별감호등수야전(別監護藤狩野殿).

둘째, 사행을 통해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권력과 쓰시마 섬 도주 쇼니 미쓰사다, 규슈 단다이 등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영주와 해적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본 국왕에게 가는 사신인데도 사행 중 해적의 습격을 계속 우려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는 “서국 지역의 해적들에게는 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는다.”라고 지적하면서 지방에서 쇼군의 권위가 통하지 않음을 파악하였다.46)송희경, 『일본행록』 7월 22일, 박가망가리(泊可忘家利). 이것은 조선이 막부 쇼군 권력의 실상을 처음으로 정확히 알게 된 것으로 그 후 조선의 대일 통교 대책 수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른바 ‘무로마치 막부 약체관(弱體觀)’의 선구를 이루는 관찰이었다.

한편 조선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주요 세력에 대한 송희경의 평가를 보면, 우선 당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모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아시카 가 요시모치에 대해 그는 “혼미하며 광포하다.”, “본디 완악한 풍습에 젖어 좋은 말이 없다.” 등으로 평하였고,47)송희경, 『일본행록』 4월 23일, 심수암서회(深修庵書懷) 이수(二首). ‘지주(地主)’라는 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쇼니 미쓰사다, 대마도 만호 사에몬타로 등 쓰시마 섬 토벌 이후 조선에 저항적인 태도를 취한 인물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이에 비해 규슈 단다이에 대해서는 “단다이는 해적과 이웃하였다 말하지만 이제 보니 서부 지역의 으뜸가는 인물일세.”라고 우호적으로 평가하였다.48)송희경, 『일본행록』 3월 23일, 제서광사(題西光舍) 이수(二首). 이러한 평가는 그가 당시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홀대받은 상황이었고, 서국 지역 세력이 조선에 대해 각기 다른 태도를 보여 준 데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 후 조선의 대일 정책에 참고가 되었다.

셋째, 일본의 농업 기술, 토지 소유 제도, 조세 제도 등에 대해 실용적 입장에서 관심을 가지고 기술하였다. 특히 그는 일본의 농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1년에 3모작을 하는 농작법에 대해 감탄하면서 계절에 따라 보리와 밀, 벼, 메밀을 차례로 심는 순서와 그러한 농작을 가능하게 하는 수리 시설을 자세히 소개하였다.49)송희경, 『일본행록』 6월 27일, 숙아마사지영일본사(宿阿麻沙只詠日本事).

넷째, 일본의 문화와 풍속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일본 문화에 대해 “아득한 창해가 중화를 가로막아 의복도 말도 다르고 법도도 같지 않네.”라고50)송희경, 『일본행록』 4월 21일, 입왕부락숙위통사천가(入王部落宿魏通事天家). 하여 일본의 풍속이 기본적으로 중화의 것과 다르다고 규정하였다. 즉 조선=중화, 일본=이적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이 문화 상국으로 자처하는 자세를 전제로 일본의 미숙성을 지적하였다.

일본의 불교 문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다. 송희경이 유숙(留宿)한 장소가 대부분 사찰이었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시문 창화(詩文唱和)를 한 인물 가운데 승려가 많았던 때문인지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 불교가 성행하는 양상이 그에게는 신기하였던 듯하다. 예컨대 “그 지방 풍속이 모두 불교에 귀속되어 있는데 중들이 제일 즐겁구나.”라고51)송희경, 『일본행록』 4월 4일, 증천녕사법주주면중료범도시(贈天寧寺法主周冕衆僚梵道詩) 이수(二首). 하였고, “양인 남녀의 반수가 중이 된다.”라고 사실 이상으로 지나치게 인식하기도 하였다.52)송희경, 『일본행록』 6월 16일, 보당사견서계유천룡사(寶幢寺見書啓遊天龍寺). 그는 자신이 만난 일본 승려들에 대해서 호감을 표시한 경우가 많았으나, 한편으로 불교 사원이 곳곳에 있으면서도 일반 백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지내는 사정을 비꼬기도 하였고, 일본의 승려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에는 기이한 일이 많도다.”라고 논하였다.53)송희경, 『일본행록』 4월 20일, 발병고향왕소과리시로미야점로중잡영(發兵庫向王所過利時老美夜店路中雜詠) 이수(二首).

일본의 풍속에 대한 송희경의 인식도 흥미롭다. 율령 국가 시대가 시작한 이래 600여 년간 쇄국 상태에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해 온 일본의 문화와 풍속은 당시 조선의 유학자가 보기에 낯설고 기이한 것이 적지 않았음은 당연할 것이다. 송희경은 일본의 그러한 풍속에 대해 ‘기이한 풍속’이라고 하면서 창녀(娼女)와 남색(男色)을 소개하였고,54)송희경, 『일본행록』 7월 22일, 조풍류박재심전념사(阻風留泊再尋全念寺) ; 6월 17일, 일본기사(日本奇事). 다이묘나 막부 관료들이 자기 아내를 쇼군에게 바치는 접대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가장 기이한 일’이라고 논평하였다.55)송희경, 『일본행록』 6월 13일, 갑비전영왕(甲斐殿迎王) 이수(二首).

그러나 송희경은 일본의 이러한 풍속에 대해 이적시하거나 배타적인 인식을 과시하는 식의 지나친 표현은 하지 않고 비교적 담담히 소개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접한 일본인들의 태도를 보고 “이국(異國)의 풍속도 예의를 아는구나.”,56)송희경, 『일본행록』 4월 16일, 도박섭진주병고(到泊攝津州兵庫). “일본의 유속(遺俗) 또한 아름답다.”라고57)송희경, 『일본행록』 3월 4일, 평방길구전설작어가서시(平方吉久殿設酌於家書示). 하는 등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제사 풍습을 그대로 지켜 주는 외교적인 행위를 보여 주어 막부로부터 호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독특한 것으로서 16세기 말 이래의 유학자나 조선 후기 사행원들의 그것과 대조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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