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1. 조선 후기의 통신사행
  • 임진왜란 후의 국교 재개와 통신사 파견
하우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8세기 후반 이래 600여 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국교 단절 상태를 청산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와 통교(通交)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1401년에, 일본은 1403년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 체제에 함께 편입하였다. 두 나라는 모두 국교 재개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1404년(태종 4) 3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국서(國書)를 지참한 일본 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 조정이 이를 접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체결되었다. 그 후 조일 양국은 서로 사절을 교환하였다. 이때 일본 막부에서 조선에 보낸 사절은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불렀고, 조선에서 일본 막부에 보낸 사절은 ‘통신사’라고 하였다. 통신(通信)이라는 말은 ‘신의로써 통호(通好)한다’는 의미이고, 통신사는 외교 의례상 대등국 간에 파견하는 사절을 가리킨다.

조선 전기에 일본 무로마치 막부에 파견된 사절의 명칭은 통신사 외에도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회답사(回答使) 등으로 다양하였으며, 모두 17회에 이른다. 그 가운데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절은 모두 6회였다. 그러나 교토(京都)까지 가서 사행을 완수한 것은 1429년(세종 11)의 박서생(朴瑞生) 일행, 1439년(세종 21)의 고득종(高得宗) 일행, 1443년(세종 25)의 변효문(卞孝文) 일행 등 세종대의 3회뿐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의 통신사는 교류 시기도 짧았고, 사행의 형태도 일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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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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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중 국서 부분
통신사행렬도 중 국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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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이 정례화하고 의례상 체계화되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이다. 이 시기에는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 12회의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 가운데 임진왜란 후 국교 재개기에 파견된 세 차례의 사절단 명칭은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으며, 1636년(인조 14)부터 정례화된 아홉 차례의 통신사와 구별된다. 그러나 양자 모두 국서를 지참한 국왕 사절단이라는 것과 인원 구성, 사행 노정(路程) 등 유사한 점이 많아 보통 합쳐서 12회의 통신사로 인정하고 있다.70)『통문관지(通文館志)』나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같은 조선의 외교 자료집에서도 세 차례의 회답 겸 쇄환사를 통신사행의 범주에 포함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는 통신사로 포함하여 12회의 통신사행으로 규정해 왔다.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고 일본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겼던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양국 모두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 통신사를 파견하고 접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임진왜란 후 조일 양국에서 진행된 지배 권력 확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동시에 17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전개되었던 국제 정세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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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탈환도병(平壤城奪還圖屛)
평양성탈환도병(平壤城奪還圖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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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조선의 입장을 살펴보자. 조선은 참혹한 전란을 7년 동안이나 겪은 후유증으로 백성들의 대일 적개심(敵愾心)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였다. 민중의 감정과 울분은 소설 『임진록(壬辰錄)』에 잘 표현되어 있다.71)김장동, 「임진록의 설화고」, 『한국학 논집』 4, 한양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83. 국민감정과 명분으로 볼 때 일본과의 강화(講和)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전란 후의 국가 재건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서는 대외 관계의 안정이 필요하였다.

한편 중국 대륙의 정세를 살펴보면 명나라는 전란의 후유증으로 쇠퇴해 가는 반면,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설하여 명나라와 조선을 위협하는 새로운 형국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은 북쪽 변경(邊境)의 방위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던 만큼 남쪽 변경의 안전, 즉 일본과의 평화적 관계가 필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에 새로 들어선 정권이 어떠한지, 조선을 재침(再侵)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은 조선 조정이 파악해야 할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또 전란 중에 잡혀 간 민간인 포로들을 쇄환하는 문제도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는 조정으로서는 명분상 중요한 문제였다. 한마디로 남쪽 변방의 안전을 위한 일본과의 우호 유지, 일본의 국정 탐색, 피로인(被虜人) 쇄환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실질적인 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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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유정 진영
사명 유정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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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일본의 사정을 살펴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603년 막부를 개설하였지만 아직 서부 지역의 다이묘(大名)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내치(內治)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새 정권으로서는 대외 관계의 정상화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쓰시마 섬 도주(對馬島島主)에게 명하여 국교 재개를 위해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나아가 1604년(선조 37) 사명 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이 탐적사(探賊使)로 일본에 왔을 때 직접 만나 통교 의지를 밝혔다.72)『고사촬요(故事撮要)』 상권, 만력 32년 7월조 ; 『사대문궤(事大文軌)』 권45, 만력 33년 6월 4일조. 이로써 국교 재개 논의가 급진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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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도(對馬島圖)
대마도도(對馬島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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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쓰시마 섬은 조선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여부에 사활이 걸려 있었다. 쓰시마 섬은 임진왜란 때 침략의 선봉(先鋒)에 섰지만 타의에 의한 것이었을 뿐 쓰시마 섬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쓰시마 섬은 국토의 88%가 산악이며 경작 토지는 3%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서 하사하는 세사미두(歲賜米豆), 중계 무역의 이익, 대조선 외교에 대한 포상으로 막부에서 내리는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일 간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적극 힘썼다. 쓰시마 섬 도주는 전란 직후부터 1606년까지 도합 23회에 걸쳐 강화 사절(講和使節)을 조선에 파견하고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양국 간에는 전쟁 책임 문제와 외교 의례를 둘러싸고 인식상의 괴리(乖離)가 심하였고, 당연히 이러한 점은 국교 재개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쓰시마 섬은 조선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막부의 체면도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양국의 국서를 개조하는 외교 사상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까지 일으켰다.73)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國書』, 中央公論社, 1984 참조.

아무튼 조일 양국은 자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서의 필요성과 새로운 국 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국교를 맺었다. 조선 조정은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이 국교 재개를 위해 제시한 두 가지 조건, 즉 국서를 먼저 보낼 것과 왕릉을 범한 도굴꾼을 포박하여 보낼 것을 수락하였고, 도요토미(豊臣) 정권을 붕괴시켜 원수를 대신 갚아 주었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국교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에게 국왕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607년(선조 40) 1월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이 중심인 제1차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하였고, 2년 후에는 교린 체제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보하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였다. ‘회답 겸 쇄환사’란 도쿠가와 막부의 국서에 대한 회답서(回答書)를 보내고 피로인의 쇄환을 촉구하는 사절단이라는 뜻이다. 이 사절단은 1617년(광해군 9)과 1624년(인조 2)에 두 차례 더 파견되었는데, 임진왜란의 뒤처리를 위한 사절로서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파견된 사절단은 1636년(인조 14)의 사행이 처음이었다. 당시 병자호란 중이었던 조선은 일본과 평화를 유지하는 문제가 절실하였고, 새롭게 재편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대처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후 통신사는 1811년(순조 11)까지 총 9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한편 도쿠가와 막부는 통신사행의 내빙(來聘)을 통해 국내의 다이묘에 대해서 정치적 우위를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와 연결하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조일 관계는 중앙 조정 간의 상징적 외교 행위로서의 국서 교환과 부산에 설치된 왜관(倭館)에서 행해지는 쓰시마 섬과의 교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교 사절 측면에서 보면 국서 교환은 조선 조정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있는 에도(江戶)로 파견하는 통신사이며, 쓰시마 섬과의 교역은 쓰시마 섬 도주에게 파견하는 문위행(問慰行)이다. 한편 일본에서 오는 사절을 보면 도쿠가와 막부에서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일본 국왕사 대신 쓰시마 섬에서 파견하는 대차왜(大差倭)가 막부 관련 사항을 수행하였다. 대차왜의 사절로는 쓰시마 섬에서 오는 정기적인 연례 송사(年例送使)와 임시 외교 사절인 차왜(差倭)가74)일본에서는 예조 참판 앞으로 보내는 서계(書契)를 지참하고 오므로 ‘참판사(參判使)’라고 부른다.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양국 간의 교류는 대부분 중앙 조정 차원에서 이루어진 통신사 외교와 쓰시마 섬과의 실무 외교라는 이원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75)조선 후기 조일 관계에 대한 시기 구분과 교류 형태에 대해서는 이원순, 「조선 후기 에도시대(江戶時代) 한일 교류의 위상」, 『조선시대사 논집-안과 밖의 만남의 역사-』, 1992, 느티나무 ; 하우봉, 「조선 후기 조일 관계에 대한 재검토」, 『동양학』 27, 단국 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1997 참조.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중앙 조정 간의 외교 사절이었던 통신사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사절이 없어졌기 때문에 통신사행이 지니는 의미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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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왜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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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는 1630년대 말에 이르러 강력한 해금 체제(海禁體制)를 확립하였지만 외국을 향해 두 종류의 문을 개방해 놓았다. 즉, ‘통상의 나라’라고 하여 경제적인 교역을 허용한 나라와 ‘통신의 나라’라고 하여 정치적인 교류를 하는 나라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통상국은 중국과 네덜란드 두 나라였고, 통신국은 조선이 유일하였다. 이러한 만큼 조선에서 파견되는 통신사는 일본의 국제 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동시에 외국 문물을 전해 주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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