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1. 조선 후기의 통신사행
  • 통신사행원의 문화 교류
하우봉
확대보기
임박시권(林朴詩卷)
임박시권(林朴詩卷)
팝업창 닫기

조선 후기 통신사행의 파견은 조일 양국의 국내 정치적 동기와 국제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평화가 정착되자 통신사행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는 점차 줄어들었다. 따라서 통신사행은 양국의 절실한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등의 긴박성은 사라지고 형식화, 의례화되었다. 대신 문화 교류라는 부수적 기능이 부상하였다. 통신사행원의 문화 교류 활동은 1655년(효종 6) 을미(乙未) 통신사행 때부터 시작되었고, 1682년(숙종 8) 임술(壬戌) 통신사행 이후에는 매우 활발해졌다. 조선 조정은 당초 병자호란의 어려움 속에서 남쪽 변경의 평화를 유지할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지만,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교화를 통한 평화 유지’였으며 문화 사절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런 만큼 통신사행에는 사문사와 의원, 화원, 사자관 등 문화 교류를 담당하는 인원이 다수 편제되었다. 특히 1655년부터 시문 창수를 임무로 하던 서기 인원을 늘렸고, 이어 1682년에는 제술관의 직급을 올리는 변화가 나타났다.78)장순순, 「조선 후기 통신사행의 제술관에 대한 일 고찰」, 『전북 사학』 13, 전북 사학회, 1990. 또 조정에서는 통신사행원을 선발할 때 문재(文才)와 기예(技藝)에 뛰어난 사람을 선별하여 뽑았다. 1764년(영조 40) 통신사행원이 복명(復命)할 때 영조가 직접 삼사와 사문사에게 일본 문인과의 시문 창수에 관해 질문하였을 정도로 조선에서는 문화 교류에 관심을 기울였다.

확대보기
마상휘호도(馬上揮毫圖)
마상휘호도(馬上揮毫圖)
팝업창 닫기

쇄국 체제의 일본에서는 외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제한되었던 만큼 통신사의 내빙에 대한 기대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백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컸다. 통신사 일행이 도착하면 각 번의 유학자, 승려, 문화인이 몰려들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원하였다.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지역은 물론 그렇지 않은 번에서도 유학자와 문인을 파견하여 문화를 수용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시나 문집에 통신사 일행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받기 위해 줄을 섰고, 한 수의 시나 글을 받으면 가문의 보배로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광경은 통신사행원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일본 각지의 문인들이 편찬한 필담 창화집(筆談唱和集)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문사를 담당하였던 제술관과 서기는 한 번 사행에 1,000여 수씩 시를 지었다고 하며, 이때 이루어진 필담 창화집이 200여 종을 넘는다.79)일본에 전하는 필담 창화집(筆談唱和集)에 관해서는 이원식, 『조선 통신사』, 민음사, 1991 참조. 사자관과 화원도 서화를 요청하는 일본인 방문객을 접대하기에 매우 바빴으며, 의학 교류를 담당한 양의(良醫)와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통신사행은 조선과 일본 중앙 조정 간의 외교 의례 행사이고 지배층 간의 교류가 중심이었지만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민간인도 모두 함께 참여한 일대 문화 행사이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각종 통신사 행렬도(行 列圖)를 보면 당시 일본 서민들이 통신사의 행렬을 보기 위해 연도에 몰려나와 구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통신사행이 지나간 지역에서는 통신사와 관계있는 문화 행사나 무용 등이 남아 있는데, 이는 통신사행이 일본의 지식인뿐 아니라 민중에게 끼친 영향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그들의 서민 문화를 대표하는 장르인 가부키(歌舞伎)에도 통신사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다.80)池內敏, 「近世後期における對外觀と國民」, 『日本史硏究』 344, 日本史硏究會, 1991. 이와 같은 통신사행을 통한 문화 교류는 한문학과 유학뿐 아니라 그림, 글씨, 의학 분야까지 포함하여 근세 일본 문화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확대보기
통신사 행렬 구경 인파
통신사 행렬 구경 인파
팝업창 닫기

한편 통신사행은 조선에도 일본 문화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다. 통신사행원은 일본에 다녀와서 사행 중의 체험과 견문을 적은 일본 사행록을 저술하였다. 현재 40여 종의 사행록이81)이들 사행록의 명칭과 소장처에 관해서는 하우봉, 「새로 발견된 일본 사행록들-『해행총재(海行摠載)』의 보충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112, 역사학회, 1986 ; 이원식, 앞의 책 참조.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기행 문학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사회상과 문화를 조선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가져온 일본 물품과 견문록(見聞錄)은 당시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일부 실학자들에게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하는 근기 남인계(近畿南人系) 실학파 학자들은 일본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