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2. 원중거의 일본 인식
  • 원중거의 생애와 대일 사행
하우봉

원중거(元重擧, 1719∼1790)는 영·정조대를 살다 간 인물로서 호는 현천(玄川)이며 본관은 원성(原城)이다. 그는 한미(寒微)한 무인(武人) 집안의 서자(庶子) 출신으로 평생 동안 처사(處士) 생활을 하며 보낸 시인이었다. 그러한 그가 학계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통신사행원으로 일본을 여행한 후 저술한 『승사록』과 『화국지』의 내용이 재조명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들 책은 일본 사행록으로서 사료(史料) 가치가 높으며, 저자 원중거도 이른바 ‘연암 일파(燕巖一派)’의 장로 격으로 그들의 일본 인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중거는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1750년(영조 26) 3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실직(實職)을 얻지 못하고 40세에 종8품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를 제수(除授)받았다. 그 후 다시 야인(野人)으로 지내다가 1763년(영조 39)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대일 통신사행에 서기로 수행하게 되었다. 사행에서 돌아온 지 7년 만인 1771년 종6품 송라 찰방(宋羅察訪)에 임명되었으나 60일 만에 해직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정조대에 들어와서는 득의(得意)의 시절을 보냈다. 즉,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 참판 김용겸(金用謙)의 추천으로 종6품 장원서(掌苑署) 주부(主簿)를 제수받았다. 이후 원중거는 내직(內職)에 머물면서 당시 조정의 신진기예(新進氣銳)와 교유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해동읍지(海東邑誌)』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덕무, 성대중, 박제가, 유득공, 이만수, 윤행임, 이서구, 이가환 등 당시 기예들이 이 책을 공동 편찬하였는데, 원중거는 편찬 업무와 직접 관계없는 직책이었으나 학식을 인정받아 참여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종6품 목천 현감(木川縣監)에 제수되어 외직을 맡았는데, 그해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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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중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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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원중거의 교우 관계와 학문적 성격을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서울로 올라온 이후 연암(燕巖)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一群)의 지식인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위로는 김용겸과 유후(柳逅)가 있고, 연하로 가깝게 지낸 사람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성대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후기 한시 사가(漢詩四家)로 불릴 정도로 시문에 뛰어났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 실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원중거는 강개(慷慨)한 성품과 지사(志士)의 면모를 지닌 학자로서, 신분 제약에 따른 울분을 풍류와 소탈함으로 풀어 버린 시인으로서 소장파 지식인의 존경을 받았고, 존장 격의 위상을 차지하였다.83)오수경, 『18세기 서울 문인층의 성향-연암 그룹에 관한 연구의 일단-』, 성균관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89, 113∼119쪽.

원중거는 철저한 정주학자(程朱學者)로서의 면모와 이용후생학에 관심을 갖는 학문적 성향을 띠었다. 그는 일본 사행 시 철저한 정주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부산을 출발할 당시 동행한 서기 성대중(成大中)과 김인겸(金仁謙)에게 이번 사행에서 일본인을 정주학으로 교도(矯導)할 것을 결심하며 시문보다는 경학(經學)을 주로 논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에 성대중과 김인겸이 우리의 역할은 창수(唱酬)이지 강학(講學)이 아니라고 하자 그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배척하는 무리와는 창수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84)원중거(元重擧), 『승사록(乘槎錄)』 권2, 갑신년 3월 10일조. 그런데 사행 갔을 당시 일본에서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이 풍미하고 있었고, 그가 만난 대다수의 일본 유학자와 문사가 오규 소라이의 문도(門徒)임을 알고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그래서 원중거는 시문을 창수하고 필담을 나눌 때 반드시 정주학을 이야기하고 『소학(小學)』을 들었다. 일본에서 남긴 행적을 살펴보면 ‘정주학의 전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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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 영정
오현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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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용후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면모는 『화국지』에 뚜렷하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성향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행 전후에 맺은 그의 교우 관계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연암 일파의 소장학자는 대부분 북학론(北學論)을 제창하면서 이용후생의 실학이나 고증학(考證學)을 강조하였는데, 원중거는 그들과 교유하면서 이러한 학풍을 수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원중거가 수행한 1763년(영조 39)의 계미 통신사행은 조선 후기 11번째의 사절로서 에도까지 간 마지막 사행이었다.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던 만큼 당시 사행원들이 남긴 사행록은 모두 10편으로, 양적으로 가장 많고 질적으로도 우수하였다. 특히 이른바 사문사가 모두 사행록을 저술하였는데, 그들이 중심이 된 필담 창화의 실상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체재 면에서도 한글 가사체로 된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와 일본 국지(國志)의 성격을 지닌 원중거의 『화국지』 등 뛰어난 작품이 나왔다.

이 사행의 사문사는 원중거 이외에 제술관 남옥, 서기 성대중과 김인겸이었다. 사행 출발 전 삼사와 사문사는 7월 24일 영조를 인견(引見)하였다. 영조는 사문사에게 시제(詩題)를 주어 시험한 후 “너희들은 오로지 문자로써 나라에 욕되지 않도록 하고 돌아오라.”고 하교하였다. 조선에서는 대일 통신사행을 문화적 교화의 일환인 명분론에 입각하여 파견하였던 만큼 문화 교류를 중시하였지만, 임금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인 것은 이례적이었다.85)영조는 사행원들이 귀국한 후 복명(復命)할 때도 사문사에게 필담 창화한 바를 묻고 치하하였다(조엄, 『해사일기』 연화(筵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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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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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원에 선발된 원중거는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나아가 ‘미천한 몸’으로 임금을 두 번씩이나 배알(拜謁)하는 영광을 입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하였다.86)원중거, 『승사록』 권4, 갑신년 7월 8일조. 또 출발 전에 이미 나와 있던 사행록들을 분문 초록(分門抄錄)하여 ‘신행 편람(信行便覽)’을 만드는 등 나름대로 사행 준비를 치밀하게 하였다.87)원중거, 『승사록』 권1, 계미년 12월 18일조. 사행하면서 일본 문사와 창화한 시가 1,000여 수에 달하였다고 하며, 그의 이름이 사행을 계기로 일본은 물론 국내에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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