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2. 원중거의 일본 인식
  • 『승사록』과 『화국지』
하우봉

『승사록』은 모두 합하여 332일 동안의 사행 전 과정을 매일매일 일기 형식으로 기술한 사행록이다. 모두 4권 4책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고려 대학교 도서관 육당 문고본(六堂文庫本)에 소장되어 있다. 1, 2권은 1763년 7월 24일 출발에 앞서 영조를 인견한 날부터 이듬해 3월 에도에서 국서를 전하기까지의 일정이 기록되어 있다. 또 ‘회정기(回程記)’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3, 4권에는 1764년 3월 11일 에도에서 출발하여 귀국 후 7월 8일 왕에게 복명하기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승사록』에는 일본을 다녀오며 체험하였던 사건과 필담하면서 느끼고 견문한 것을 기술한 내용뿐 아니라 정책적인 제안도 많다. 원중거가 이를 기록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즉, 이전의 기록들이 소략하여 보충하기 위한 것이며, 후에 사행을 올 자가 참고하여 실수하지 않고 쓰시마 섬 사람과 상역배(商譯輩)의 농간을 막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조정에 죄를 입고 나라에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화국지』는 천(天)·지(地)·인(人)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일본 오차노미즈 도서관(御茶の水圖書館) 세이키도 문고본(成簣堂文庫本)에 소장되어 있다. 천권에는 일본의 지리, 역사, 정치, 외교 등을 중심으로 26항목, 지권에는 일본의 사회, 경제, 풍속을 중심으로 31항목, 인권에서는 경제, 풍속, 조일 관계사를 중심으로 19항목이 서술되어 있다. 일본의 여러 측면을 전체 76개의 방대한 항목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 『화국지』는 일본 사행록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일반적인 문견록과 차원이 다르며, 이름 그대로 일본 국지로서의 성격을 띤 저술이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화국지』를 쓴 동기에 대하여 원중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유사시에 정책 당국자나 지식인이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다.88)원중거, 『화국지(和國志)』 천권(天卷), 위연호(僞年號). 둘째,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일본 자료를 구하였을 경우 올바른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 국왕의 상대인 막부 쇼군가(將軍家)의 계보(系譜) 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면서 “왜국에는 문헌이 적고 꺼리고 피하는 것이 많아서 사신이 왕래한 지 100여 년이 지났으나 막부의 상황이 어떠한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겨우 왜인이 저술한 두세 권의 책을 얻어서 한 맥락으로 정리함으로써 참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고89)원중거, 『화국지』 천권, 무주본말(武州本末). 설명하였다. 셋째,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에 관한 국내 저술이 정확성과 체계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면서 일본에서 얻은 일본 서적과 견문을 정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그는 특히 임진왜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였다. 예컨대 ‘임진입구시적정(壬辰入寇時賊情)’에서는 일본 서적을 바탕으로 하되 『간양록(看羊錄)』과 비교하는 등 상세한 고증을 통해 당시 일본군의 동향을 밝혀 놓았다. 그 이유에 대해 “진실을 알기 위해 준비한 것이며 나중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와신상담의 뜻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라고90)원중거, 『화국지』 천권, 수적본말(秀賊本末).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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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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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승사록』과 『화국지』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승사록』의 기록을 보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같은 시기에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책을 저술한 시기는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해인 1764년(영조 40)경으로 추측된다. 『화국지』 천권 ‘위연호(僞年號)’에 1764년까지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점, 또 대개 귀국 후 바로 사행 일기를 저술하는 것이 통례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대체로 이해를 저술 연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승사록』과 『화국지』는 자료 가치가 높은 일본 사행록이다. 1763년 계미 통신사행의 사행원이 지은 사행록 가운데 유명한 것은 조엄의 『해사일기』이다. 이 책은 사행 임무의 전체를 관장하는 정사로서의 입장과 동래 부사, 경상 감사를 역임한 당대 제일의 일본통 관료로서의 통찰력이 잘 반영되어 있는 훌륭한 사행록이다. 하지만 원중거의 『승사록』과 비교해 보면 각각의 특징이 있다. 원중거의 직책이 서기였던 만큼 필담 창화와 같은 문화 교류 면에서는 『승사록』이 훨씬 자세하고 풍부하다. 그런 점에서 『승사록』은 통신사행 당시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실상을 아는 데 유용한 자료의 보 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필담 창화에 관한 묘사와 내용은 일본 사행록 가운데 가장 풍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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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회도(詩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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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화국지』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가장 정제되고 풍부한 일본 국지이다. 일본의 『무감(武鑑)』을 이용해 막번 체제(幕藩體制)의 구조와 운영 방식을 소상히 밝힌 점과 일본에서 구해 온 자료를 이용해 기술한 조일 관계사 기록 등은 사료 가치가 높다. 서술 태도에서도 일본 사료와 조선 자료를 철저히 비교 정리하였으며, 기존의 사서(史書)와 중복되는 부분은 일절 기술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모르는 부분은 미상(未詳)으로 표시하고 그 칸을 비워 두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고자 하는 저술 목적에 충실하였다.

한편 원중거는 『승사록』과 『화국지』 이외에 일본에서 나눈 시문 창수 내용을 담은 별도의 책을 남겼던 것 같다.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 내집(內集)에 ‘일동조아발(日東藻雅跋)’이라는 발문(跋文)이 있는데, 홍대용이 원중거가 저술한 창수록(唱酬錄)을 논평하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원중거가 ‘일동조아(日東藻雅)’라는 제목의 창수록을 편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추 론이 맞는다면 원중거는 사행 일기로서 『승사록』, 견문록으로서 『화국지』, 창수록으로서 『일동조아』 등 3부작으로 구성된, 가장 종합적인 일본 사행록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던 듯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일동조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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