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2. 원중거의 일본 인식
  • 원중거의 일본 인식
하우봉

『승사록』과 『화국지』에 나타나 있는 원중거의 일본 인식은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하며 방대하다.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면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원중거의 일본 민족에 관한 인식이다. 원중거의 일본 민족관은 주자학적 세계관 속에 일본을 이적시(夷狄視)하던 조선의 전통적인 일본관과 다른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주자학자인 그는 일본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화이관(華夷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에 가서 직접 일본인을 접한 후 그것이 지니는 폐쇄성과 비현실성을 자각하면서 일본 이적관(日本夷狄觀)을 부정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는 사행을 마치고 일본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우리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일본인의 장점을 기탄없이 인정하였다.

어떤 사람은 혹 말하기를 “그들과 더불어 어찌 인의(仁義)를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크게 틀린 말이다. 둥근 머리와 모난 발을 하고 있어도 우리와 똑같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어찌 우리만이 독특한 오기(五氣)와 오성(五性)을 가져서 그들과 다르겠는가. 하물며 그들의 총명하고 고요함을 오로지함과 의를 사모하고 선을 좋아하는 것, 자신의 일과 직업에 근면하고 몰두하는 것 등에 나는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이 그들에게 흠잡히지나 않을까 두렵다.91)원중거, 『승사록』 권4, 갑신년 6월 14일조.

한편 원중거는 혼슈 사람과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해서 뚜렷한 구분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역시 그가 가진 또 하나의 일본인관의 특징이다. 그는 『승사록』 곳곳에서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표현하였다. 『화국지』 천권 ‘풍속’에서 “쓰시마 섬은 오랑캐로서 문화가 없으며 교룡(蛟龍), 이무기와 같이 산다. 몸집이 건장하고 장대하여 내국인과는 전혀 다르다.”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내국인들이 항상 쓰시마 섬을 만이(蠻夷)라고 부르며 사람 축에 끼워 주지 않는다.”고 하여 혼슈 사람과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또 쓰시마 섬 사람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갖은 농간을 부리며 이익을 취하는 사례를 자세히 서술한 뒤 “쓰시마 섬의 풍속은 흉험(兇險)하고 비루하다. 우리나라와 접해서 왜관에 출입하는 자는 모두 쓰시마 섬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쓰시마 섬 사람을 가리켜 왜인이라고 하는데, 실은 그 풍속을 잘 모르기 때문으로 내국인과 전혀 다르다.”라고 하였다. 원중거가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한 관점을 이와 같이 굳힌 까닭은 주로 사행 중의 체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쓰시마 섬 사람들이 두 나라 사이에서 부산 왜관의 통사(通事)들과 짜고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누누이 비판하였다. 심지어 쓰시마 섬을 ‘조선과 일본 양국의 적’이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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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슈 사람과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한 엄격한 구분과 일본 이적관 청산이라는 독특한 원중거의 일본인관은 『화국지』와 『승사록』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러한 단편적인 인상을 종합한 총론적인 일본인관이 『화국지』에 나오는데, 매우 흥미롭고 격조 높은 일본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인물 됨이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굳세고, 또한 굳세지만 능히 유구(悠久)하지 못하다. 약하면서도 능히 참고, 또한 참을성이 있지만 능히 떨쳐 일어나지 못한다. 총명하지만 식견(識見)이 치우쳐 있고, 예민하지만 기상(氣像)이 좁다. 능히 겸손하면서도 남에게 양보하지 못하고, 능히 베풀면서도 남을 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한다. 가까운 사람은 반기면서도 먼 사람은 돌보지 않는다. 조용한 곳을 즐기고 떼 지어 살기를 싫어한다. 본업에 만족하며 자신의 분수를 기꺼이 지킨다. 한번 정해진 규칙을 지키되 감히 한 치도 더 나아가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자기의 노력으로 먹되 티끌 하나라도 주거나 받지 않는다. 이는 대개 아녀자의 태도로서 침착하고 굳세거나 세차게 일어나는 풍모(風貌)가 없다. 기계 장치나 진기한 완구(玩具), 채색되고 교묘하게 아로새긴 공간 등에 몰두하지만 부지런히 일하며 나태하지 않다. 오로지하고 어수선함이 없어 종일 똑바로 앉아서도 게으름을 탐하거나 하품하는 기색이 없다. 사고가 나면 혹 밤이 되도록 자지 않고 항상 스스로 경계한다. 일을 만나면 힘을 하나로 합쳐 각자 극진히 하면서 절대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습관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인황(人皇)이 이것을 이용하여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고, 히데요시(秀吉)가 이를 이용하여 천하에 막강한 구적(寇賊)을 만들었다. 이에야스(家康)가 이들을 부림에 이르러서는 또한 각기 정해진 분수를 지켜서 고요하고 소란이 없었다. 만일 두터운 덕과 넓은 도량을 가진 자가 있어 몸소 실천하면서 이끌어 나간다면 안정된 정치는 손바닥을 움직이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92)원중거, 『화국지』 천권, 인물(人物).

이어 원중거는 일본인들의 검소한 의식(衣食) 생활과 근면성을 지적하면서 천하에서 일본만 한 곳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체상의 특징, 목욕 등 청결함, 정리 정돈하는 습성, 체질과 품성의 맑음 등을 소개하면서 이는 태양과 가까운 지세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맑음이 너무 승(勝)해서 탁(濁)함이 적고, 혼(魂)은 여유가 있으나 백(魄)이 부족한 까닭으로 중화로 나아가지 못한다.”라고 하여 그것이 기질적인 한계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의 일본인을 묘사한 것이지만, 오늘날 적용한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로 타당성이 있는 논의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일본인론으로는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객관적이다. 그는 일본 이적관을 청산한 후 일본인의 장점을 높이 평가한 동시에 한계성을 지적하였다.

원중거는 일본인의 성격이 개인적으로는 순하고 유약하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전통적인 조선인의 일본인관, 즉 ‘잘 속이며’, ‘용맹하 고’, ‘목숨을 가벼이 여기며 사람을 잘 죽이는(輕生好殺)’ 등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다. 이에 대해 원중거는 기존의 일본인관은 임진왜란 때 형성된 것이며, 이는 대부분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한 관념으로 도쿠가와 막부 출범 이래 16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일본인들은 크게 달라졌다고 설명하였다.93)원중거, 『화국지』 천권, 풍속(風俗), 관백지치(關白之治). 그는 도쿠가와시대가 오랫동안 평화로운 이유가 이에야스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성격이 유약하고 오랜 전란 끝에 평화를 원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실제 원중거가 갔을 당시 일본은 평화를 구가(謳歌)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만났던 인사는 거의 유학자, 문사, 승려 등 글을 다루는 사람들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의 문화에 관심과 존경심을 가진 무리였다. 그들과 교유하면서 기존의 일본인관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94)필담 창화 시 일본인의 공손한 태도와 성의를 다해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원중거는 “부드럽고 인자하여 부녀자들의 어짊이 있다.”고 하였다(원중거, 『승사록』 권4, 갑신년 6월 14일조). 원중거의 이러한 견해는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제 오늘날 일본인을 개인적으로 접할 때 누구라도 처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일본인의 집단적 순응성과 단결성을 들면서 지도자로서 ‘통치하기 쉬운 백성’이며, 유사시에 무섭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동감이 가는 설명이다.

루스 베네딕트(Ruth F. Benedict, 1887∼1948)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은 국화를 가꾸는 섬세하고 여린 성품과 공격적이고 사나운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적한 바 있다. 왜구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인들의 전통적인 일본인관에는 주로 ‘칼’적인 측면이 정착되었다면, 원중거는 ‘국화’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원중거의 이러한 관념은 사행을 하면서 얻은 제한된 체험에서 나온 결론으로, 전체적인 일본인 상(像)으로 일반화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임진왜란 이후 침략자와 약탈자로서 고정 관념화된 일본인관이 당시에도 그대로 정확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느 것이나 일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원중거의 일본인관은 주목할 만하며 나름대로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후 150여 년간에 걸친 선린(善隣) 외교와 통신 사행을 통한 문화 교류의 효과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당시 일본의 정치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다. 원중거는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방식에 대해 “그 첫째는 무력이요, 둘째는 법률, 셋째는 지략, 넷째는 은의(恩義)”라고 하였다. 또 도쿠가와시대가 200여 년간 승평(昇平)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막부의 간결함, 검소함, 공손함 위에 국민들이 유약하고 수백 년간의 전쟁을 겪은 후 평화를 원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95)원중거, 『승사록』 권4, 갑신년 6월 14일조. 그는 대체적으로 막부의 통치와 당시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형법과 무력에 의해 운용되는 막번 체제가 위기 상황에 처하면 일거에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일본 정치 상황의 장래를 불투명하게 전망하였다.96)원중거, 『화국지』 천권, 무주본말. 그가 본 도쿠가와 막부의 위기 요인은 반막부적(反幕府的)인 지방 세력과 명분론의 고양에 따른 ‘존왕 운동(尊王運動)’ 가능성의 두 가지였다. 특히 일본의 문운(文運)이 날로 번성함에 따라 백성들이 의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이것이 존왕 운동으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천황(天皇)이 비록 실권을 잃었지만 만세 일계(萬世一系)를 유지하면서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또 군신(君臣)의 명분은 천지간의 정해진 자리로서 수천 년간 찬탈(簒奪)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다. 에도 막부의 정치가 혹 어지러워지면 명분론자들이 여러 주에서 일어나 천황을 끼고 쟁탈하고자 하는 일이 다시 나오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일본 국내에 혼란이 오면 변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기회를 틈타 우리나라를 침략해 올 것이니 식견 있는 자는 마땅히 알아서 대비해야 할 것이다.97)원중거, 『화국지』 천권, 왜황본말(倭皇本末).

당시 천황과 막부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 여하에 따라서 존왕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았다. 원중거가 본 막번 체제의 위기적 요인과 그에 따른 전망은 매우 예리한 점이 있다. 그의 논평을 보면 유학자로서의 명분론과 무가(武家) 및 법가(法家)에 대한 근원적인 반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당시 막부와 다이묘의 세력 관계와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또 결과적으로 보면 막부 말기 존왕 토막 운동(尊王討幕運動) 당시의 세력 구도를 정확하게 예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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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도병풍(江戶圖屛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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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일본의 경제와 사회상에 관한 인식이다. 원중거는 당시 일본 경제의 발전상에 감탄하면서 그 장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살피고자 하였다. 그는 사행 시 관찰한 일본의 경제상에 대해 “에도까지 천리를 왕래하는데 명도(名都)와 대읍(大邑)이 아닌 곳이 없었다.”고 하면서 에도,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등 대도시의 발전상을 지적하였다.98)원중거, 『승사록』 권3, 갑신년 3월 28일조. 또 국내 상업의 활성화와 함께 나가사키(長崎)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 무역으로 경제력이 풍부하다고 소개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일본의 토지 사용과 농사 방식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아울러 농촌에서 잠직(蠶織)과 농업을 겸업하는 방식을 조선과 비교하면서 일본인의 근면성과 농업의 효율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원중거는 일본 사회의 기본 성격을 형벌과 법에 의해 세워졌으며 막부 가 실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무가 사회(武家社會)라고 보았다. 조선이 유가적(儒家的) 문치주의(文治主義) 사회인 데 비해 일본은 중국 진(秦)나라와 비슷한 법가적(法家的) 무치주의(武治主義) 사회로 인식하였다. 또 그는 조선과 다른 일본 사회의 특징적인 제도와 인식에서 조선은 사(士)-농(農)-공(工)-상(商)이지만 일본은 위(位)-상(商)-공(工)-농(農)이라는 대조적인 측면에 주목하였다.99)원중거, 『화국지』 천권, 무주본말. 여기서 관위자(官位者)는 무인이며, 특히 문사의 지위가 하류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와 함께 원중거는 일본 사회 운영 방식의 특징으로 세습제에 주목하였다. 그는 일본 사회에서 위로는 제후에서 아래로는 농·공·상인들까지 모두 직업을 세습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습제에 대해 그는 사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장점을 인정하기도 하였지만, 아무리 용맹과 재주가 있어도 상·공·농인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그 뜻을 펴지 못한다고 하면서 폐쇄성을 비판하였다.100)원중거, 『화국지』 천권, 무주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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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창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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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일본 문화에 대한 인식과 전망이다. 원중거는 사행 시 각지의 많은 인사와 시문을 창수하고 필담을 나누었다. 그는 교유할 때 시문 창수보다 필담을 중시하였다. 일본인에게 한시의 교양을 과시하는 것보다 필담을 통해 양국의 실정을 알고 진정한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담을 나눈 주제는 과거제(科擧制), 교육 제도, 부녀 재가(婦女再嫁), 양자 제도 등 여러 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문, 조선의 의학과 음악, 관혼상제(冠婚喪祭)의 풍속, 조선과 일본 불교의 차이점, 일본의 물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이와 같은 원중거의 진실한 태도로 일본 문사들의 평가도 좋았으며, 스스로도 문화 교류의 성과에 자부심 을 나타냈다. 실제 그는 필담과 창수를 통해 일본 문사들과 깊은 인간적 교감을 나누었다. 사행을 마무리하는 귀로의 배 위에서 그는 에도의 명사들이 시나가와(品川)에서 눈물을 흘리며 작별한 것과 오사카의 문사들이 찻집에서 소리를 삼키며 고별한 것을 떠올리며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고 회상하였다.

원중거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일본의 유학이었다. 그는 일본의 유학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주자학적 입장에서 평가하였다. 대신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와 오규 소라이 같은 고학파 유학자는 ‘이단’으로 보았다. 이는 ‘주자학의 전도사’를 자임하였던 원중거로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오규 소라이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지만은 않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중거는 처음 오규 소라이에 대해 몹시 부정적이었으나 그의 문집을 읽은 후에는 바뀌었다. 즉, 그가 남다른 재주가 있으며 그의 학설이 당시 일본 국내를 풍미하였고, 또 문장과 학술 방법 등에서 일정한 경지를 얻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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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문에 대해 원중거는 고대의 시인부터 사행 시 만나 본 문사에 이르기까지 각자에 대해 논평하였는데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당시 일본 문장계의 상황에 대해 그는 “나가사키의 책이 통하게 됨에 따라 집집마다 책을 읽고 사람마다 붓을 잡으니 십 수 년이 지나면 아마도 오랑캐라고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나라 안 사람들이 총명하고 조숙(早熟)하며 일찍부터 시를 배워 시문이 성행하니 가히 바다 가운데 문명의 터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라고 하면서 일본 문화의 발전상과 장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였다.101)원중거, 『화국지』 인권, 시문지인(詩文之人).

당시 통신사행의 정사였던 조엄이 “일본의 학술은 긴긴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문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경이라 할 수 있다.”라고 평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102)조엄, 『해사일기』 갑신년 6월 18일조. 일본의 이단학(異端學)을 비판하고 정학(正學)을 지켜 나 갈 책임이 조선에 있다고 자부한 점에서는 둘 다 마찬가지이지만, 일본 문화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인식은 판이하다. 일본 문화에 대한 원중거의 이러한 인식은 그 후 조선 지식인의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인다. 이덕무,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하여 정약용, 김정희의 일본 문화관이 원중거의 그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103)하우봉, 『조선 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19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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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도해선도(信行渡海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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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통신사행의 문제점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한 점이다. 원중거는 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현해탄의 배 위에서 전체 일정을 회상하면서 통신사행의 현상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선 통신사행의 의의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교린의 의의를 말하고 국서와 예물로써 수호하여 양국의 기쁨을 맺고 누세(累世)의 우호를 두텁게 함으로써 의심과 시기함을 없애고 변방 영토의 평안을 얻는 점. 둘째, 일본의 지세와 풍속을 살피고 정령(政令)과 서적 등을 견문하여 유사시 기미를 알아 조치할 수 있는 점. 셋째, 쓰시마 섬 사람의 간계와 횡포를 막부가 모르는데 통신사행을 통해 폐해를 알리고 막을 수 있다는 점. 넷째, 조선의 주즙(舟楫) 사용법이 본래 소홀하고 대해풍도(大海風濤)를 겪은 경험이 없는데 통신사행을 통해 익숙해질 수 있다는 점. 다섯째, 사행의 문화 교류를 통해 일본이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알게 되면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변경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점이다.104)원중거, 『승사록』 권4, 갑신년 6월 14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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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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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중거는 당시 통신사행의 실제 상황과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밝히기도 하였다.

매번 통신사행이 있을 때마다 쓰시마 섬 사람은 재물을 얻고 관백(關白)은 명분을 얻으며 그 나라 사람은 관광하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에 비해) 우리는 마상재(馬上才)로써 재주 부리고, 문사는 그들에게 실없는 짓을 희롱하며, 복장으로써 장식하고 생황과 피리로 분탕(焚蕩)하게 하여 그들에게 한 마당 놀이의 도구를 제공할 따름이니 이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지금 그 나라의 문기(文氣)가 날로 올라가고 지식이 개명하여 이를 비웃는 자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105)원중거, 『승사록』 권3, 갑신년 5월 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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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마도 부분-말 위에 서서 달리기(走馬立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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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마도 부분-옆에 매달리기(左右超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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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8세기 후반 당시 퇴색해 가는 통신사행의 실상을 꼬집은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는 사행 초기 문화 교류를 통해 일본인을 교화하겠다는 기개를 가졌지만 실제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매우 실망하였던 듯하다. 당시 일본 국내에는 이미 통신사행의 의미와 문화 교류에 대한 비판, 비용 절감을 위한 대책 등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원중거가 알았을 리 없겠지만 통신사행의 문제점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원중거는 통신사행의 개혁안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사행 인원의 대폭 감축이다. 원중거는 통신사행을 폐지할 수 없다면 조선에서 절목(節目)을 구성한 다음 일본으로 보내 증감(增減)하여 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안으로 삼사는 정·부사만으로 하고, 사행선은 여섯 척에서 세 척으로 하며, 수행 인원은 200명 이내로 줄여야 하고,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육로로 가는 인원은 100명이면 된다고 하였다. 둘째, 교역 물자의 제한이다. 상역(商譯)을 세 명 이내로 하고, 사신의 처소에 섞이지 않도록 하며, 수입 물자는 구리, 뿔, 호초(胡椒) 등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행 인원을 줄이고 교역을 제한하면 일본도 기뻐할 것이고 조선도 일과 경비를 절감할 수 있어 통신사행의 폐가 오래도록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사행원의 역할 조정과 선발 기준에 관한 제안이다. 그는 삼사, 문사, 군관, 역관, 양의 등 주요 역할을 하는 사행원의 선발 기준과 사행 시 행동 수칙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꼼꼼히 제시하였다.106)원중거, 『승사록』 권4, 갑신년 6월 14일조. 넷째, 문화 교류의 정비이다. 원중거는 기본적으로 시문 창수보다 필담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난잡한 시문 창수 방식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에도의 예에 따라 각 주의 태수가 미리 그 지방의 문사를 선발하고 한자리에 창수인이 다섯 명을 넘지 않도록 하면 위엄도 갖추고 준비도 간편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창수 시 폐물(幣物)도 일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7)원중거, 『승사록』 권3, 갑신년 5월 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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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주교도(越川舟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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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원중거의 개혁안은 직접 체험한 데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지금까지 통신사제 개혁에 대해서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나카이 치쿠잔(中井竹山) 등 일본의 경비 절감책과 역지 통신(易地通信) 방안만 알려져 왔는데, 조선에서도 나카이 치쿠잔보다 앞선 시기에 통신사행의 규모 축소를 통한 경비 절감책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원중거의 통신사제 개혁안은 매우 흥미롭다. 성호(星湖) 이익도 통신사행에 대 한 개혁안을 제시한 바 있지만, 원중거와 달리 통신사행의 정례화와 문화 교류의 확대를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원중거는 사행 인원의 감축뿐 아니라 문화 교류에 대해서도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대조적이다. 실제 원중거가 수행한 1763년(영조 39)의 계미 통신사행은 혼슈까지 간 마지막 사행이 되었고, 다음 사행은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한 후 1811년(순조 11) 쓰시마 섬에서 축소된 형태로 거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원중거의 개혁안이 상당 부분 현실화된 셈이다.

지금까지 『승사록』과 『화국지』를 통해 살펴본 원중거의 일본 인식에 나타나는 특징과 의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중거의 일본 이해 수준이 매우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화국지』는 조선 후기 통신사행원의 일본 인식 가운데 최고봉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150여 년간에 걸친 일본 이해의 축적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데에는 그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사행을 떠나기 전에 ‘신행 편람’을 만드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하였고, 호행 문사(護行文士)를 비롯한 일본 인사와의 필담을 통해 많은 견문을 할 수 있었다. 귀국 후 『화국지』를 저술할 때에는 조선 서적과 비교 검토하고, 이덕무 등 학자들과 토론하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화국지』에서는 기존의 사행 일기가 지니는 ‘주관성’과 국내에서 서적만을 참고하여 저술한 기록의 ‘간접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원중거의 일본 민족관이나 문화관 등에는 새롭고 독특한 요소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또 일본의 국내 정세에 관한 진단과 전망, 쓰시마 섬 대책과 통신사제 개혁안 등 대일 정책 면에서의 제안도 선구적이며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이러한 원중거의 일본 인식은 북학파(北學派) 실학자 또는 연암 일파의 일본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 실학자들의 일본 인식을 살펴보면 원중거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정약용, 김정희의 일본 문화 전반에 관한 평가를 보면 원중거가 말한 바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원중거가 교유한 이가환, 박제가와 가깝게 지냈으며, 김정희는 당색(黨色)과 학맥(學脈)으로 볼 때 연암 일파의 영향권에 있었던 인사였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원중거의 일본 문화관과 일본 정세에 대한 전망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조선 지식인의 일본관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원중거의 일본 인식에는 몇 가지 한계성도 있다. 첫째, 그는 주자 성리학에 입각하여 일본을 교화한다는 명분론적 또는 문화 우월적 인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선입관 때문에 일본의 고학파 유학에 대한 인식에도 일정한 편향성을 보여 주었다.

둘째, 일본 정세의 전망에는 주자학자로서의 명분론이 상당히 작용하였다고 보인다. 일본 문화의 발전에 따른 의리 명분론의 강화, 그에 따른 존왕 운동의 전개라는 시나리오는 일면 적중한 것도 있지만 틀린 부분도 있다. 존왕 운동의 이념은 주자학 외에 국학(國學)이라는 요소에 의한 것이 많았고, 그것이 막부 타도 운동으로 발전한 데에는 서양이라는 변수도 작용하였다. 물론 당시 원중거에게 이러한 것까지 기대하기는 무리이지만 일본의 국학과 난학(蘭學)이라는 또 다른 흐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가 없었다. 또 문화 발전에 따른 침략 가능성의 배제라는 것도 유학자 특유의 우활(迂闊)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도쿠가와 막부와 쓰시마 섬, 혼슈 사람과 쓰시마 섬 사람에 대한 인식에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경향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서는 어설플 정도로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쓰시마 섬에 대해서는 ‘양국의 적’이라고 할 만큼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원중거의 쓰시마 섬 대책에서 막부가 쓰시마 섬을 제압하면서 조선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해 줄 것이라고 예상한 점은 안이한 인식이다. 또 혼슈 사람에 대한 인식도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제한된 체험에서 비롯된 일면성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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