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3. 조선 후기 대외관의 전개 양상
  • 18세기 근기 남인계 실학파의 대외관
하우봉

18세기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평화가 정착되었다. 삼번(三藩)의 난(1673∼1681)을 진압한 청나라는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조일 관계도 안정되었다. 이 시기 청나라의 발전상은 부경사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고,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도 전래되었다. 그런데 당시까지도 조선은 반청 북벌론과 자존적인 소중화 의식 때문에 중국 문화를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현실과 괴리된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의 국제적·국내적 모순에 대해 내부적으로 반성이 일어났다. 이는 명분론에서 벗어나 국제 정세를 현실적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 일부 실학자로부터 출발하였다.

18세기 들어와서 대외관의 변화는 청조 긍정론(淸朝肯定論)으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을 선도한 사람은 실학자 이익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당시까지 명나라의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하는 관습에 대해 “이는 비단 가문의 우환이 될 뿐 아니라 장차 반드시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 다.”라고 하면서 통렬히 비판하였다.112)이익(李瀷),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全集)』 권28, 답이여구(答李汝久). 또 그는 명나라가 망한 이유에 대해서도 내정이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역대 중국 왕조 가운데 명나라가 결코 훌륭한 왕조가 아니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숭명 반청(崇明反淸)의 고정 관념과 대명 의리론을 청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청나라 지배의 중국을 중화 문명과 동일시함으로써 청이적관(淸夷狄觀)을 청산하였다.113)이익,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권8, 화이지변(華夷之辨) ; 이익, 『성호사설』 권12, 인사문(人事門), 만력은(萬曆恩). 이것은 북학론의 논리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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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외기』
『직방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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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익은 서학(西學) 연구를 주도하였다. 17세기 초반부터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래된 서학서(西學書)는 주자학 일존주의(一尊主義)의 조선 사회에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특히 『직방외기(職方外紀)』, 곤여도설(坤輿圖說) 같은 세계 지리서와 세계 지도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커다란 변혁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후기의 서학 연구는 성호 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익의 문하(門下)에서는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가 ‘서실의 애장품(書室之玩)’이 되고114)안정복(安鼎福), 『순암집(順庵集)』 권17, 천학고(天學考). 서학서를 보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로 성행하였다.115)『정조실록』 권46, 정조 21년 6월 경인. 특히 이익은 한역 서학서 30여 종을 독파하고 ‘발천주실의(跋天主實義)’, ‘발천문략(跋天問略)’, ‘발직방외기(跋職方外紀)’를 짓는 등 서학을 학문적 연구 수준으로 높여 ‘조선 서학의 종장(宗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116)이원순, 「성호 이익의 서학 세계(西學世界)」, 『교회사 연구』 1, 교회사 연구소, 1977.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서양 천문학의 지구설(地球說)을 확신하였으며,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바탕을 둔 중화주의적 화이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익은 “지금 중국은 대지 가운데 한 조각 땅에 지 나지 않는다.”라고117)이익, 『성호사설』 권2, 천지문(天地門), 분야(分野). 하였다. 지구가 모난 대지가 아닌 둥근 공처럼 생긴 것이라는 사실의 확인은 나라 간의 내외(內外), 상하(上下) 관념의 상대화를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이익은 조선이 유일한 중화라는 인식을 부정하였다. 누구든지 예악(禮樂)을 갖추면 중화가 될 수 있으므로 우리만이 유일한 중화가 될 수는 없으며,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그러하다고 보았다.118)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7, 답안백순기묘(答安百順己卯). 나아가 그는 “중국(夏)을 귀히 여기고 동이족을 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119)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5, 답안백순문목(答安百順問目). 하여 전통적인 화이관과 소중화 의식을 부정하였다. 청나라와 서양에 대한 이적관을 청산한 이익은 일본에 대해서도 재인식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로써 이익은 당시 사상적으로 일종의 금기에 해당하였던 청나라, 일본, 서양에 대한 고정 관념을 타파하여 인식의 지평 확대를 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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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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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도 이익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화이관 극복에 진전을 보였다. 그는 천원지방설에 바탕을 둔 중국 중심의 천하 사상과 화이관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나아가 그는 중(中)과 동(東)은 단지 방위를 나타내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중심과 주변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모든 나라가 다 중국이 될 수 있으니 중국은 없다고도 하였다.120)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3, 송한교리치응사연서(送韓校理致應使燕序). 이름을 붙이자면 만국 중화론(萬國中華論)이라 할 수 있는데 실로 단호하면서도 통쾌한 선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화인가? 그는 “중국과 이적의 구분은 그 도(道)와 정(政)에 있지 강역(疆域)에 있지 않다.”라고121)정약용, 『여유당전서』 권12, 탁발위론(拓跋魏論). 하였다. 여기서 도란 구체적으로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학문이고, 정이란 요(堯)·순(舜)·우(禹)·탕(湯)의 정치로서 요컨대 ‘성인(聖人)의 법’이다. 이와 같이 그는 지리적·종족적 차원의 화이관을 부정하고 문화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화이관을 내세웠다.

또 그는 동이 문화(東夷文化)에 대한 재인식을 주장하였다. 역대의 동이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통치한 역사를 열거하면서 동이족을 어질고 선하다고 평하였다. 더욱이 조선은 정동(正東)에 위치하면서 문(文)을 중시한 군자의 나라로서 중화라고 하였다.122)정약용, 『여유당전서』 권12, 동호론(東胡論). 정약용이 동이족을 자처하면서 중화를 건설하였다고 한 것은 기존의 중화주의적 화이관은 물론 17세기 이래의 독존적인 조선 중화 의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냉소하는 여유와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근기 남인계 실학자인 이익과 정약용은 강한 문화 자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17세기 노론계의 소중화 의식처럼 유아독존적이거나 폐쇄적이 아니고 각 나라와 문화의 상대성과 대등성을 인정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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