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3. 조선 후기 대외관의 전개 양상
  • 북학파 실학자의 대외관
하우봉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노론 낙론계(洛論系)의 신진기예로서 모두 사행을 통해 청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조선의 상대적 낙후성을 인식하면서 세계관의 전환과 북학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화이관을 극복할 때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룩한 사람은 홍대용이었다.

확대보기
홍대용 초상
홍대용 초상
팝업창 닫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애당초 송시열 계열을 계승한 정통파 주자학자로서 대명 의리론과 반청 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35세 때인 1765년(영조 41) 부경사를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오면서 철학 사상과 대외 인식이 크게 변하였다. 그의 화이관 극복 과정은 사행 이후 많은 고뇌와 논리적 전환을 거쳐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최종적 결론에 다다랐다. 이러한 전환은 노론계의 다른 유파와 같이 단계적 변화 가 아니라 자연 과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의 확립에 의해 가능하였다.

확대보기
홍대용의 편지
홍대용의 편지
팝업창 닫기

홍대용은 “중국은 서양에 대하여 경도(經度)의 차이가 180도에 이르는데, 중국인은 중국을 정계(正界)로 여기고 서양을 도계(倒界)로 여긴다. 서양인은 서양을 정계로 여기고 중국을 도계로 여긴다. 사람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곳이면 모두 그곳을 정계라 하는 것이니 실은 횡계(橫界)도 없고 도계도 없으며 모두 정계인 것이다.”라고123)홍대용(洪大容), 『담헌서』 권4, 의산문답(醫山問答). 하여 기존의 중화주의적 화이관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상과 하, 정계와 도계 같은 차등 관념을 부정하고 ‘모두 다 같은 정계(均是正界)’라는 혁명적 세계관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지구설(地球說)뿐 아니라 지전설(地轉說)을 확인한 과학적 세계관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는 또 기존에 오랑캐라고 불리던 민족이 세운 국가와 독특한 풍속에 대해서 ‘모두 같은 사람(均是人)’, ‘모두 같은 군왕(均是君王)’, ‘모두 같은 나라(均是邦國)’, ‘모두 같은 풍속(均是習俗)’이라고 하여 다원성과 독자적 가치를 옹호하였다. 나아가 그는 “하늘에서 보면 어찌 안과 밖의 구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각 나라마다 그 백성을 사랑하고 그 군주를 존중하며 그 나라를 수호하고 그 풍속을 편안해 한다는 점에서 화와 이는 마찬가지이다.”라고124)홍대용, 『담헌서』 권4, 의산문답. 선언하였다. 각국이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을 존중해야 하며 여기에 내외와 화이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역외 춘추론(域外春秋論)’으로 이어졌다. 역외 춘추론은 ‘중화 문화=중국, 한족(漢族)’이라는 등식에 대한 부정이었다. 즉, 중국인이 화(華)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으로 문화 가치의 상대화를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홍대용은 기존의 화이관에서 탈피함으로써 각 나라와 문화의 대등성과 독자성을 확보하였다. 이런 개방적인 관점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문물을 똑바로 볼 수 있었고, 청나라 문물의 장점을 수용하자는 논리를 도출할 수 있었다. 17세기의 소중화 의식이 ‘조선=중화, 청나라=이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데 비해, 그는 ‘조선=이적, 청나라=이적’이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화와 이가 하나이다(華夷一也)’라는 입장에서 기존의 소중화 의식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지계상으로 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소중화 의식에 대한 궁색한 논리를 배제하고 그 구분 자체를 무의미화해 버리는 것이었다.

홍대용의 국제 관념은 그의 우주관만큼이나 스케일이 크고 선명하였다. 우주 무한이라는 광대한 인식 속에서 지구 중심설이나 차등적 국제관이 부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전 우주적인 동일성의 논리 위에서 ‘인간과 자연이 같다(人物均)’, ‘화와 이가 하나이다’라는 혁명적 선언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조선과 청나라, 일본, 서양은 각기 대등한 주체로 독자적인 문화 가치를 지닌 존재로 설정되는 것이다.

확대보기
박지원 초상
박지원 초상
팝업창 닫기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비현실적인 소중화 의식과 북벌론을 부정하고 북학론을 제시하였다. 그 또한 천원지방설을 비판하면서 땅이 둥글고 스스로 돌기 때문에 ‘중국=중심, 타국=주변’이 아니며, 내외의 구별이나 화이의 구분은 없다고 보았다.125)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곡정필담(鵠汀筆談). 나아가 “어찌 유독 중화에만 군주가 있고 이적에는 군주가 없겠는가. 천지는 넓고 넓어 한 사람이 홀로 지배할 수 없고, 우주는 넓고 넓어 한 사람이 오로지할 수 없다. 천하는 천하인의 천하이지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라고126)박지원, 『열하일기』, 구외이문(口外異聞). 하여 중화주의적 화이 관념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그는 “진실로 법이 좋고 제도가 훌륭한 것이라면 이적이라 하더라도 나아가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라고127)박지원, 「북학의서(北學議序)」, 『북학의(北學議)』 하여 북학론을 제창하였다.

확대보기
『북학의』
『북학의』
팝업창 닫기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가장 적극적으로 북학론을 강조한 인물이다. 그는 이용후생의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진보를 인정하면서 ‘힘써 중국을 배우자(力學中國)’라고 주장하였다.128)박제가, 『북학의』, 존주론(尊周論). 청이적관에서 탈피한 그는 이용후생을 위해서 과학 기술에 정통한 서양 선교사를 초빙하여 기술을 도입하자고 제안하였으며,129)박제가, 『북학의』, 부병오소회(附丙午所懷). 국부(國富) 증진을 위해서는 청나라, 일본, 류큐(琉球), 서양 제국과 통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0)박제가, 『북학의』,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

확대보기
실학파의 대외관
실학파의 대외관
팝업창 닫기

박지원과 박제가의 북학론은 허구적인 소중화 의식과 조선의 낙후된 현실 비판에서 출발하여 화이관의 부정으로 연결되었다. 북학파는 서양 과학을 북학의 대상에 포함시켰으며 서양을 중국과 같은 또 하나의 문명 세계로 인식하였다. 서양은 과학이 발전한 이용후생의 선진국 이고, 경제가 발전하여 교역 통상할 만한 나라로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정계(正界)’이며 ‘이적 금수(夷狄禽獸)’는 아니었다.

18세기 실학자는 17세기 노론계를 중심으로 제기된 자존적인 소중화 의식을 극복하고 좀 더 체계화된 조선 중화주의로 발전하거나 문화주의적 화이관으로 대외를 인식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이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적 국제 질서 관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청조 긍정론에 이은 북학론, 서학 연구, 일본에 대한 재인식도 모두 전통적 화이관을 극복한 바탕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