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3. 조선 후기 대외관의 전개 양상
  • 조선 후기 대외관의 성격과 의의
하우봉

조선 후기 사상적 흐름의 주류는 주자학 일존주의의 강화, 즉 조선 성리학의 심화 및 교조화라고 할 수 있다. 대외관은 자존적인 소중화 의식을 확립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자아 인식을 전기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임진왜란을 통한 일본의 무력적 위세의 확인, 여진족의 통일과 청나라의 건국 및 중원 통일, 두 차례의 호란(胡亂) 등 국제 정세의 변동이 있다. 이에 따라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사대교린(事大交隣) 체제가 붕괴되면서 조선의 대청·대일 외교 체제의 변동이 이어졌고, 대외관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17세기 전반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극단적인 화이준별론(華夷峻別論)이 강조되면서 외래 문화와 민족에 대해 배타적 인식이 심화되었다. 조선 전기의 소중화 의식이 조선 중화주의 의식으로 더욱 강화되면서 수용 대상으로서의 청나라, 경쟁 대상으로서의 일본, 새로운 문명권인 서양을 모두 문화 교류와 수용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것은 주변 국가를 ‘타자화’하는 것을 넘어서 타자를 제외시켜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조선 중화주의론은 문화주의적 화이관의 논리를 취하 고 있지만, 중화적 세계관을 조금 변형한 형태로 중세적 문화 보편주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중화적 화이관은 물론 조선 후기의 소중화 의식도 근대적인 민족의식이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17세기의 소중화 의식은 당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자체 논리의 진행 과정이었고, 나름대로 긍정적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 이후에는 사상적 기능이 다하였는데도 발전적으로 극복되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결국 민족적 자아에 대한 각성은 중화적 화이관의 극복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18세기 중반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학파의 대외관은 문화주의적 화이관과 조선 중화론의 세련화, 화이관의 탈피라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이 제시한 대외관은 각국의 개체성과 대등성을 인정하면서 조선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띠었다. 근대 민족주의를 ‘국제 사회에서의 자민족에 대한 대등 또는 우월한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과 나라 간의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정의한다면,131)Hans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Toronto : Collier-Macmillan, 1944, p. 263 실학자들의 대외관은 이 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살학파의 대외관에도 한계가 있다. 첫째, 논리적으로 화이관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중화주의적 화이관의 지리적·종족적 폐쇄성과 소중화 의식의 비현실성을 타파하였지만 문화주의적 화이관까지는 부정하지 못하였다. 문화주의적 화이관은 보편성을 가진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형식 논리상으로 ‘화(華)’와 ‘이(夷)’라는 차등 관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완전히 평등한 세계관은 아니었다. 또 실학파 가운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조공 체제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이는 그들이 지닌 대외 인식의 관념성을 드러내 주는 측면이다. 그들 역시 문화 면에서의 자존 내지 우월 의식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둘째, 실학파의 대외관이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실학자들은 소중화 의식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였으나 주류 측의 인식과 대세를 바꾸지 못하였다. 19세기에 들어 북학론이 집권 관료층에서 일반화되었지만 18세기 말 북학파 실학자들이 주장하였던 대등성과 독자성을 상실한 채 사대 수구(事大守舊)의 논리로 오히려 퇴행(退行)하였다. 화이관에 대한 전면적 극복은 최한기(崔漢綺, 1803∼1877)를 거쳐 개화파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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