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4. 실학파의 일본 인식
  • 안정복, 명분론적 입장에서 일본을 논하다
하우봉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영·정조대를 살았던 인물로 본관은 경기도 광주이고 기호계 남인이다. 그는 박학(博學)하여 성리학뿐 아니라 역사, 기술학, 불교, 도교, 병학(兵學), 방술(方術)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고 한다. 30대 이후 광주 지역의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실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35세 되던 해 이익을 찾아가 만난 이후부터 그를 사숙(私淑)하였다. 이후 이익이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서신을 교환하면서 스승의 실학적인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았다.

안정복은 이익과 역사 서술 문제에 관한 서신을 교환하면서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술을 전후하 여 일본의 역사, 지리, 조일 관계사 등에 대해 스승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아울러 일본 서적, 표류인 일기, 일본 지도 등을 교환하여 보기도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안정복은 일본에 대한 이익의 지식과 인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 그가 통신사행원들에게서 일본 소식을 접하고 일본 서적을 얻어 보았던 것도 그의 일본 인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748년(영조 24) 통신사행의 종사관 조명채(曺命采)와 서기 유후를 통해 일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통신사행원 이외에도 가깝게 교유하던 이맹휴에게서 일본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안정복이 일본에 관해 체계적으로 저술한 것은 없지만 『동사강목』, 『열조통기(列朝通紀)』, 『동사외전(東史外傳)』 등의 사서와 『잡동산이(雜同散異)』,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등에 단편적이지만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동사외전』에서는 「일본전」과 「대마도전」을 두어 상세히 서술하였다. 『동사외전』은 현재 전하지 않아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가 이익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동사강목』을 보완하는 사서로 기전체(紀傳體)의 열전(列傳)에 해당하는 체재를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내용은 주변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외이열전(外夷列傳)’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신에 따르면 「발해전」, 「여진전」, 「일본전」 등이 있으며, 쓰시마 섬은 「부용전(附庸傳)」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안정복은 역사 인식과 서술에 홍여하와 이익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일본관은 이익과 대조적인 면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안정복의 저술을 통해 본 일본 인식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정복이 일본을 연구한 동기는 정치적·군사적 차원에서의 대책을 마련해 보고자 하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의 일본에 관한 저술 가운데 특히 정채(精彩)를 발하는 분야는 조일 관계사 및 그와 관련한 일본의 역사, 지리에 대한 연구이다. 크게 보면 그것도 일본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대책 수립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안정복의 일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정치적·군사적 실무 차원에서 대응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일본 국내의 정치 정세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가 일본 정치에서 주목한 것은 당시 실권자인 막부 쇼군과 천황의 이원적 권력 관계의 구조와 권력의 실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원적 권력 구조를 둘러싼 양자의 갈등과 그것 때문에 장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정치적 변혁을 예측하는 데에 힘썼다. 그는 천황과 막부 쇼군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상술한 다음 비록 힘 없는 존재지만 천황이 가지는 정신적 권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며, 천황과 막부 쇼군의 권력 관계가 앞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나라가 동쪽의 막부와 서쪽의 조정이 서로 원수가 된 것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어찌 충신의사(忠臣義士)가 분통함을 품고 왜황의 지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일 우리가 천시(天時)와 인화(人和)를 얻어 나라 안의 정치에 여유가 있고 국방에도 어려움이 없어진다면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충분히 요량(料量)한 후 막부 쇼군에게 글을 보내 군신의 대의로 권력을 내놓게 하고 (왜황을) 복위(復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놀라고 나라 안이 모두 흉흉해질 것이다. 또 규슈(九州)와 혼슈(本州) 안에 격문(檄文)을 전하면 따르는 자가 반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막부 쇼군의) 죄를 토벌하고 그 명분을 바르게 하면 이것은 천하의 의거(義擧)로 이른바 한 번 힘써 영원히 편안케 하는 계책이 될 것이다.145)안정복,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권19, 왜국지세설(倭國地勢說).

즉, 천황과 막부 쇼군의 권력 관계가 향후에 변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이익과 같았으나 대처 방식에는 차이를 보인다. 당시 상대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던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의 복위를 도모하는 사람들을 충신의사라고 하며, 심지어 그들의 왕정복고(王政復古) 운동을 조선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본의 사회 상황과 정치 정세에 대한 그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천황 주위 세력의 반(反)조선적 성격은 잘 모르고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판단한 데서 나왔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안정복은 조선 국왕과 일본의 막부 쇼군이 동격으로 교류하던 당시 외교 의례를 부당하다고 비판하였다.146)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5, 답안백순문목. 나아가 그는 일본 국내 정세의 변동이 생길 경우 이 때문에 외교적 분쟁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일본의 법은 왜황이 편히 기생(寄生)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천하의 사변은 정해진 형태가 없으며 오랑캐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는 일정한 운수가 없다. 만일 왜황이 우문옹(宇文邕, 북주(北周)의 무제)처럼 처음에는 재주를 숨기고 있다가 끝내는 권세를 잡게 되든지, 혹은 관백(關白, 막부 쇼군)이 스스로 황제가 되고 그 신하를 관백으로 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그때에 이르러 전날 잘못된 관례(貫例, 조선 국왕과 막부 쇼군의 대등 의례)를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147)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5, 답안백순문목.

이익도 안정복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간양록』과 아들 이맹휴의 말을 인용하면서 공감을 표하였다. 이익과 안정복의 이러한 우려와 예측은 100년도 못 되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현실화되었다. 안정복의 일본 정세에 대한 관점이 단순히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것인지, 아니면 정확한 판단 결과인지 단언하기 어려우나 그의 우려와 예측이 실제화되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안정복의 일본 민족관은 조선 중심의 화이관에 바탕을 두고 일본을 이적시하였다. 그는 일종의 ‘외이 열전’적 성격을 띤 『동사외전』에 「일본전」을 수록하였고, 쓰시마 섬은 「부용전」에서 취급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이익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148)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하우봉, 「순암 안정복의 일본 인식」, 『전라 문화 논총』 2, 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88 참조. 쓰시마 섬이 조선의 속국이며 부용국인가의 여부를 놓고 안정복과 이익은 수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서 양자의 일본관과 대일 정책관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이익이 일본을 대등국으로 인정하고 대일 유화 노선을 취하고 있는 데 비해, 안정복은 일본을 이적시하고 쓰시마 섬을 속국으로 보았다. 또 일본과의 외교 관계나 대일 정책 면에서도 강경한 원칙론자 또는 명분론자로서의 주장을 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홍여하와 허목의 일본관을 계승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더 강화되었다.

넷째, 안정복은 일본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시하고 야만시하는 전통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자의 서적을 접한 뒤에는 주목할 만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가이바라 에키켄의 『화한명수』를 보고 “그 기계가 정묘하고 제도가 일정하니 오랑캐라고 소홀히 할 수 없겠다.”라고149)안정복, 『순암선생문집』 권2, 상성호선생서(上星湖先生書). 하였다. 또 이토 진사이의 『동자문(童子問)』을 읽은 후 유학자의 자세와 학문적 태도에 대해 언급한 이토 진사이의 주장에 대해 “이 말은 매우 좋다. 이 밖에도 격언(格言)이 아주 많다.”라면서 공감을 표시하였다. 나아가 그는 “바다 가운데 오랑캐의 나라에서 이와 같은 학문인이 있는 것은 뜻밖이다.”라고 칭찬하였다.150)안정복, 『순암선생문집』 권13, 상헌수필(橡軒隨筆) 하, 일본학자(日本學者).

일본을 문화 면에서 주목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안정복이 『동자문』과 『화한명수』를 직접 보고 난 후 일본의 유학과 문물에 대한 평가가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일본 문화에 대한 기록은 일본 유학에 대한 이상의 논평뿐이며 그 밖에 종교, 풍속, 시문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 안정복은 일본 문화에 대해 특별한 학문적 호기심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을 비로소 문화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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