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4. 실학파의 일본 인식
  • 실학파 일본 인식의 특성
하우봉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일본에 사행을 다녀온 적도 없고 대일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다른 어떤 지식인보다도 진지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실학자들이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저술을 남긴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화이적 명분론에서 벗어나면서 일본 이적관을 청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일본을 객관적으로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박학을 중시한 그들의 다양한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실학자들은 일본에 관한 정보를 대일 통신사행원을 통해 입수하였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대부분 통신사행원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통신사행의 삼사를 당색으로 분류해 보면 17세기에는 남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박재(朴梓, 1617년 사행의 부사), 강홍중(姜弘重, 1624년 사행의 부사), 임광(任絖, 1636년 사행의 정사), 김세렴(金世濂, 부사), 황호(黃㦿, 종사관), 윤순지(尹順之, 1643년 사행의 정사), 이언강(李彦綱, 1682년 사행의 부사) 등이 모두 남인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남인계 학자들이 일본에 대해 선구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후 일본 연구를 주도해 나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대일 통신사행원을 통해 일본에 관한 지식을 얻었고, 일본 서적과 물품도 접할 수 있었다. 후기로 갈수록 실학자들의 일본 인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서적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본 서적이 꽤 많이 전래되어 실학자들이 인용한 것을 보면 약 35종에 이른다. 이 서적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에 미치지는 못 하였지만 왕성한 학문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일부 실학자들에게는 관심 대상이었다.

학파나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조선 후기 실학파가 지닌 일본 인식의 특징으로는 전체적으로 개방성, 현실성, 교린 정신에 입각한 평화와 평등의 지향, 문화 상대주의에 입각한 일본 문화의 이해와 수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당시 다른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소중화 의식이나 전통적인 화이관에 바탕을 둔 일본 이적관과 대조되는 것으로, 대외 인식에서 의 진보성 또는 근대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실학자의 일본 인식에는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시대별, 학파별 기준에 따라 당시 대일 관계의 현상에 대한 진단과 전망, 일본 문화에 대한 인식과 평가 등의 문제에서 차이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일본을 연구한 실학파는 다음의 두 학파로 나눌 수 있다. 이익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하는 근기 남인계 실학파와 이덕무를 중심으로 하는 북학파이다. 그런데 17세기 이래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주도해 나간 학파는 남인계 실학파였다. 이들이 일본에 관해 기록을 남기고 있는 분야는 다양하다. 하지만 특히 북학파와 구별되는 점은 일본사 및 조일 관계사의 체계화, 일본의 재침 가능성에 대한 대책 제시, 정약용의 본격적인 일본 유학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같은 남인계 내에서도 개인에 따라 일본 인식에 차이가 있고 시대별로는 어떤 경향성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홍여하와 허목은 소중화적 세계관 속에서 일본 이적관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또 이 시기의 대일 인식은 군사적·정치적 관심에 머물렀으며 일본의 사회상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에는 소극적이었다. 18세기 중반 이익에 이르러 허목류의 일본 이적관을 비판하면서 일본에 대한 재인식을 주창하였다. 또 그는 일본의 기술과 문화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조선 후기 일본 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반면에 안정복은 이익과 달리 조선 중심의 화이관을 이론적으로 심화하였으며 그 속에서 일본 이적관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대일 정책에서도 그는 원칙론과 명분론에 입각하여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일본의 재침에 대한 경각심의 촉구와 대책 제시에 주력하였다. 이 점에서 안정복의 일본관은 이익보다 홍여하와 허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18세기 남인 실학파의 일본 인식 가운데 또 다른 또 하나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실학자들의 일본에 대한 관심의 폭이 좀 더 넓어지면서 문화적인 데로 옮겨 가는 경향이 발견된다. 앞서 살 펴본 정약용과 한치윤 이외에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 김정희에게서도 그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들의 학문적 지향이나 개인적 특성에서 기인하겠지만 당시 시대적 조건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안정되었고, 청나라와 일본의 문물이 발전함에 따라 기존의 화이적 명분론 또는 반청(反淸), 반일(反日) 관념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화이관을 주창하던 실학자들은 일본의 문화적인 변모와 발전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관도 객관적이고 우호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전반적으로 일본 인식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의 재침 가능성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위구심(危懼心)은 유지되었고,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재침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의 제시와 함께 일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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