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1.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파견 배경과 목적
  • 수신사 일행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한철호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游)』, 안광묵(安光默)의 『창사기행(滄槎紀行)』, 그리고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항한필휴(航韓必携)』에는 제1차 수신사 일행의 직임과 성명 등을 표 ‘수신사 일행의 직임과 성명’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표> 수신사 일행의 직임과 성명
직임·관직 『창사기행』 『항한필휴』 『일동기유』
수신정사 예조참의(修信正使禮曺參議) 김기수(金綺秀)   김기수
별견한학당상 가의대부
(別遣漢學堂上嘉義大夫)
이용숙(李容肅)   이용숙
사역원별견당상 가선대부
(司譯院別遣堂上嘉善大夫)
현석운(玄昔運)   현석운
장무관 상판사(掌務官上判事) 현제순(玄濟舜)   현제순
건량관 부사과(乾粮官副司果) 고영희(高永喜) 고영가(高永嘉) 고영희
화원 사과(畵員司果) 김용원(金鏞元)   김용원
서기 부사과(書記副司果) 박영선(朴永善)   박영선
군관 전낭청(軍官前郎廳)
전판관(前判官)
김문식(金汶植)
오현기(吳顯耆)
  김문식
오현기
반당 부사과(伴倘副司果) 안광묵(安光默)   안광묵
건량감관(乾粮監官)[반당(伴倘)] 김상필(金相弼) 김상필(金尙弼) 김상필
향서기(鄕書記)[겸인(傔人)] 김한규(金漢奎)   김한원(金漢元)
사노자(使奴子)   한쇠(漢釗), 한갑(漢甲) 한쇠, 한갑
행중노자(行中奴子)[노자(奴子)] 11명 한중록 등 11명 9명
향서기(鄕書記)[동래부(東萊府)] 변택호(邊宅浩), 강익수(姜益洙)   변택호, 강익수
예단직(禮單直) 노명대(盧命大)    
통인(通引)[지인(知印)] 홍치조(洪致肇), 박영호(朴永浩)   홍치조, 박영호
소동(小童)[지인(知印)] 박문찬(朴文燦), 이장호(李章昊)   박문찬, 이장호
통사(通事)[소통사(小通事)] 김복규(金福奎), 김응기(金應祺),
박기종(朴淇鐘), 김채길(金采吉)
  4명
급창노(及昌奴) 득이(得伊), 금석(今石)    
도척노(刀尺奴) 장오(章五), 경오(敬五)    
일산직노(日傘直奴) 학이(鶴伊)   1명
절월수(節鉞手) 박일성(朴日成), 조문철(趙文哲)   2명
순령수(巡令手)[영기수(令旗手)] 진업이(陳業伊), 박정봉(朴正奉)   2명
나팔수(喇叭手)[나수(螺手)] 박화준(朴化俊), 양치우(梁致雨)   2명
후배사령(後陪使令) 김이종(金以宗), 김명식(金明植),
박용안(朴用安), 강광운(姜光雲)
   
건량마두(乾粮馬頭)[주방마두(廚房馬頭)] 김홍기(金弘基)   1명
주방사후(廚房使嗅)[사환(使喚)] 방성옥(方成玉), 박동이(朴同伊),
이종이(李宗伊), 김대업(金大業),
송만종(宋萬宗), 윤계안(尹桂安),
김성신(金性信)
  7명
숙수(熟手) 박영오(朴永五)   1명
악공(樂工) 이운이(李雲伊), 박춘섭(朴春燮),
유상룡(柳尙龍), 진장명(陳長命),
이종명(李種明), 김부리(金富利)
  6명
사인교군(四人轎軍)[교자군(轎子軍)] 10명   10명
[검사(檢査)]     1명
[각수(角手)]     2명
[가수(笳手)]     2명
[정수(鉦手)]     2명
[고수(鼓手)]     2명
76명 76명 74명
✽직책에서 [ ] 안은 『일동기유』의 것임.
✽『항한필휴』의 빈칸은 『창사기행』과 동일한 인물이며, 한자가 다를 경우 표기해 두었고, 한쇠(漢釗)·한갑(漢甲)은 『창사기행』에 누락됨.

『일동기유』에 따르면, 제1차 수신사는 정사 김기수를 비롯해서 일본어 통역을 맡은 별견당상 현석운, 장무관 현제순, 건량관 고영희, 별견한학당상 이용숙, 화원 김용원, 서기 박영선, 군관 김문식·오현기, 수신사의 개인 비서 격인 반당 안광묵·김상필 등 11명, 그리고 잔심부름꾼과 각종 의례 및 절차를 담당한 63명 등 총 74명으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창사기행』과 『항한필휴』에는 총원을 76명으로 파악하였다.

지금까지 수신사의 총원에 관해서는 주로 『일동기유』를 근거로 삼으 면서도 73명에서 80명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먼저 80명설은 수신사가 파견되기 전에 조선 측에서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 측에 전해 준 문서에 기록된 것인데, 실제로 파견 당시 총인원이 조정·축소되었던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오류임이 분명하다.161)일본 외무성, 『항한필휴(航韓必携)』 1(조항래, 『개항기 대일 관계사 연구』, 한국 학술 정보(주), 1973 소수), 신사전보(信使前報) ; 『日本外交文書』 9, 191쪽, #52, 附記附屬書二. 한편 이로 인해 일본의 언론들도 대부분 수신사의 총원을 80명 정도로 보도하였다. 다만 『요코하마마이니치신문(橫濱每日新聞)』은 처음에 80명으로 보도하였다가 수신사 일행의 도쿄 도착을 전하면서 76명이라고 기록한 점이 주목된다. 한편 다보하시는 수신사의 총원에 대해 “정사 1원·당상관 2원·상관 10원·중관 49명·하관 18명, 합계 82명”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분명히 계산 착오로 정확히 합산하면 80명이다. 정응수도 80명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876년 5월 10일자(80명), 5월 30일자(80명) ; 『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 1876년 5월 30일자(80여 명) ; 『요코하마마이니치신문』 4월 24일자(70∼80명), 5월 11일(86명), 5월 30일자(76명) ; 田保橋潔, 『近代日鮮關係の硏究』 上, 朝鮮總督府, 1940, 560쪽 ; 정응수, 「근대 문명과의 첫 만남-『일동기유』와 『항해일기』를 중심으로-」, 『한국학보』 17-2, 일지사, 1991, 111쪽). 다음 75명설은 대부분 『일동기유』를 전거로 삼았다. 하지만 이 역시 『일동기유』에는 총 74명으로 적혀 있으므로 셈을 잘못한 것이다.162)와타나베는 전거를 인용하지 않은 채 75명이라고 썼다. 이선근은 『일동기유』를 근거로 75명이라고 적었다. 신국주도 『일동기유』를 근거로 75명이라고 하였으나, 그나마 노자 2명을 1명으로 잘못 옮겨 적었다. 이광린도 총원을 75명이라고 하였다. 아마 와타나베 혹은 이선근의 글을 면밀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渡辺勝美, 『朝鮮開國外交史硏究』, 東光堂, 1941, 296쪽 ; 이선근, 『한국사-최근세편-』, 을유 문화사, 1950, 402∼403쪽 ; 신국주, 『근대 조선 외교사』, 통문관, 1965, 90∼91쪽 ; 이광린, 『한국사 강좌 Ⅴ 근대편』, 일조각, 1981, 84쪽. 『일동기유』를 근거로 내세운 73명설 역시 아마 수신사 김기수를 포함시키지 않은 듯하다.163)하우봉, 「개항기 수신사의 일본 인식」, 『근대 교류사와 상호 인식』 Ⅰ,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화 연구소, 2001,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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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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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일본 측의 문서인 『항한필휴』에 수신사의 총원을 76명으로 파악하고, 전원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항한필휴』는 김기수의 귀국에 뒤이어 곧바로 조선에 파견된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가 협상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서둘러 편집하는 바람에 오탈자가 적지 않은 한계는 있지만, 일본 외무성이 공식 문서인 『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朝鮮國修信使金綺秀來聘書)』를 토대로 작성한 것인 만큼 신빙성이 높다. 다만, 『항한필휴』에 기재된 요코하마(橫濱)에서 신바시(新橋)로 가 는 수신사 일행의 기차 탑승 인원이 상등실에 김기수와 상상관 2명 외 소동 2명, 중등실에 상관 9명과 차관 3명, 하등실 2량에 중관 47명과 하관 10명 등 74명으로 되어 있는 점이 문제가 된다.164)『명치9년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明治九年朝鮮國修信使金綺秀來聘書)』 9(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 #1-1-2-3-10, 『명치9년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조일건(明治九年朝鮮國修信使金綺秀來朝一件)』), 조선국수사일행성명(朝鮮國修使一行姓名) ; 『항한필휴』 7, 신사체경일기(信使滯京日記) 건(乾), 5월 7일(5/29)자 참조. 따라서 일본 외무성의 공식 문서에 의거해서 76명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기차 탑승 인원을 중시해서 74명으로 볼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일동기유』의 기록을 믿으면 『항한필휴』는 오히려 74명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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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기유』
『일동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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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기행』
『창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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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안광묵의 『창사기행』에는 수신사의 총원이 76명으로 적혀 있다. 그는 김기수가 직접 발탁한 개인 비서로, 수신사의 일정뿐 아니라 일행의 동향에 대해서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실제로 김기수는 『일동기유』를 집필하면서 『창사기행』을 참고로 삼았던 만큼, 이 기록은 그 어떤 사료보다도 정확하고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신사 일행에 대한 『창사기행』의 숫자와 명단은 성명과 직책의 한자 표기만 다를 뿐 『항한필휴』와 일치한다.

『창사기행』에는 76명 가운데 김기수의 노자인 한쇠·한갑 2명이 빠진 채 일행 노자(一行奴子) 11명과 교군 10명을 제외한 53명의 직책과 성명이 적혀 있다. 『일동기유』에는 김기수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2명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으므로 그들이 수신사행에 참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2명의 이름과 직책이 『창사기행』에는 빠진 채 일행 노자를 11명으로 기록하였던 반면, 『일동기유』에는 포함되었으나 일행 노자와 동일한 각방 노자(各房奴子)가 9명으로 적혀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안광묵은 실수로 2명을 빠뜨렸고 노자의 성명은 중요치 않다고 여겨 기록하지 않았으며, 김기수는 『창사기행』을 참고로 인원을 파악할 때 노자의 성명이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그 수를 총 11명으로 알고 2명을 제외해서 각방 노자를 9명으로 적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록 이러한 문제점이 있지만, 안광묵이 일본 방문 기간 중 전체 인원수를 수시로 점검·확인하여야 하는 김기수의 비서였던 만큼 총원을 76명으로 기록한 것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신사의 총원은 76명이었음이 분명하다.165)조항래는 처음에 『일동기유』를 근거로 75명이라고 하였으나 『항한필휴』를 전거로 나중에 76명으로 정정하였을 뿐 아니라, 수신사 파견에 앞서 일본에 통보한 총원이 80명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안광묵(安光默), 『창사기행(滄槎紀行)』, 규장각 고 4280-2 ; 김기수, 『일동기유』 1, 수솔(隨率), 349∼350쪽 ; 1, 유관(留館), 374쪽(이하 『일동기유』의 내용은 이재호 옮김, 『해행총재(海行摠載)』 10, 민족 문화 추진회, 1977을 근거로 수정·보완하였으며, 쪽수에 이 번역본을 따랐다.) ; 조항래, 앞의 책, 29∼30, 67∼72쪽.

제1차 수신사의 총원은 300∼500명에 달하였던 통신사보다 규모도 훨씬 적고 의례적 성격도 약화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양국이 통신사행과 달리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사절단을 실무용으로 간소화하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례에 관계된 인원이 20명을 넘었던 점은 수신사가 전통적인 형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수신사의 임무를 담당할 인원이 김기수를 포함해서 직책을 맡았던 11명에 지나지 않은 소규모였기 때문에 그들이 20일의 짧은 도쿄 체류 기간 동안 예전과 크게 달라진 메이지 일본의 국정 탐문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는 애초부터 매우 벅찬 일이었다. 더욱이 통신사가 일본 본토를 공식적으로 방문한 지 112년 만에 수신사가 파견되었다는 점, 조선 정계에 일본과 서양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팽배하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수신사 일행이 생전 처음 접해 본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선뜻 수용해서 부국강병책(富國强 兵策)을 건의하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신사 수행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학(語學)에 능통하였던 것 외에도 대외 정책의 실무 능력을 갖추었거나 국제 정세에 대해 비교적 밝은 인물들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뒤 처음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었던 만큼, 대일 관계의 회복과 국정 탐색의 임무 수행에 걸맞은 수행원을 발탁하는 데 신중을 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정부에서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할 때 “따라가는 인원은 일에 밝은 사람으로 적당히 선택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던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먼저 이용숙은 1866년(고종 3)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 사건을 처리하는 데 관여하였고, 1868년 함경도 개시(開市)의 폐단을 제거하였으며, 1874년부터 1876년까지 『동문휘고(同文彙考)』를 속간하고 『통문관지(通文館志)』 속편을 교정하는 데 참여하였다.166)『일성록』, 1866년 7월 15일 ; 『승정원일기』 1868년 3월 29일, 1874년 3월 6일 참조. 또한 그는 10여 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한 베테랑 한어 역관(漢語譯官)이었다.

또한 현석운은 1873년(고종 10) 고종의 친정(親政) 후 쇄국 정책(鎖國政策)의 실무를 담당하였던 부산 훈도 안동준(安東晙)의 후임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그 직후 그는 별차 현제순과 함께 1873년 11월과 1875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정세를 탐색하기 위해 내한하였던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협상을 벌였다. 1875년 4∼5월 일본이 운요호(雲揚號) 등을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벌일 당시 현석운은 일본 측에 항의하는 한편 군함을 관람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167)『승정원일기』 1874년 8월 9일 ; 국사 편찬 위원회 편,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22,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438∼439쪽, 기밀 제130호 ; 이광린, 앞의 책, 1981, 65∼69쪽 참조. 이어 1875년 11월 운요호가 재침하였을 때에도 그는 일본 측과 교섭하였으며, 1876년 강화도 회담을 벌일 때에도 참석하였다. 요컨대, 이용숙과 현석운은 당시 어학뿐 아니라 경험과 교섭 능력을 갖춘 최고의 중·일 외교 실무가로서 조선 정부가 나름대로 “일에 밝은 사람으로 적당히 선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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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김기수는 “유람도 많이 하고 안목도 남다른” 이용숙에게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기수는 물론 수행원들 역시 일본을 견문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아 일본의 변화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여행에 종사하여 천하의 사람을 매우 많이 보았다.”고 자부할 만한 이용숙마저도 “오늘 본 수없이 많은 사람 가운데 폐질자(廢疾者)와 걸인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이제 처음 본 셈이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을 정도였다.168)김기수, 『일동기유』 권3, 인물(人物), 442∼443쪽. 또한 『동문휘고(同文彙考)』, 수신행별견수역이용숙견문사건(修信行別遣首譯李容淑見聞事件), 4179쪽 참조. 이들 외에도 부산 상인으로 일본어에 능통하여 통사로 발탁된 김복규·김응기·박기종·김채길 등 4명, 그리고 뒤에 서술하듯이 김기수 자신이 직접 발탁한 박영선도 수신사의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169)『항한필휴』 2, 신사일행열명(信使一行列名).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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