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2. 김기수의 견문 태도와 활동
  • 명분을 잃지 않되 융통성을 발휘한 견문 활동
한철호

일본 정부는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직후 사절단의 파견을 적극적으로 권고하였으며, 수신사의 파견을 통보받고 크게 환영하였다. 1860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비준서 교환 당시 미국이 일본에 제공한 전례(前例)를 모방해서 기선(汽船)을 비롯한 거의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 정중하게 영접하였으며, 수신사행이 가능한 한 많은 문물을 관람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물론 일본의 의도는 수신사행으로 하여금 메이지 일본의 개화 실상을 각인시킴으로써 곧이어 예정된 조일 수호 조규 부속 조약 및 무역 장정의 체결 협상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특히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여 아시아 연대(실질상 조일 연대)를 도모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자국의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데 있었다.183)田保橋潔, 앞의 글, 39쪽 : 앞의 책, 557∼559쪽 ; 조항래, 앞의 책, 24쪽.

확대보기
요코하마 해안 모습
요코하마 해안 모습
팝업창 닫기

일본 외무성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신사의 파견을 통보받은 직후부터 매우 치밀하게 일정을 편성하였다. 수신사가 도쿄에 체재하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이 견문시킨다는 방침 아래 무려 32일간에 걸쳐 일본의 거의 모든 근대적 제도와 시설을 시찰하도록 계획을 세웠다.184)일본이 수신사에 대비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하였는지는 『항한필휴』 3, 유람개처(遊覽箇處)와 『명치9년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 1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외교 문서 전달 등 수신사가 사절단으로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할 경우, 김기수는 그야말로 “시찰에 망살(忙殺)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185)田保橋潔, 앞의 책, 576쪽.

<표> 수신사 일행의 도쿄 체재 및 귀국 도중 일본 정부의 관람 유도 계획
관할 부서 관람 계획 장소
궁내성(宮內省) 후키아게 금원(吹上禁園), 하마리궁(濱離宮)
육군성(陸軍省) 육군 연병(陸軍練兵), 군마국(軍馬局), 동국 구(同局廐), 동국 제철제소(同局蹄鐵製所), 고노에 보병영(近衛步兵營), 동국 상마장 운동(同局相馬場運動), 사관 학교(士官學校), 동영 병수 정돈법(同營兵數整頓法), 동교 이화학 기계 및 석판접(同校理化學器械幷石版摺) 동교 교장(同校敎場), 도야마 학교(戶山學校), 동교 체조장(同校體操場), 체조 기술장(體操技術場), 동교 사적(同校射的), 동교 격검술(同校擊劍術), 포병 본창(砲兵本廠), 동창 목공(同廠木工), 동창 화공(同廠火工), 동창 동분석(同廠銅分析), 동창 주물(同廠鑄物), 동창 대포 소총(同廠大砲小銃), 동창 견본 기계(同廠見本器械), 동창 안구 제조(同廠鞍具製造), 동창 총기 제조(同廠銃器製造), 동창 원정(同廠園庭)
해군성(海軍省) 해군 조련(海軍調練), 동성 중련포장 발포(同省中練砲場發砲), 요코스카 조선소(橫須賀造船所), 동함(東艦), 엣추지마 철판 발탄 시험적(越中島鐵板發彈試驗跡), 병학료(兵學寮), 동료 범전 조련(同寮帆前調練)
내무성(內務省) 박물관(博物館), 아사쿠사 문고(淺草文庫), 권업료 출장소 식물원(勸業寮出張所植物園), 위생국 사약소(衛生局司藥所), 이시카와지마 징역장(石川島懲役場), 조슈 도미오카 제사장(上州富岡製絲場), 이치가야 수옥소(市ケ谷囚獄所), 요코하마 제철소(橫濱製鐵所), 센슈사카이 방적소(泉州堺紡績所)
공부성(工部省) 공학료(工學寮), 동료 교장(同寮敎場), 동료 이화학 기계 및 증기선 추형 등(同寮理化學器械幷蒸氣船雛形等), 동료풍선(同寮風船), 동료 박물(同寮博物), 동소 주물(同所鑄物) 아카바네 제작소(赤羽根製作所)
문부성(文部省) 필적관(筆籍館), 동관 공자 기타 목상 및 석전기(同館孔子其他木像及釋奠器) 사범 학교(師範學校), 동교 교장(同校敎場) 여자 사범 학교(女子師範學校), 동교 교장(同校敎場) 영어 학교(英語學校), 동교 교장 및 이화학 기계(同校敎場幷理化學器械), 동교 서양 악기 및 해부(同校西洋樂器並解剖) 외국어 학교(外國語學校), 동교 교장 및 이화학 기계(同校敎場幷理化學器械) 가이세이 학교(開成學校), 동교 전기(同校電氣), 동교 박물(同校博物), 고이시가와 식물원(小石川植物園), 동교 제작교장(同校製作敎場), 동교 해부(同校解剖) 및 치료 기계(治療器械), 현미경 등(顯微鏡等) 의학교 부병원(醫學校附病院)
대장성(大藏省) 지폐료(紙幣寮), 동료 동판 조각(同寮銅版彫刻), 동료 판접 및 지절(同寮版摺幷紙截), 동료 제육(同寮製肉), 동료 여공직(同寮女工職), 동료 관할 왕자 초지국(同寮所轄王子抄紙局)
활판국(活版局), 동국 활자 주조(同局活字鑄造), 동국 판접 및 제본(同局版摺幷製本), 동국 석판(同局石版), 역체료 우편 취급(驛遞寮郵便取扱), 오사카 조폐료(大坂造幣寮)
사법성(司法省) 도쿄 재판소(東京裁判所), 경시청 할내(警視廳轄內), 소방 펌프 조련(消防ポンプ調練)
개척사(開拓使) 홋카이도 생산 박물원(北海島生産博物園), 권업 시험장(勸業試驗場)
✽『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 7 ; 『항한필휴』 3.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은 고종에게 사폐(辭陛)한 후 4월 29일 부산 초량에서 일본 화륜선 고류마루를 타고 출발하였으며, 5월 7일 도쿄에 도착하여 27일 귀국길에 오르기까지 제4대구(大區) 1소구(小區) 간다(神田) 니시키초(錦町) 2조메(丁目) 1번지(番地) 소재 옛 이마가와(今川) 저택에 머물렀다.186)당시 이마가와 저택의 위치는 현재 간다서(神田署) 옆 도쿄 전기 대학(東京電氣大學) 자리이다. 또한 이 저택에 화재가 날 경우, 아사쿠사(淺草) 혼간지(本願寺)나 시바(芝) 곤지인(金地院)으로 옮긴다는 대책도 마련되어 있었다(김기수, 『일동기유』 권1, 규조(規條), 대설(代舌), 463쪽 ; 『일동기유』 권3, 규조, 관왜서(館倭書), 459쪽 ; 『항한필휴』 1, 여관상신(旅館上申) ; 『명치9년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 1 등 참조). 도쿄 체재 중 수신사 일행은 일본 정부의 각종 신식 기관과 시설을 시찰하였지만, 김기수가 일본의 근대화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일본 정부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기에 20일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예정된 일정에 따라 적극적으로 견문을 권고하였지만, 김기수는 그 일정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정부 측이 무리한 시찰 일정을 강행하려는 의도를 어느 정도 감지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표면상으로 일본의 요구대로 순순히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장중근신(莊重謹愼)’의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187)김기수, 『일동기유』 권1, 완상, 381쪽 ; 『일동기유』 권2, 문답, 411∼412쪽.

실제로 일본 측이 수신사 일행이 길을 모르는 것을 기회로 삼아 더 많은 곳을 견문시키기 위해 일부러 오가는 길을 달리하거나 돌아가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눈치 챈 김기수는 “그냥 내버려 두면 그들은 반드시 뽐내게 될 것이니, 훗날의 폐단을 생각지 않을 수도 없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일본의 안내자가 “무례하게 농락하는데도 살피지 못하고 망연히 있은” 죄목으로 소통사(小通事)를 꾸짖은 다음 호되게 매질하였다. 이러한 김기수의 태도는 ‘갑에게 화난 것을 을에게 옮기는 격’이었지만, 시찰에 소극적이라기보다 일본 측의 의도를 감지하고 견제하 려는 일종의 강력한 의지 표현이라고 평가할 만하다.188)김기수, 『일동기유』 권1, 유관, 375∼376쪽 ; 『항한필휴』 7, 신사체경일기 건, 6월 6일자.

확대보기
도쿄부
도쿄부
팝업창 닫기

그렇다고 김기수가 고지식하게 시찰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만 취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5월 8일 외무성을 방문한 자리에서, 외무대승(外務大丞) 미야모토가 원래 예정에 없던 일본 천황의 배알(拜謁)을 제의하자 처음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천황의 특별 대우(特別待遇)를 참작하여 받아들였다. 알현 날짜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일본 측이 제안한 날이 조선의 국기일(國忌日)이었지만 천황의 순행(巡幸) 사정을 고려해서 수용하는 융통성을 발휘하되, 예의 절차는 국왕을 배견(拜見)하는 방식을 관철하였으며 고종의 수호 의사도 잘 전달하였다.189)하우봉, 앞의 글, 2001, 230쪽. 그러나 천황을 알현한 뒤 일본 국법에 따라 각 성(省)의 장관을 방문하고 만나지 못할 경우 명함이라도 남겨 두자는 외무권대승 모리야마 시게루의 요구에 대해서 김기수는 통신사와 청나라와의 외교 전례를 들고 국왕의 명령이 없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요하지 말라고 정중히 거부하였다.190)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12∼416쪽 ; 『일동기유』 권2, 완상, 385쪽.

또한 5월 22일 외무권소승(外務權小丞) 후루자와 요시노리(古澤經範)가 원로원(元老院) 방문을 강청(强請)하면서 원로원 의장이자 천황의 지친(至親)인 2품 친왕(親王)이 “공을 보고자 초청하는데, 공이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김기수는 갑자기 화난 얼굴로 “친왕은 어떤 친왕입니까? 수신사가 비록 하찮은 사람이지만 다른 나라의 봉명 사신(奉命使臣)인데, 다만 자기들이 보고자 하면 쉽사리 부르니 체통과 예절로 헤아려 보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하면서 “비록 피곤도 하지 만, 이 일에 대해서는 단연코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강력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후루자와가 자신의 말을 사과한 뒤 원로원은 국정을 논의하는 곳이므로 일본의 규모와 시설을 알려 주기 위해 초청하는 것이라고 해명하자, 김기수도 더 이상 실언을 추궁하지 않은 채 웃으면서 일본 정부의 ‘후의’로 인식하고 원로원을 방문하겠다고 답변하였다.191)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7∼428쪽.

확대보기
외무성
외무성
팝업창 닫기

이와 같이 김기수는 단순히 명분만 고집하지 않고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거나 원로원을 방문하였다. 그는 수신사의 위엄과 체통을 유지하면서도 적절하게 융통성을 발휘하여 일본의 근대적 제도와 상황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나아가 김기수 자신은 ‘장중근신’한 자세를 견지하여 표면적으로 일본의 견문 요구에 적극 응하지 않되, 실질적으로는 수행원들의 시찰을 허락하거나 묵인해 주기도 하였다.192)조항래, 앞의 책, 77∼87쪽. 5월 12일 그가 엔료칸(延遼館)에서 환영연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박물관(博物館)을 구경한 것은 일본 측의 권유도 있었지만 5월 9일에 이미 그곳을 다녀온 현제순 등 2명의 수행원이 매우 놀라울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5월 13일에는 고영희 등 3명의 박물관 견학도 허락해 준 것으로 보인다.193)일본 외무성, 『항한필휴』 8, 신사체경일기 곤(坤), 5월 31일 및 6월 3·4일자.

확대보기
지폐료(紙幣寮)
지폐료(紙幣寮)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요코스카 조선소
요코스카 조선소
팝업창 닫기

또한 5월 14일에 현석운을 비롯한 18명은 마차와 인력거(人力車)를 타고 대장성의 지폐료(紙幣寮)를 견학하고,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아사쿠사 혼간지(淺草本願寺)·센소지(淺草寺) 관음상 등을 구경한 뒤 히로세(廣瀨)의 전기 기계를 일람(一覽)하였다. 특히 그들은 지폐료와 전기 기계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한다.194)일본 외무성, 『항한필휴』 8, 신사체경일기 곤, 6월 5일자. 5월 28일 귀국 길에 풍랑을 만나 배가 요코스카(橫須賀)에 정박하였을 때에도 김기수는 병을 핑계로 조선소에 가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현석운을 ‘회례’의 명분으로 파견하여 아마기호(天城號)·진게이호(迅鯨號)의 조선(造船) 상황 등을 견문하도록 조치하였다.195)일본 외무성, 『항한필휴』 8, 신사체경일기 곤, 6월 19일자. 또한 김용원은 운룡수(雲龍水) 및 용토천룡수(龍吐天龍水), 철포(鐵砲), 기계 등의 축소 모형(雛形)을 하나씩 구입해 달라고 일본 측에 ‘간망(懇望)’하였고, 5월 25일에는 직접 물품을 건네받으면서 실제로 경험한 뒤 대금을 지불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아연판과 땜납, 아연 계합용(繼合用) 염산 등을 사들였다.196)일본 외무성, 『항한필휴』 8, 신사체경일기 곤, 6월 15, 16일자. 그리고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박영선은 준텐도(順天堂)에 가서 종두법(種痘法)을 전습하고 돌아왔다.197)일본 외무성, 『항한필휴』 8, 신사체경일기 곤, 6월 16일자.

이처럼 수행원들이 일본의 근대적 제도와 시설을 시찰하거나 물품을 구입하고 종두법을 전습받은 행동은 김기수의 허락 또는 묵인 없이 결코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김기수 자신이 직접 시찰하지 않은 지폐료와 조선소의 선박 건조 등을 『일동기유』에 기록한 점으로 미루어, 수행원들에게 견문 내용을 일일이 보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198)김기수, 『일동기유』 권1, 정박(停泊), 367쪽 ; 권3, 「정법」, 456쪽.

<표> 수신사 일행의 도쿄 체재 중 행사 및 견문 일정
날짜(양력) 행사 및 견문 사항
5월 7일(5/29) 요코하마역에서 기차로 신바시역 도착, 숙소 이마가와(今川) 저택
5월 8일(5/30) 외무성 방문
5월 9일(5/31) 박물관 관람(현제순 등 2명)
5월 10일(6/1) 아카사카궁(赤坂宮)으로 천황 예방, 어화원(御花苑)에서 휴식
5월 11일(6/2)  
5월 12일(6/3) 엔료칸(延遼館) 하선연(下船宴), 박물관 관람
5월 13일(6/4) 박물관 견학(고영희 등 3명)
5월 14일(6/5) 대장성 지폐료 견학, 우에노 공원·아사쿠사 혼간지·센소지 관음상 구경, 히로세 전기 기계 일람(현석운 등 18명), 준텐도(順天堂)에서 치료(4명)
5월 15일(6/6) 육군성 교련장(군대 훈련) 관람, 외무성에서 오찬
5월 16일(6/7) 미야모토의 장화원(長華園) 방문
5월 17일(6/8) 해군성 병학료(대포 발사 등) 관람, 이노우에(井上馨) 집 방문
5월 18일(6/9) 사진 쵤영
5월 19일(6/10) 쓰시마 섬 도주 소 요시아키(宗義達)의 후카가와(深川) 별장 방문
5월 20일(6/11) 모리야마 집 방문
5월 21일(6/12) 육군성 병학료, 고노에(近衛) 병영, 포대 본영 관람, 고이시가와정(小石亭) 오찬, 공부성 공학료에서 전선 등 시찰, 공부경 이토(伊藤博文) 집 연회 참석
5월 22일(6/13)  
5월 23일(6/14) 태학(太學)<서적관> 관람 및 공자(孔子) 소상 첨알, 가이세이 학교(開城學校)·도쿄 여자 사범 학교 방문
5월 24일(6/15) 원로원 국회 의사당 방문, 엔료칸 상선연(上船宴), 운룡수 및 용토천룡수, 철포, 기계 추형 등 구입 요청(김용원)
5월 25일(6/16) 준텐도에서 종두법 전습(박영선)
5월 26일(6/17) 외무성을 예방, 작별 인사
5월 27일(6/18) 신바시에서 기차로 요코하마 도착, 승선해서 요코스카 정박
5월 28일(6/19) 바람으로 요코스카 재정박, 조선소 방문(현석운)
5월 29일(6/20) 요코스카 출발
5월 30일(6/21)  
윤5월 1일(6/22) 고베 도착
윤5월 2일(6/23)  
윤5월 3일(6/24) 고베 출발, 시모노세키 도착, 에이후쿠지(永福寺) 오찬
윤5월 4일(6/25) 시모노세키 출발 후 바람으로 재귀항
윤5월 5일(6/26) 쓰시마 섬 도착, 이테이앙(以酊庵)에서 유숙
윤5월 6일(6/27) 구도주(舊島主) 소 요시요리(宗義和) 연회 참석, 쓰시마 섬 출발
윤5월 7일(6/28) 부산 도착
✽『일동기유』 1 ; 『항한필휴』 8.

아울러 김기수의 견문 활동을 평가할 때, 도쿄 체류 기간이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사실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발하기 전 사폐(辭陛)하는 자리에서, 고종은 통신사의 전례를 근거로 도쿄에 15일 이상 체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해 그는 명령에 따르겠지만, 현지 사정에 따라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답하였다.199)『승정원일기』 1876년 4월 4일.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국왕의 명령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았던 만큼, 그는 일본 시찰에 못지않게 귀국 날짜를 맞추는 데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정을 연기하려는 일본 측에 대해 시찰의 호의를 베풀어 준 데는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도 국왕의 명령을 내세워 15일을 넘기지 말아 달라고 거듭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귀국 예정일인 5월 22일 후루자와가 전날 입항한 고류마루가 싣고 왔던 짐을 부린 후 모래를 채우는 등 출항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므로 5월 27일로 귀국 일정을 잡자고 제의하였을 때, 김기수는 이유가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재촉하지 않은 채 승낙하기에 이르렀다.200)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2∼423, 426∼427쪽 ; 『일동기유』 권4, 귀기(歸期), 505∼506쪽.

실제로 6월 1일 복명할 때, 고종은 책망조는 아니었지만 “생각하였던 것보다 좀 더 지체되었다.”고 물어보았고, 김기수는 “처음 생각으로는 15일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나 일의 형세가 여의치 않아 20일이나 더 걸 리게 되었다.”고 답변하였다.201)『승정원일기』 1876년 6월 1일. 따라서 일본 측이 편성한 일정에 순응할 경우 체류 기간이 마냥 늘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사행 기간을 될 수 있는 한 단축하려고 애썼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202)김기수, 『일동기유』 권1, 정박, 367쪽. 이처럼 일본 측의 무리한 시찰 강요로 말미암아 예정된 체류 기간을 넘기는 촉박한 상황에서 김기수는 다소 소극적으로 시찰에 응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현지 실정에 맞추어 융통성을 발휘하여 체류 기간을 연장하거나 수행원들의 시찰을 허락 혹은 묵인하면서 일본의 실상을 객관적이면서도 자세히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던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확대보기
제2차 수신사의 귀국
제2차 수신사의 귀국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