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3. 김기수의 일본 인식
  • ‘일본 이적관’에서 점차 탈피하다
한철호

조선은 조일 수호 조규의 체결을 계기로 중국 중심의 화이론적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서구 중심의 근대적 조약 체계로 편입되었다. 서구 열강은 무력을 기반으로 하되 표면상 ‘만국 공법(萬國公法)’을 앞세워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해체하고 개항을 통해 식민 지배를 확대해 가고 있었다. 만국 공법을 전제로 맺은 조일 수호 조규 제1조 역시 조선과 청나라의 ‘종속’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김기수는 만국 공법 체제를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는 국제 질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 이른바 만국 공법이란 것은 여러 나라가 맹약(盟約)을 맺기를 옛날 전국시대의 6국 연횡법(連衡法)과 같았으니, 한 나라가 간난(艱難)한 일이 있으면 여러 나라가 이를 구원하여 주고, 한 나라가 맹약을 어긴 일이 있으면 여러 나라가 공벌(攻伐)하게 되어, 한 나라를 치우치게 사랑하고 미워하 는 일도 없으며, 또 한 나라를 치우치게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이것은 서양인의 법인데, 지금 대단히 놀랍게 보고 받들어 행하여 감히 어기는 일이 없었다.203)김기수, 『일동기유』 권3, 정법, 456쪽.

비록 만국 공법을 중국 전국시대의 연횡법과 동일하다는 전제 아래 그 속에 내재된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간과한 한계는 있지만, 당시 국제 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서양인의 법’으로 일본도 이를 엄격하게 준수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만국 공법 체제하에서 각국이 외교관을 파견·상주시키면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전권대신(全權大臣)과 전권공사(全權公使)의 명칭이 있으니, 한 번 그 군주의 명령을 받으면 국가에 이익 되는 일은 마음대로 처리하여도 될 수 있었다. 그 관하(管下)의 사람을 살리고 죽이며 승진시키고 내쫓는 것과, 그 맡은 일을 편의적으로 시행하고 시행하지 않는 것과, 더디게 행하고 빨리 행하는 것을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을 전권이라 이르는 것이고, 전단발호(專擅跋扈)하기를 옛날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진(晉)나라의 삼군(三軍)이 한 일처럼 한 것은 아니었다.204)김기수, 『일동기유』 권3, 정법, 456쪽.

군주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외교관은 전권대신 또는 전권공사로서 국익에 관계되는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데, 이는 고대 중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도쿄에 상주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모리야마에게 일본의 조약 체결 실태와 일본 주재 외국 공사의 상황에 대해 서면으로 질의하여 답변서를 받은 적도 있었다.205)『명치9년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 9. 더욱이 김기수는 출발 전에 『해국도지』와 『영환지략』 등을 읽었던 점으로 미루어, 만국 공법 또는 근대적 상주 외교관 체제 에 관해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6)『승정원일기』 1876년 6월 1일. 아울러 그는 공사 이외에 각국이 타국에 거주하는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영사를 상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207)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還朝), 부행중문견별단(附行中聞見別單), 513쪽.

이처럼 김기수는 근대적 조약 체제와 외교 제도를 어느 정도 알거나 그 운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였음에도, 조일 수호 조규 자체를 만국 공법에 기초한 근대적 조약으로 인식한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일본 체재 중 모리야마는 그에게 “매번 귀국과 담판할 때 말이 지리하고 일을 오래 끌어서 한 가지도 즉시 결정되는 일이 없었다.”면서 “6개월 후에 세목(細目)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혹시라도 그전처럼 지연시킨다면 답답하게 될 것이니 중간에서 교섭하는 사람이 어찌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전권을 위임받은 관리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었다.

이에 그는 웃으면서 “우리나라의 규모는 원래 이와 같으며, 귀국처럼 전권대신이 있는 것”이 아니며 “조심하고 근신하여, 방종(放縱)하고 자행(恣行)하지 않는 일은 이것이 우리나라의 한 가지 평소 규칙이므로, 공(公)들의 훗날 일에도 그것을 일마다 들어주겠다(聽從)고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미리 양해하여야 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외교 제도가 다르므로 “대체로 세상에 어떤 일이라도 어찌 다 자기 뜻대로 되겠느냐?”면서 일본 측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다 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견해를 확실하게 밝혔던 것이다.208)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19∼422, 429∼431쪽.

또한 조일 수호 조규 부속 조약 및 무역 장정을 협의하기 위해 파견될 예정이던 미야모토가 사담(私談)임을 전제로 “조약하는 것은 행할 만하면 행한다 하고 행하지 못할 만하면 행하지 못한다고, 한마디의 말로써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은근히 강박하였을 때에도, 그는 “이런 등류(等類)의 일은 우리도 이해하고 있으니 지나치게 부탁할 필요는 없다.”면서 앞서와 같은 논조로 “이번 일도 공이 미리 참작(參酌) 용서하여 지나치게 재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못 박았다.209)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9∼431쪽.

이와 같이 그는 만국 공법에 의거해서 전권공사로 하여금 신속하게 조약을 처리하자는 일본의 요구를 전통적인 외교 관행을 내세워 우회적으로 거부하였다. 조일 수호 조규 체결 당시 조정에서 조약 반대자들을 무마하기 위해 대두되었던 구호회복론(舊好回復論)과 왜양분리론은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중화 질서 체제의 온존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 서구에 대한 문호 개방이나 서구적 만국 공법 체제의 수용을 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만국 공법적 외교 제도에 의거하여 후속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의 의도만큼은 나름대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조일 수호 조규의 만국 공법적 성격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지녔음에도 일본의 요구에 순순히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음으로 김기수는 일본과 청나라가 그토록 경계하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직전인 1875년(고종 12) 일본은 러시아의 압력에 굴복해서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樺太千島交換條約, 가라후토는 사할린임)을 맺어 북방 영토 문제를 일단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강화되는 데 대해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 정부는 김기수가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심지어 5월 16일 조일 수호 조규 체결 당시 전권부대신으로 강화도에 파견되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일부러 김기수가 묵고 있던 숙소로 찾아와 다음과 같이 러시아의 동향을 설명해 주었다.

러시아가 군대를 움직일 징조가 있다는 점은 내가 강화도에서 이미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저 러시아의 땅에 갈 때마다 그들이 날마다 병기를 만들고 흑룡도(黑龍島)에 군량을 많이 저장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귀국(貴國)에서는 마땅히 미리 대비 하여 기계를 수선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방어의 계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들이 혹시 올 때에도 귀국에서는 절대로 대포는 쏘지 마십시오. 그들의 온 뜻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갑자기 먼저 대포를 쏜다면 그것은 귀국의 실책입니다.210)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3∼424쪽.

러시아의 병력 증강과 군량 비축 상황을 설명하면서 남하 가능성을 깊이 우려하였고, 나아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도 방어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이노우에는 러시아가 조선에 접근할 경우 ‘절대로’ ‘먼저’ 대포를 쏘지 말라고 권고하였는데, 과연 ‘강화도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말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에 김기수는 일단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이것은 섬 군사들이 아무 일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데 불과한 것이니 어찌 상시(常時) 이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 뒤,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다만 저 러시아를 막는 방도는 반드시 무기를 예리하게 하고 군복을 간편하게 하는 그것입니다. 무령왕(武靈王)이 그 의복을 변경하고 공수(工倕, 옛날 중국의 공인(工人))가 그 제작을 정교하게 하는 것을 처음부터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예전 규칙은 선왕(先王)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선왕의 의복이 아니면 입지 않는 것을 한결같이 전수(傳授)한 지가 벌써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죽고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기음교(奇技淫巧)로 남과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공도 또한 거의 알 것입니다.211)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4쪽.

그는 방러책의 필요성을 조금은 인정하면서도 전통적인 중국의 제도를 고수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나아가 이로 인해 망하게 되더라도 서양 기 술과 문명(기기음교)의 수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방러책을 강구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견해를 강력하게 밝혔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중화주의를 고수해야 할지, 아니면 일본처럼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기도 하다.212)허동현,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 당대, 1999, 36쪽 ; 田星嬉, 「第一次修信使の日本認識-日本による‘富國强兵’勸告をめぐって-」, 『佛敎大學總合硏究所紀要別冊 近代日朝における<朝鮮觀>と<日本觀>』, 佛敎大學總合硏究所, 2000, 17쪽. 하지만 그보다는 김기수가 일본과 달리 러시아의 남하 위협을 상대적으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은데다가 서양의 근대적 기술을 받아들일 만큼 조선 조야(朝野)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응답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방러책을 위해 절대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김기수의 강경한 답변에 당황한 이노우에는 일본도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면서도 “귀국이 이미 계획을 세워 뒷날의 후회가 없기를 바란다.”는 뜻을 반드시 조정에 전해 달라는 선에서 일단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이튿날 김기수가 답례로 이노우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다시금 러시아 경계론을 거론하였다.

어제 거듭 말한 일을 공은 마음에 두고 있습니까? 러시아가 귀국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내가 이미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내가 중풍(中風)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아닌데, 진실로 정세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면 하필 이같이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공이 돌아가거든 내 말을 쓸데없다고 하지 말고, 귀국 조정에 힘써 아뢰어 일찍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어 그는 세계 지도를 내놓으면서 “가지고 돌아가서 때때로 1도(度)씩 보십시오. 1도마다 각각 이정(里程)이 있으니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러시아가 귀국과 서로 떨어진 것이 몇 리나 되는지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 진실로 정세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조선과 러시아의 근접성을 확인하여 주면서 거듭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213)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3∼425쪽.

김기수는 이노우에를 통해 일본의 대(對)러시아 경계심이 매우 높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이 그다지 심각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귀국 후 이노우에의 정보와 지도를 고종에게 보고하였을 것이고, 이는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러시아의 동향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14)『승정원일기』 1876년 6월 1일. 수신사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876년 9월 7일 고종이 청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연일방로(連日防露)’의 외교 동향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215)彭澤周, 『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 塙書房, 1969, 89쪽. 또한 그 이후 조선의 러시아 경계론에 대해서는 허동현, 앞의 책, 300∼304쪽 참조.

마지막으로 수신사 일행을 맞이해서 일본은 서구 열강의 침략 상황—특히 러시아의 남하—을 부각함으로써 조선과의 연대를 도모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진력하였는데, 김기수는 이러한 일본의 조일 연대론 제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물론 여기에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전통적인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경제적·군사적 세력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김기수도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 여러 사람에게 충고를 들었는데, 그중에는 조·중·일 세 나라의 동맹, 즉 아시아 연대론을 모색해 보라는 의견도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저들도 자립한 나라이니 자유로이 행동할 것이고, 외국인의 견제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인의 풍속이 천하에 퍼질 적에 가는 곳마다 저절로 쏠리게 되는데도, 저들은 홀로 물리치고 딱 거절하였습니다. 한때 힘이 모자라 굴복하여, 그들 서양인의 웃음과 꾸짖는 소리를 흉내 내게 되어, 겉으로는 하나의 서양인이지만 속은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리야마 시게루는 우리와 말할 때 심히 그들의 의관(衣冠)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이때 일본 관인의 의관은 모두 양이의 것을 따르고 있었다). 한번은 사람을 물리치고 그 세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내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귀국과 중국이 이같이만 된다면(3국 동맹을 이 름) 어찌 구라파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사람은 함께 서양을 방어할 술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가 이번에 가거든 반드시 그 실정을 타진하고 그와 친교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216)김기수, 『일동기유』 권1, 상략, 351∼353쪽.

비록 일본이 서양의 무력에 굴복해서 표면상 문호를 개방하고 문화를 수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므로, 서양의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해 3국 동맹론을 은근히 밝혔던 모리야마와 그 방책을 적극적으로 협의해 보라는 것이었다. 과연 김기수가 이러한 권고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 3국 동맹론 혹은 아시아 연대론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만큼은 분명하다.

김기수가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여러 차례 조일 양국의 관계를 친밀하게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먼저, 모리야마는 김기수에게 “지금에 와서 두 나라는 한집안(一家)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뒤, 사면이 모두 바다여서 외적의 침략을 받기 쉬운 일본은 ‘부국강병의 술책’을 써서 이제 외적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선 역시 외적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제 개혁, 기계 모방, 풍속 채용 등 개혁을 추진하라고 권고하였으며, 귀국 후 “부국강병을 도모해서 두 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여(脣齒相依) 외환(外患)을 방어하는 것”이 일본의 소망이라고 밝혔다. 서구의 침략을 부각함으로써 양국이 ‘한집안’ 혹은 ‘입술과 이’의 긴밀한 관계가 된 만큼 조선도 일본처럼—실제로는 일본의 원조나 도움을 받아—부국강병을 추진해서 서양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조일 연대론을 펼쳤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기수는 일본이 이미 부강해져 자력으로 외환을 방어할 수 있음에도 부국강병을 권고하고 연대를 제의한 데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자신의 주 임무가 견문이 아니라 수신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217)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18∼421쪽.

이러한 일본의 의도는 외무경(外務卿)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가 김기수에게 “강국 한 나라의 자립이 약국 두 나라가 서로 의지함만 같지 못한데, 이제 우리나라와 귀국은 거리가 작은 배로도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입술과 이처럼 이해관계가 깊은 나라”이니 서로 협력하여 하루속히 “만년 우호의 터전을 마련하자.”고 제의한 데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이에 대해 김기수는 그 뜻을 조정에 알리겠지만, “우리나라는 졸약(拙約)을 근수(謹守)하나 외교를 통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이 질박(質樸)하여 기묘한 기술(奇技妙藝)이 없어서 남을 위하여 힘을 낼 수가 없다.”면서 일본을 도와주지는 못하면서 도움을 받기 바라니 매우 부끄럽다고 답변하였다.218)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32∼433쪽. 일본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양국의 관계 개선과 강화를 역설한 반면, 김기수는 은근히 조선과 청나라의 전통적인 관계를 내세워 연대론의 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물론 김기수는 신헌이 믿을 만한 상대로 추천하였던 미야모토에게 “이제부터 두 나라는 한집안이 되었는데 귀국 조정에서 나에게 마음대로 유람하도록 해 주니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호의를 표시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신은 수신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거듭 밝혔다.219)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22∼423쪽.

또한 일본 체재 중에 그곳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양국 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자는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마스다 미츠구(增田貢)는 “이웃 나라 교의(交誼)는 금란(金蘭) 같은데 사신 맞아 맹약은 굳건하도다.”라고 읊었으며, 도라도(寅戶璣)에게는 조선과 일본은 “온 지구상에 단 하나의 형제이다.”라고 연대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시를 받았다. 그도 가이세이 학교(開成學校) 학생들에게 “외교는 법이 있어 예나 이제나 같고, 잘 지내고 보복이 없음은 형과 아우의 사이로다.”라는 형제의 우의를 담은 시를 남겼다.220)김기수, 『일동기유』 권4, 창수시(唱酬詩), 491, 496쪽. 가메다니 세이켄(龜谷省軒, 龜谷行)이 “계림(鷄林)과 쓰시마 섬 사이는 한 가닥 작은 바다뿐인데, 거기에 화륜선이 왕래하게 되니 연파(烟波) 길은 한결 가까워졌도다. …… 원하노니 자주 와 주십시오, 우리들의 심맹(尋盟)은 이제 부터입니다.” 하고 긴밀한 관계 유지를 제의하자 그는 “이별에 다다라 서러워 말고 이제부터 흐뭇이 교환해 보세.”라고 우의를 표시하였다.221)김기수, 『일동기유』 권4, 창수시, 485∼488쪽. 또한 “두 나라 사이의 교의가 일신(一新)되기를 눈을 닦고 기다릴까 하노라.”라는 그의 시에 대해서는 “다만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이제부터 깊이 사귀어 볼까 하노라.”라고 답하였다.222)김기수, 『일동기유』 권4, 창수시, 491, 494쪽.

하지만 미야모토에게 “한 사람의 지기(知己)만도 평생의 지락(至樂)인데, 두 나라의 교린이란 불세(不世)의 기연일세.”라거나, 모리야마에게 “구의(舊誼)를 다짐함은 지금부터이니 옆에서 누가 말하더라도 결단코 듣지 마시오.”라고 써서 준 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김기수는 ‘교린’ 또는 ‘구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양국의 우호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223)김기수, 『일동기유』 권4, 창수시, 497∼498쪽. 이처럼 그는 전통적인 ‘수신’의 차원에서 양국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주창하는 조일 연대론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동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그는 구호 회복론의 시각에서 일본과 우호를 돈독히 한다는 수신의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견문을 통해 김기수가 화이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일본 이적관(日本夷狄觀)’에서 점차 탈피하려는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예정에도 없던 일본 천황을 알현하면서 우리나라 국왕에게 배견하는 것과 동일한 의식을 갖추었으며, 훗날 이에 대한 비난을 염두에 둔 듯 “비록 오랑캐의 지역이고 저들이 오랑캐의 종족이라 할지라도 그 나라는 진실로 우리와 서로 필적할 만하니 우리가 어찌 구구한 의관(衣冠)만으로 잘난 체하겠는가.”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였다.224)김기수, 『일동기유』 권1, 행례(行禮), 377쪽. 일본을 조선과 ‘필적할 만한 나라’로 인정함으로써, 일본 이적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지만 점차 탈피하려는 단초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김기수의 태도는 의관을 중화 문명의 상징인 양하며 일본의 문화를 이적시하거나 무시하던 조선 후기 통신사들에 비해 진전된 것이며, 우리나라 사람이 고대 이래 일본에 대해 품어 왔던 문화 우월 의식이 엷어지는 느낌이 조심스럽게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의 관점 변화는 『일동기유』 곳곳에서 일본의 변화상과 일본인에 대해 우호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실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225)하우봉, 앞의 글, 2001, 256∼258쪽 참조.

따라서 김기수가 자신의 문명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한계를 지녔다 할지라도, 적어도 당시 조선 정계에 팽배해 있던 일본 이적관 또는 멸시관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복명(復命)할 때 고종이 여전히 “왜는 처음 왜노국(倭奴國)이라고 불렸던가?”라고 그에게 물을 정도로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일본을 바라보면서도 “지금은 매우 광대하다. 그 둘레를 가지고 논한다면 우리나라보다도 넓은데, 일찍이 일본이 이렇게까지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226)『승정원일기』 1876년 6월 1일.고 일본의 급작스런 성장에 우려를 자아냄과 동시에 놀라움을 표현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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