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3. 김기수의 일본 인식
  • 일본의 서양식 부국강병책에 주목하다
한철호

김기수는 귀국 후 일본의 부국강병 추진에 대해 “다만 저들의 하는 바를 우리는 할 수 없다. 저들은 매우 즐기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해독이 되는 일이다. 진실로 내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따라갈 수는 없다.”면서 왕도론적(王道論的) 교화관에 의거한 대응 방식을 주장하였다.234)김기수, 『일동기유』 권4, 일동기유후서, 517∼518쪽. 또한 그의 공식 보고서인 『행중문견별단(行中聞見別單)』에는 각 부분의 발전상을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뒤 “부국강병의 술책은 오로지 통상(通商)을 일삼는 것”이었는데 무역의 적자와 인플레 현상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이며, “겉모양만 본다면…… 이보다 더 부강할 수는 없지만, 가만히 그 형세를 살펴본다면 또한 장구한 술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235)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5쪽. 따라서 근대적 문물에 대한 이해와 수용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전제 아래 그가 일본의 부국강병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조선에서 수용하는 것 역시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는 평가는 매우 타당한 측면이 있다.236)하우봉, 앞의 글, 2001, 249∼250쪽 참조.

하지만 당시 조선 정계에 반일적 분위기가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며, 공개를 전제로 집필한 『일동기유』에서 자신의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일본 인식은 새롭게 해석해야 할 여지가 많다. 일본의 서양식 부국강병책 추진에 대해 거의 아무런 정보를 가지지 못한 채 부정적으로 파악하였던 상황 속에서 실상을 정확하게 소개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기수가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의 발전상에 대해 조목조목 평가한 부분을 면밀히 살펴보면, 메이지 일본의 성과와 사회상에 대해 칭찬과 비판이 엇갈리면서도 호의적으로 평가한 것이 적지 않았다.

우선 일본의 정치 제도 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원로원(元老院)에서 정사를 의논할 때 조관(朝官)은 물론 평민들까지도 모두 참석하며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에 관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온당하게 의논하여 천황에게 주달(奏達)한다고 파악하였다.237)김기수, 『일동기유』 권2, 완상 392쪽. 아울러 그는 반드시 ‘신(信)’으로 법을 제정하여 작은 일이라도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하 모두 법을 어기지 않고 각자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고 파악하면서 법의 공평한 제정과 엄격한 시행을 높이 평가하였다.238)김기수, 『일동기유』 권3, 정법, 455쪽. 행정 역시 조금이라도 틀리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업무를 처리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으며,239)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2쪽. “모든 동작(動作)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조약을 명시하고 금하고 꺼리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하나도 누락된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 정밀하고 자세해서 번쇄(煩碎)한 측면도 있지만 “상하가 같은 규정으로써 조금도 착오된 것이 없으므로 또한 취할 점이 많았다.”는 평가를 내렸다.240)김기수, 『일동기유』 권3, 속상(俗尙),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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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사카 이궁(赤坂離宮)
아카사카 이궁(赤坂離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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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천황을 직접 알현한 뒤, 정력을 다해 정치에 힘쓰고 매우 부지런해서 좋은 방향으로 제도를 변경하며, “영명하고 용단성이 있어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였다고 천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241)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1∼512쪽. 천황이 이동할 때 호위병의 규모가 의외로 적으며, 제조국에서 각종 기계를 만들어 내면서도 4∼5년 전 화재로 소실된 궁실의 공사만은 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 같다는 점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졌다.242)김기수, 『일동기유』 권2, 완상, 384∼385쪽 ; 『일동기유』 권3, 정법, 454쪽.

다음으로 김기수는 일본의 변화된 모습 중에서 근대적 군사 체제에 관해서도 주목하였다. 이는 강화도 사건을 통해 일본의 월등한 무력을 경험한 조선의 위정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관심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호령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사나운 범이 말아 가는 기세”의 진법을 사용한 육군의 보병·기병·포병 훈련을 보고 경탄하였다.

보군은 5명씩, 10명씩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한 대(隊)에는 반드시 대장이 있는데 손에는 표기(標旗)를 가졌고 또 말 탄 장수 한 사람이 왕래하면서 지휘하고 있는데 한 개의 나팔로 신호를 한다. 나팔 소리가 한 번 울리면 기(旗)가 따라서 응하고, 깃발이 움직이자마자 여러 군사가 또 일제히 움직인다.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모두 일제히 움직이고, 앉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가고, 칼을 빼고 꽂고, 총을 들고 세움에 있어 한 사람도 먼저 하거나 뒤지는 이가 없다. 왼쪽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오른쪽에서 나와 왼쪽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앞에 있던 사람이 물러나고 뒤에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혹은 달리며 지나가기도 하고 혹은 둘러싸기도 하며, 마치 상산(常山)의 뱀처럼 허리와 배에 적의 공격을 받으면 머리와 꼬리(후면)가 모두 와서 구원한다. ……

말은 모두 허리가 짧고 목은 길며, 정강이가 야위고 이마는 넓다. 두 귀를 쫑그리니 만 리 길을 달릴 만한 기세가 있다. 군사는 모두 장건하고 날랜데, 허리에 칼을 차고 손에 창을 쥐었다. 몸을 날려 말에 올라 다리로 등자(鐙子)를 한 번 부추기니 말은 나는 듯이 달렸다. 녹색의 뾰족뾰족한 방초(芳草)가 덮인 땅 위에 네 발굽이 번쩍번쩍 뒤치는 것만 보일 뿐, 한 번은 앞으로 한 번은 뒤로 호령에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는 것이 한결같이 보군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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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성 히비야(日比谷) 교련장의 군대 조련 모습
육군성 히비야(日比谷) 교련장의 군대 조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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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는 바퀴가 둘인데, 사마(駟馬)로 끈다. 위에는 장수 한 사람이 앉아 있고 앞뒤에서 군병이 호위한다. 뒤에는 또 갈고리로 연결된 소차(小車)가 있는데 이것을 끊고 잇는 것은 마음대로이다. 앞에는 대포를 설치하고 약통(藥筒)을 두었는데, 모두 구리로 만든 것이다. 한번 쫓아 달리면서 한꺼번에 대포를 쏘니, 대포는 가리키는 데를 향하게 되고 소리는 큰 들판을 진동한다. 또 말이 대포를 싣고 따라가서 땅에 내려놓고 일제히 쏘는데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명령대로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모두 마군(馬軍)과 같으나, 진법만은 한결같이 사나운 범이 말아 가는 기세이다.243)김기수, 『일동기유』 권2, 완상, 386∼387쪽.

또한 그는 해군의 함포와 수뢰포(水雷砲) 발사에 귀가 멍멍할 정도로 놀라기도 하였다.

바닷가에 집 한 채가 있는데 양쪽 머리는 가늘고 허리통은 넓어 한결같이 모두 배 모양과 같다. 그 속에 들어가 보니 10여 군데나 문을 열어 놓아서 마치 선창(船窓)과도 같다. 창문 앞에는 반드시 대포를 놓았는데, 대포에는 기륜(機輪)이 있어 바로 창문을 향하여 있다. 창문 좌우는 곧게 경사져 있는데 각각 두 줄기 철도가 있어 포륜(砲輪)이 굴러가게 되어 있다. 대포가 왼쪽으로 가면 왼쪽에서 받치고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에서 받친다. 한 사람이 작은 기(旗)를 들고 창문으로 가서 마치 적을 엿보듯이 하고, 또 한 사람은 나팔을 불어 신호를 하면 7∼8명이 화약을 재고 불을 붙여 곧장 대포를 쏘려 하니, 이때 적을 엿보고 있는 사람이 문득 기를 들고 오른쪽을 가리키면 나팔 부는 사람이 이 신호에 응한다. 그리고 대포를 쏘는 사람들이 곧 포륜을 밀어 오른쪽으로 돌면 포구(砲口)는 창문을 향하게 된다. 막 대포를 쏘려고 하는데 적을 엿보는 사람이 또 왼쪽을 가리키고 나팔 소리가 다시 나면 또 포륜을 밀고 돌린다. 그리하여 대포의 몸뚱이는 왼쪽을 향하게 되나 포구는 그대로 창문을 가리키게 된다. 조금 전에 전후 좌우로 움직이는 곳에 포륜에 맞추어 철도를 깐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적을 좌우로 엿보고 또 가는 곳을 따라 대포를 쏘니 지금 이 쏘는 연습은 적을 대한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7∼8명이 한꺼번에 힘을 합하여 미는 사람은 밀고 정비하는 사람은 정비하며, 탄환을 나르는 사람은 탄환을 나르고 화약을 재는 사람은 화약을 잰다. 불을 붙이는 이는 불을 붙여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다리가 어지럽게 활동하여, 한 번 숨 쉬는 동안에 여러 대포가 한꺼번에 터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어 두 귀가 멍멍하다. 대포를 쏠 때 전어관(傳語官) 2명이 내 앉은 자리 양쪽 가로 달려와서 나를 단단히 붙잡아 안정시키니 이는 내가 놀라 움직일까 염려함이다. 나는 웃으며 “내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벌써 부동심(不動心)할 나이가 지났는데, 약간의 대포 소리쯤이 어찌 나를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244)김기수, 『일동기유』 권2, 완상, 386∼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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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병학료
해군 병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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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김기수는 일본 정부가 평상시에 7∼8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고 있고, 육군성과 해군성(海軍省)의 군사도 “모두 기계에 정통하고 군율에 숙련하여 군대의 모든 동작에 명령을 어기지 않았으며” 육 상과 해상에서 사용하는 대포 작동도 신속하고 정확하였다고 파악하면서 “이러한 강병(强兵)이 있고 이러한 이기(利器)가 있어도 오히려 부지런히 일하여 쉴 사이가 없었다.”고 총평하였다.245)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4∼515쪽. 귀국 후 “그들 군사의 병기는 매우 강하던가?”라는 고종의 질문에 김기수는 “매우 강하였습니다.”라고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246)『승정원일기』 1876년 6월 1일.

한편 김기수는 일본의 부강책 추진 상황과 실태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성리학적 관점에서 일본의 경제 정책을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른바 부국강병의 술책은 오로지 통상만을 일삼는 것이었는데, 통상도 자기 나라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피차간(彼此間)에 거래가 있어, 이쪽에서는 저쪽에 가서 통상을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에 와서 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이 세계 각국에 통상을 하는 것이 그 수효가 매우 많지만, 가서 통상을 하는 나라는 일본 한 나라뿐이고, 와서 통상을 하는 나라는 세계의 여러 나라인데,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이 반드시 세계 각국보다 10배나 되지는 않을 것이니, 생산하는 사람은 하나뿐이고 소모하는 사람은 여럿이 되면 물가가 등귀(騰貴)하는 것은 현세(現勢)가 그렇게 때문인 것입니다. 이에 날마다 전폐(錢幣)를 만들어 이것을 당해 내게 되니, 돈은 천하게 되고 물건은 귀하게 되므로 이것은 반드시 실패하는 도리입니다. 하물며 교묘하지 않은 기술이 없고 정교하지 않은 기예가 없이 대자연의 이치를 다 이용하여 다시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겉모양을 본다면 앞에 진술한 여러 조목과 같이 이보다 더 부강할 수 없지만, 가만히 형세를 살펴본다면 또한 장구한 술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247)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5쪽.

그는 무역의 폐해를 거론하면서 메이지 일본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총평하고 수요를 예측하여 선박, 차 등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이해하지도 못하였지만, 그로 인해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여서 국가의 재정이 풍부해졌다는 점만큼은 인정하였다. 비록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만 한결같이 이익만 취하였지만”, “백성에게 이익이 되면 국가에는 저절로 이익이 될 것이며 하물며 연말의 세금 수입은 국가의 이익이 또 만 배나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국가에서는 놀고먹는 백성은 모두 죄로 다스리고, 일하는 사람은 모두 봉급을 받기 때문에 “걸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부러움을 나타냈다.248)김기수, 『일동기유』 권3, 정법, 455쪽

또한 김기수는 일본의 근대적 교육 제도에 대해서도 긍정과 부정의 두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서양의 학문을 하는 자도 있던가?”라는 고종의 물음에 “서양의 학문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겠으나, 군사를 기르고 논밭을 경작하는 데에 모두 서양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체재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던 만큼 그가 서양의 학문 수용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파악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김기수 자신이 관료이자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적 교육 제도를 무관심하게 지나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이른바 학교에서 교육하는 방법은 사대부의 자제들과 평민의 준수한 사람들은 7∼8세 때부터 글을 배우고 글자를 익히도록 지도하는데, 처음에는 일본 글자를 가르치고 다음에는 한자를 가르쳤습니다. 16세가 되면 다시 경전(經典)을 읽히지 않고 큰 것으로는 천문, 지리, 산수의 학문과 작은 것으로는 농기(農器), 군기(軍器), 도형(圖形)의 설명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헤아려 잠시도 걷어치우지 않았으며, 여자까지도 또한 학교가 있어 큰 것으로는 천문, 지리, 병학, 농학과 작은 것으로는 시문서화(詩文書畵)까지도 모두 한 가지 기예를 전공하였습니다.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영사관의 직책으로 와서 머물게 되므로, 또한 반드시 사람들을 밥 먹이면서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후대하면서 자기는 낮추게 되니, 요는 기술을 다 배워서 기계를 잘 이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각국에 사람을 보내어 다 배우지 못한 기술을 모두 배워서 곳곳마다 화륜선과 화륜차를 만들고, 또 사람을 시켜 먼 곳에서 상업을 경영하게 하였으니, 요는 그 힘을 다하여 그 재화를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 상하가 부지런하게 이익을 위하고 부국강병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대개 그 정령(政令)이 위앙(衛鞅, 상앙(商鞅))의 유법(遺法)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249)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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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세이 학교
가이세이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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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이 서양 배우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서술하면서 궁극적인 목적이 ‘부국강병’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를 근거로 그는 일본의 학교 교육에 대해 약간의 호의를 갖기도 하였다.

이른바 학교도 명칭이 하나뿐이 아니니 개성(開成) 학교도 있고 영어 학교도 있고, 여러 외국어 학교도 있었다. 사범(師範, 사법(師法)과 모범이 된다는 말)이 정중하고 교수함도 근실하였으나 공리(功利)의 학문에 지나지 않았다. 매우 부지런하고 노력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정교함은 미칠 수 없으며, 근실함은 더욱 미칠 수 없었다. 계산을 정밀히 하고 규획(規劃)을 상세히 함은 바로 진나라 상앙(商鞅)도 풍문만 듣고 달아날 정도이며, 송나라 왕형공(王荊公, 왕안석(王安石))도 옷을 여미고 경의를 표할 만하였다.250)김기수, 『일동기유』 권3, 속상, 447∼448쪽.

그러나 그는 일본의 근대적 교육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 안목에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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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마 성당 일대
유시마 성당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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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과 교통한 후로는, 신당(神堂)은 우거진 풀밭이 되고 중들은 구렁에 엎어지게 되었으니, 부국강병의 술책에 바빠서 이런 것에는 생각이 미칠 여가도 없었으며, 또한 이것은 모두 허문(虛文)이므로 실사(實事)에는 이익 됨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의 옛날 풍속 숭상은 신도(神道)를 먼저 하고 불교를 나중에 하였으며, 또 불교를 먼저 하고 유교를 나중에 하였는데, 신도와 불교가 이 모양인데 유교는 다시 무엇을 논의하겠는가.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 교습시킬 적에 나아가 8세에서 15세까지는 국문(國文)과 함께 한자를 읽게 하고, 한자를 이미 통하면 다시 경전은 읽지 않고, 농서·병서·천문·지리·의약·종수(種樹)의 글만 즐겨서 상시로 읽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녀·상인·어린아이들까지도 계척(界尺, 문구(文具))을 한번 내리면 성위(星緯, 천문)를 헤아리게 되고, 호령 소리가 조금 일어나면 지여(地輿)를 가리키게 되었으나, 만약 공자·맹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이내 눈이 둥그레지고 입을 머뭇거리면서 그것이 무슨 말인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251)김기수, 『일동기유』 권3, 속상, 447쪽.

요컨대 그는 일본의 근대적 교육에 대해 부분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유학을 천시 또는 경시하는 풍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이 서양인과 교통한 후 부국강병의 술책을 도모하는 데에만 힘써서 유교뿐 아니라 불교와 신도 역시 ‘실사’에 이익이 되지 않는 ‘허문’으로 간주되어 쇠퇴 일로(衰退一路)를 걷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의 영정(影幀)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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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렴의 글씨
김세렴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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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성은 곧 태학(太學)이다. 궁장(宮墻)이 두서너 길이나 되고 동부(洞府)는 깊고 엄숙한데, 계단을 따라 층계를 올라가서 들어간다. …… 좌우 벽에는 주자(周子, 주돈이)·이정자(二程子, 정호와 정이)·장자(張子, 장재)·소자(召子, 소옹)·주자(朱子, 주희)의 영정을 걸었는데, 낙관(落款)은 모두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1636년에 통신사행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의 친필 이다. 아마 그가 통신사로 왔을 때 쓴 것 같다. 연대는 멀어졌지만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다.252)김기수, 『일동기유』 권2, 완상, 391∼392쪽.

이러한 태도는 일본이 “옛날에는 문자가 없었는데, 우리의 삼국시대에 백제 사람 왕인(王仁)이 서적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도 우리나라 사람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하고 있다.”고 조선의 상대적인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253)김기수, 『일동기유』 권3, 학술(學術), 464∼465쪽. 하지만 그는 서양식 교육이 ‘공리의 학문’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도 “매우 부지런하고 노력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정교함은 미칠 수 없으며, 근실함은 더욱 미칠 수가 없었다.”면서 경의를 표할 만하다고 평하였다.254)김기수, 『일동기유』 권3, 속상, 447∼448쪽 ; 『일동기유』 권3, 학술, 465∼466쪽.

김기수는 “들어볼 만한 풍속에 관해서도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는 고종의 물음에 “그들의 풍속은 대체로 부국강병에 힘쓰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제도 역시 부국강병과 연관 지어 파악하였다. 이러한 인식 아래 그는 일본의 사회 제도 또는 풍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개 그 옛날 풍속은 스스로 과장하기를 힘쓰고 남의 아래 되는 것은 치사스럽게 여겼다. 기물(器物)과 완호품(玩好品)까지도 한 번 쓰고 나면 반드시 바꾸어 새것으로 쓰되, 오히려 남들이 한 가지 그릇으로 두 번 쓰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면 반드시 손님 앞에서 부수어 버려 다시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과장하고 속이는 기풍은 옛날보다도 곱절이나 더하고, 인색한 습성은 베어 버릴 수 없으므로 경미한 물질에도 서로 다투게 되고 하찮은 음식물에도 사색(辭色)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절식(節食)·절용(節用)하는 것이므로, 또한 부국강병 중에서부터 온 것이다.255)김기수, 『일동기유』 권3, 속상, 449∼450쪽.

이상과 같이 일본의 부국강병 추진에 대한 김기수의 양면적인 인식은 육군성 정조국의 증기 기관을 관람하고 난 뒤 다음과 같이 탄식한 데서 잘 드러나 있다.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한 개의 화륜으로써 천하의 능사(能事)를 다 만들게 되니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괴이(怪異)이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 나에게 유람할까 봐 저지한 사람은 옳았고,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사람은 옳지 못하였는데, 나는 그 옳은 말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나의 유람은 옳지 못한 일이었는가. 기기음교도 또한 말로는 이것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한다고 하니, 이용후생하는 것이라면 이를 배워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보는 것쯤이랴. 그렇다면 나의 유람이 옳은 것이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저들이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것은 정녕 도리에 위반되지 않았고, 동시에 나의 유람도 이편에서 먼저 서두르지 않았을 뿐이다.256)김기수, 『일동기유』 권4, 문사, 부관육군성정조국기, 505쪽.

유교적 관념에 따라서 ‘천하의 능사’를 다 만드는 화륜을 ‘기기음교’로 단정하면서도 ‘이용후생’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위정척사 사상이 우세한 당시 정계의 분위기를 강하게 의식한 듯 부득이 ‘기기음교’를 목격하게 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였지만, 그의 본심은 서양 기술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역설한 데 있었다.

김기수는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조일 수호 조규 체결 당시 고종을 비롯한 일부 위정자들이 제시한 왜양분리론을 적극 활용하였다. 일본과 서양을 동일시하면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서양식 부국강병책을 유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김기수와 미야모토가 나누었던 대화에서 단초(端初)를 엿볼 수 있다. 미야모토는 새로 만든 기물만 보면 반드시 갖고 싶어 하는 일본인의 심리와 전쟁의 편리함을 위해 의복(衣服)과 궁실(宮室) 을 모두 서양제로 만들었다고 변명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사면에 적국(敵國)이 있는 것은 또한 귀국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강조한 뒤, “우리가 고심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내외의 산하를 보수(保守)하고자 할 뿐이지, 우리나라인들 어찌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해서겠습니까.” 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김기수는 “그 일은 걱정할 것 없다.”고 일종의 위로를 표시하면서 “귀국이 고심하며 이 일을 하는 것은 우리도 벌써 촌탁(忖度)한 지 오래이다.”라고 답하였다. 일본이 서양의 침략 위기를 맞이해서 국가의 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서양식 부국강병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257)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17∼418쪽. 즉, 일본은 표면상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고 일본과 서양을 분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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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오카 제사장(富岡製絲場)
도미오카 제사장(富岡製絲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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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역시 김기수의 체재 기간 중 왜양을 일체로 보는 조선의 의구심을 씻어 내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김기수 일행이 공학료를 방문하기 전 공부성은 그곳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교수에게 상급생 이 일련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준비시키되, 교수 자신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지시하였던 일을 꼽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수신사에게 이 학교가 외국인의 도움 없이 조직·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서양인과 접촉하기를 꺼리는 수신사의 감정을 배려하였기 때문이다.258)『North China Herald』, 1876년 7월 1일자.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배려를 김기수가 눈치 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서양인에게 각종 근대적 기술과 제도를 습득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천하 각국 사람들이 모두 영사관의 직책으로 와서 머물게 되므로, 또한 반드시 사람들을 밥 먹이면서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후대하면서 자기는 낮추게 되니, 요는 기술을 다 배워서 기계를 잘 이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각국에 사람을 보내어 다 배우지 못한 기술을 모두 배워서 곳곳마다 화륜선과 화륜차를 만들고, 또 사람을 시켜 먼 곳에서 상업을 경영하도록 하였으니, 요는 힘을 다하여 재화를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 상하가 부지런하게 이익을 위하고 부국강병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대개 그 정령이 위앙(衛鞅)의 유법(遺法)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259)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견문별단, 513쪽.

일본이 서양인 고문관을 후대하면서 기술을 배울 뿐 아니라 서양 각국에 사람을 파견해서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기수는 ‘왜’와 ‘양’을 분리하여 상정함으로써 서양의 기술 등을 간접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였다. ‘왜’가 ‘양’과 일체 되지 않고서 ‘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듯이, 우리도 ‘왜’를 통해 간접적으로 ‘양’의 기술 등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260)그는 귀국 도중 서양인이 배에 탄 것을 발견하고, 서양인을 태울 수 없다며 하선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는 궁극적으로 위정척사파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나아가 왜양분리론을 간접적으로 강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김기수의 서양관이 여전히 변화가 없었을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반개화’의 태도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김기수, 『일동기유』 1, 정박, 368∼369쪽 ; 田星嬉, 「第一次修信使のみた明治日本について」, 『佛敎大學總合硏究所紀要』 5, 1998, 78∼79쪽 참조).

이러한 논리의 배경에는 일본이 서양식 부국강병을 추진한 결과 몇몇 분야에서 청나라보다 낫다는 그의 인식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는 일본 체재 중 “폐질(廢疾) 있는 사람과 빌어먹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 하였다.”면서 청나라를 10여 차례나 방문해서 안목이 높은 한학당상 이용숙이 천하의 온갖 형태 사람들을 다 보았으나 “10분의 1과 1000분의 100은 절름발이, 애꾸눈이, 난쟁이가 왕래하고 의대(衣帶)가 남루한 사람이 왕래”하였는데 “오늘 본 사람도 또 만만(萬萬)이나 되지만 폐질자와 걸인은 한 사람도 없으니, 이것은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셈이다.”라고 감탄한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261)김기수, 『일동기유』 권3, 인물, 442∼443쪽. 그뿐 아니라 도쿄·요코하마·고베 등의 도시를 둘러본 그는 “여염(閭閻)의 은성(殷盛)함과 시사(市肆)의 풍부함은 처음에 보고서 이를 장하게 여기는 것은 혹시 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자신의 소감을 먼저 밝힌 뒤, “여러 번 이것을 본 중국 사람들도 ‘중국보다도 더 은부(殷富)하다’고 말하였다.”는 평가를 덧붙였다.262)김기수, 『일동기유』 권4, 환조, 부행중문견별단, 514쪽. 이 밖에도 김기수, 『일동기유』 3, 인물, 442∼443쪽 ; 『일동기유』 권3, 속상, 451쪽 ; 『일동기유』 권3, 학술, 466쪽 ; 『일동기유』 권3, 기예, 468쪽 참조.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김기수가 일본의 부국강병 추진에 대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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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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