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1. 조사 시찰단의 파견과 활동
  • 조사 시찰단의 구성과 활동
허동현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조사는 어떤 면면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떤 배경과 식견을 가졌기에 조사로 선발될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조사로 선발된 이들 대다수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반남 박 씨(潘南朴氏), 풍양 조씨(豊壤趙氏) 등으로 종실(宗室)이나 벌족(閥族)에 속하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또 이들은 2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었으며, 과거 급제 후 적어도 10년 가까이 관직(館職)에 종사한 종2품계 이하 정4품계 이상의 중견 관료로 이전에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관등이나 경력에 뒤질 것이 없었다. 군사 관계 업무를 맡은 이원회와 김용원을 제외한 조사 모두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주로 홍문관(弘文館)이나 대간(臺諫) 출신의 언관(言官)으로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고, 고종을 가까이 모시던 근시(近侍)로서 경연(經筵)에 나아가 각종 정치 문제에 대해 조언하였다. 또한 이들은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근왕(勤王) 세력이었다. 이는 대간들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시찰단을 파견하기 두 달 전에 유배가 있던 박정양과 강문형을 다시 불러 쓴 데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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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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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과 홍영식은 출중한 활동으로 조사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중심인물이었다. 이는 시찰단 파견과 관련하여 일본과의 교섭 업무를 맡았던 김홍집과 이조연(李祖淵)이 조사들의 인적 사항을 묻는 일본 공사의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조사로 선발되기 전에 박정양·엄세영·강문형·어윤중·이헌영은 암행어사로, 엄세영·강문형·민종묵·김용원은 청나라 혹은 일본 파견 사절로, 이원회·김용원은 군사 전문가로 활약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실무 능력과 전문 지식을 겸비한 정예 관료였다. 이 가운데 어윤중은 1877년(고종 14)에 전라 우도 암행어사로 있을 때 고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조사로 발탁되었다. 다른 조사들도 풍부한 학식을 높이 인정받았던 것 같다. 이들은 모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권좌(權座)에서 물러난 뒤에 득세한 민씨파에 속하는 인사들이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보고에 따르면 박정양, 어윤중, 조준영, 홍영식, 심상학, 엄세영, 강문형은 ‘민씨당(閔氏黨)’ 사람들이었다. 특히 어윤중과 홍영식은 시찰단의 파견을 후원한 민영익의 집을 드나들던 이른바 ‘8학사(學士)’에 속하였으며, 김용원도 민영익 의 집에 출입하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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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연
이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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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들의 성명과 관직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승지(承旨) 홍영식과 응교(應敎) 어윤중 두 사람은 우리 측 사람인데 완고(頑固)하지 않으며 평소 지기(志氣)가 있어 이 시찰단을 능히 이끌 수 있는 인물이다.305)『日本外交文書』 14 : 8, # 122, (2/20), 하나부사가 이노우에에게 보낸 문서, 292쪽.

사실 홍영식과 어윤중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 이미 약간의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일본에서 만난 주일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도 “일행 가운데 어윤중과 홍영식 두 사람이 매우 개명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이들이 맡은 임무가 부국강병책 추진의 핵심 기관인 대장성과 육군성의 사무를 파악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조사들과 달리 어윤중에게는 유학생 관리와 미국과의 수교 교섭 임무가 더 부여되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특히 그러하다.

김용원은 조사 시찰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사실 동래 암행어사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 무위소(武衛所)에서 별도로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별도의 경비를 지급받았고, 다른 조사들이 귀국한 후에도 계속 일본에 체류하면 서 화학을 배우는 등 특별한 활동을 하였다. 그의 이력은 다른 조사들의 경력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독특하다. 그는 제1차 수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에서 기계와 총포, 아연 등을 구입한 바 있던 기술직 전문가였다. 그는 이동인과 마찬가지로 고종 때 궁궐 호위를 전담하던 무위소 소속으로, 이동인이 실종된 이후 그를 대신하여 조사 시찰단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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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영
이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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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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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조사들의 임무 수행을 보필하였던 수행원은 어떤 면면의 인물이었을까? 수행원 역시 대부분 양반 출신인데, 그 가운데 최성대(崔成大)나 왕제응(王濟膺)을 비롯한 몇몇은 오위장(五衛將), 참봉(參奉) 같은 하위직 관리였다. 그 밖에 중인 출신이 다섯 명이었고, 윤치호처럼 서손(庶孫) 출신도 있었다. 대체로 수행원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임명한 것이 아니라 조사와 사적인 인연으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강진형(姜晉馨)·이필영(李弼永)·민재후(閔載厚)는 조사와 인척 관계로, 이상재(李商在)·유길준은 친분으로 발탁된 것 같다. 그리고 윤치호는 스승으로 인연을 맺은 어윤중과의 관계로 수행원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향리(鄕吏)를 지냈던 변택호(邊宅浩), 전낙운(全洛雲), 고영희(高永喜), 박회식(朴晦植)은 그전에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점과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선발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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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 일가
윤웅렬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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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유길준, 윤치호, 유정수(柳正秀), 김양한(金亮漢)은 조선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뽑혔다. 김용원의 수행원이던 손붕구(孫鵬九)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과거(科擧)를 포기한 이른바 ‘선각자’들이었다. 윤치호가 일본 유학을 결행하게 된 데에는 신동(神童)으로 소문날 정도로 수재였던 그의 개인적 재능과 제2차 수신사행으로 일본의 앞선 문물을 직접 보고 돌아온 부친 윤웅렬(尹雄烈)의 권유, 스승이던 어윤중과의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306)허동현, 앞의 책, 2000, 30∼31, 57∼59쪽.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서손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관직에 올라 출세하기 어려웠던 데서 찾을 수 있다.307)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서자 출세자’였다. 황현, 『매천야록』, 국사 편찬 위원회, 1955, 93, 117쪽 ; 유영익, 「갑오개화파 관료의 집권 경위·배경 및 개혁 구상」, 『갑오경장 연구』, 일조각, 1990, 189쪽. 함께 유학길에 오른 유길준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도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영향으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시무학(時務學)이라는 신식 학문에 도전한 것과 달리, 윤치호는 신분적 특수성에 기인하여 유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08)그가 신분적 한계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음은 1884년 12월 21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은, 다음과 같은 윤웅렬과 미국 공사의 대화 내용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저녁때 가친(家親)께서 미국 공사를 방문하여 개탄하기를, ……‘지금의 조정은 서족(庶族)을 물리치는 것을 주장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 공사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이 큰 액운을 다 마치지 못한 까닭이다. 가만히 세월을 기다리되 힘써 외국과 널리 상업을 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나날이 새로워지는 일을 꾀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루어질 것이며 완고한 습속(習俗)을 고치지 않아도 저절로 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병기, 앞의 책, 219쪽. 왜냐하면 과거가 관직 진출의 등용문으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반 명문가 자제는 해외 유학에 나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 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하여 서양의 근대 학문을 배운 유길준과 달리 윤치호가 농업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던 것도 그의 태생적인 한계를 잘 말해 준다.309)박영효(朴泳孝), 『사화기략(使和記略)』, 고종 19년 임오(壬午) 11월 17일조, 국사 편찬 위원회, 『수신사 기록』, 국사 편찬 위원회, 1971, 231, 264쪽. 한마디로 윤치호, 유길준 같은 이들은 전통적 학문 체계, 즉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 근대 학문을 쉽게 받아들일 소지가 컸던 주변인이었다.

그러면 조사 시찰단의 일본 시찰 일정과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살펴보자. 동래 암행어사로 임명된 조사 12명이 출발지 동래부에 모두 집결한 것은 3월 25일(음력)이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어윤중과 홍영식이, 28일에는 나머지 조사들이 일본 영사 곤도 마스키를 예방(禮訪)하였다. 29일에는 정병하가 고종이 조사 시찰단 경비로 하사한 5만 냥을 일본 돈으로 환전하여 김용원을 제외한 11명에게 1,366엔씩 지급하였다(당시 환율은 1엔에 3냥 3전 3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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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의 영가대
부산포의 영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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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
영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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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에는 판찰관(辦察官) 현석운(玄昔運)을 통해 선박을 임대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일본 화륜선(火輪船) 안네이마루(安寧丸)에 오르기에 앞서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영가대(永嘉臺) 정자 아래에서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해신제(海神祭)를 올렸다. 그때의 제문(祭文)에는 비장감이 묻어났다. 당시 시찰단 대다수가 난생처음 타국 땅을 밟는 데다가 일본을 다녀온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배를 타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길일을 가려 만 리 길에 배를 띄워 멀리 험한 물결을 건너려 하옵니다.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믿겠사옵니까. 오! 가장 높고 훌륭하신 신께서 이 뱃길을 주관하시니 제향(祭饗)에 임하셨으면 보호하여 지켜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바람 신인 풍백(風伯)은 꾸짖어 물리치시고 비를 내리게 하는 우사(雨師)도 물러나게 해 주십시오. 파도도 잔잔하게 하시고 배는 달리듯 빠르게 하시어 편안히 갔다가 무사히 귀환하게 해 주소서. 이는 다 신께서 내려 주시는 바이니 삼가 정성껏 목욕재계하고 오늘 저녁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 희생(犧牲)과 술을 바치오니 흠향(歆饗)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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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의 풍경
고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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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의 풍경
요코하마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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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4월 9일에 시찰단은 일본을 향해 출항하였지만, 기상 악화로 회항하였다가 10일(양력 5월 7일)에 다시 출발하였다. 시찰단은 지방관의 안내 를 받아 쓰시마 섬(對馬島), 나가사키(長崎), 오사카, 쿄토, 고베, 요코하마(橫濱) 등지의 산업 시설을 시찰한 다음 같은 달 28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이후 시찰단은 일본 조정의 협조 아래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시찰단은 주로 담당 분야의 일본 측 관리들을 만났으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한문으로 옮겼다. 예를 들어 세관 사무를 담당하였던 이헌영은 도쿄로 가는 길에 들른 나가사키와 고베 세관에서부터 세관 업무를 조사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조사 활동은 외무성 대서기관(大書記官)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少一)를 만나 조언과 협조를 얻으면서 시작하였다. 그는 관세국과 요코하마 세관 관계자들을 만나 세관 운영과 관련한 정보를 얻는 데 주력하는 한편 『조약유찬(條約類纂)』, 『부산원산반년수출입표(釜山元山半年輸出入表)』, 『세관사례(稅關事例)』 등 관련 문헌도 수집하여 일본 한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문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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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영
이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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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찰단은 각자 임무를 수행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추진한 부국강병책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근대 시설과 육해군의 훈련 실황 등을 폭넓게 시찰, 조사하였다. 또한 정계, 경제계, 교육계 등 각 분야의 인사들과도 교유(交遊)하였다. 물론 조사들 사이에는 시찰한 시설이라든가 접촉 인사의 범위와 수준에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박정양은 주로 내무성과 농상무성(農商務省)에 관련된 시설을 시찰하고 이 계통의 인사를 접촉하였으며, 다른 조사들도 주로 자신이 담당한 부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시설을 시찰하고 인사를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일본의 근대 시설을 둘러보았고 여러 계통의 인사와도 폭넓게 교유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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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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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정신편』
『농정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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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도 군사·산업 기술 등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얻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송헌빈(宋憲斌)은 이원회를 보좌하여 구마모토(熊本) 포대, 이타바시(板橋) 화약 제조소, 사관 학교, 도야마(戶山) 학교, 군용 전신국, 근위 병영, 포병 공창과 같은 군사 관련 시설을 폭넓게 조사하였다. 그는 주로 포병 공창에서 탄환, 뇌관, 화약 제조법과 군사 기술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으며, 일제 무라다 총(村田銃)과 미제 레밍턴 총(Remington銃), 전기 지뢰 같은 신식 화기의 성능과 전신 등의 통신 체계 운용 방법에 대한 정보도 모았다. 이 밖에도 그는 유리·설탕·성냥 제조법, 도자기 채색 기술, 제사·제지·조선 등의 일반 산업 기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말라리아 치료법, 퀴닌(quinine) 제조법 같은 의료 기술까지 조사, 연구하였는가 하면 황산·초산·염산·염화칼륨의 제조 공정도 상세히 조사하였다. 특히 염화칼륨은 대량 생산할 경우 기존의 초목(草木)을 태운 재를 대체해 농업 생산력을 급증시킬 수 있는 화학 비료의 원료였다. 또한 황산·초산·염산 등도 비료나 폭약 같은 공업용이나 군수용 등의 공업 일반에 폭넓게 응용할 수 있는 기초 화공 약품이었다. 요컨대 송헌빈은 일본 내에서 접할 수 있는 서양 근대 기술 가운데 군사, 산업, 농업, 의료 전 분야에 걸쳐 실용성이 있다고 판단한 정보와 지식을 폭넓게 수용하려 하였다.

조병직의 수행원 안종수(安宗洙)는 주로 서양식 근대 농법의 수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농업 관련 학자와 관료를 두루 만났는데, 그 가운데는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 쓰다 센(津田仙)도 있었다. 그는 쓰다 센에게 근대 농학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귀국 후 1881년 말에 『농정신편(農政新編)』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밖에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온 유길준과 유정수는 5월 12일(양력 6월 8일)에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당시 일본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으며, 게이오기주쿠 최초의 외국인 유학생으로 서양 근대 학문을 본격적으로 연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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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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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일본 도착 후 농업 학교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의 소개로 1881년 5월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였다.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세운 이 학교는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기주쿠에 필적하는 교세를 자랑하였다. 그는 여기서 신학문 수용을 위한 전 단계로 일본어를 배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뿐 아니라 1882년(고종 19) 말에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일본에 건너간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1월부터 귀국 전까지 3개월여 동안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Leon V. Polder)와 프랑스인 건축가 폴 사르다(Paul Sarda)에게서 영어를 배웠다.310)윤치호, 「풍우 20년 : 한말 정객의 회고담」, 『동아일보』 1930년 1월 11일자 ;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24∼26쪽 ; 김명배, 「좌옹 윤치호 박사의 영학(英學)」, 『금랑 문화 논총 금랑 노석경 선생 화갑 기념 논문집』, 한국 민중 박물관 협회, 1981, 114쪽.

윤치호는 일본 유학 기간 중 일본에 온 김옥균, 서광범(徐光範),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와 민영익 같은 실력자, 주일 영국 공사관의 공사 파크스(Harry. S. Parkes)와 서기관 사토(Ernest M. Satow), 미국 공사 빙엄(J. A. Bingham), 도쿄 대학교의 바실 체임벌린(Basil H. Chamberlain) 교수와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 교수 같은 서구 외교관과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나카무라 마사나오,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일본 지식인과 정계 지도자와도 접촉하면서 세계 대세의 흐름과 근대 지식에 관해 눈뜬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하던 『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을 구독하였으며, 후쿠자와 유키치가 저술한 『서양사정(西洋事情)』, 『학문의 권장(學文のすすめ)』,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을 비롯하여 당시 일본에서 널리 읽혔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입헌정체략(立憲政體略)』과 『국체신론(國體新論)』,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의 『민약역해(民約譯解)』 같은 서양 정치사상 소개서도 폭넓게 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11)유영렬, 앞의 책, 27∼30쪽 ; 유영익, 「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 『갑오경장 연구』, 일조각, 1990,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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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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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한은 조사 시찰단이 귀국한 후 요코스카(橫須賀) 조선소에서 항해술을 배우고 가마이시(釜石) 광산에서 주철 기술을 학습하여 1882년 11월경에는 일본 조정이 발행하는 자격증까지 취득하였다. 손붕구는 원래 도쿄 대학교에서 의학을 연수할 계획이었으나 어학 능력이 부족하여 입학이 여의치 않자 시나가와(品川) 유리 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유리 제조 기술을 배웠다.

조사 어윤중과 김용원, 그리고 유길준 등 유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조사 10명과 수행원들은 7월 14일에서 23일 사이에 도쿄를 떠나 4개월 만에 귀 로에 올랐다. 이들은 나가사키에 모두 모여 윤7월 초하룻날에 귀국선을 타고 출항한 지 하루 만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 후 이들은 8월 25일에서 9월 2일 사이에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자신이 맡은 임무 이외에도 유학생을 감독하고 미국과의 수교 교섭에 임할 것을 지시받았던 탓에 다른 조사들이 귀국한 후에도 일본에 남았다. 그때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이홍장 등 청나라의 실력자들과 미국과의 수교, 베이징에 공관 개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바닷길 통행 재개, 유학생 파견 등에 관해 협의한 후 다른 조사들보다 다섯 달가량 늦은 11월 10일 부산을 통해 귀국해 12월 14일에 복명하였다. 김용원은 그대로 일본에 머물렀다.312)허동현, 앞의 글, 1995, 26∼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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