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2. 근대 국가의 표상으로서의 일본
  • 조사 시찰단의 일본 보고서, 시찰기
허동현

조사 시찰단이 남긴 시찰기류에 속하는 주요 보고서에 담긴 일본 제도나 기구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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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농상무성각국규칙』
『일본국농상무성각국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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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양은 내무성 사무를 파악, 보고할 임무를 맡아 내무성과 관련 부서의 소관 업무, 직제, 사무장정(事務章程)을 비롯해 각종 행정 실무에 관한 여러 규칙에 이르기까지 메이지 일본이 갖추어 놓은 근대적 행정 체계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조사, 파악한 『일본국내무성직장사무(日本國內務省職掌事務)』와 총 3책의 『일본국내무성각국규칙(日本國內務省各局規則)』을 남겼다. 이 밖에도 1880년(고종 17) 말 내무성에서 분설(分設)된 농상무성의 사무와 농상업 정책 체계에 관한 보고서 『농상무성직장사무(農商務省職掌事務)』를 『일본국내무성직장사무』에 부록해 놓았다. 또한 총 2책의 『일본국농상무성각국규칙(日本國農商務省各局規則)』이라는 농상무성 관계 시찰 기록도 남겼다. 이 보고서들은 일본의 내무성과 농상무성 및 산하 부서의 소관 업무, 직제, 사무장정을 비롯해 내무와 농상무 관계 행정 실무에 관한 각종 규칙을 망라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문건들은 단순히 제도나 규칙만을 등재해 놓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내무 행정 관계 보고서에는 호적 관리, 국토 측량, 보건 위생 등 일반 행정 업무와 3부 37현의 지방 행정 및 경찰 업무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모든 행정 사무를 통일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내무성 중심의 중앙 집권적 행정 체계를 기술하고 있다. 아울러 제한적인 지방 자치제라고 할 수 있는 선거 제도에 입각한 부현회(府縣會) 의원의 선출 방법과 투표 제도, 과반수 찬성에 따른 의결 등 민주주의 원리 및 치안과 사회 질서 유지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집회나 출판에 대한 정치적 사찰 활동에까지 미치는 경찰의 직능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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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장면
선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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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왕조의 전통적 행정 제도의 난맥상(亂脈相), 예컨대 궁중(宮中)과 부중(府中) 행정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기능이 겹치는 관료 기구의 병립(竝立) 또는 난립(亂立)으로 인해 정부 기구 상호 간의 상하 명령 체계가 불분명하고 각 부서 간의 소관 사항이 중복된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이 문건들에 담긴 메이지 일본의 행정 체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1881년 이후 조선의 행정 제도 개편이나 정치적 변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장성의 기능을 살피는 임무를 맡았던 어윤중은 『일본대장성직제사무장정(日本大藏省職制事務章程)』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대장성의 직제와 사무장정을 비롯해 조세국, 관세국, 국채국, 은행국, 회계국 등 예하 13국의 직제와 사무장정을 파악해 놓은 보고서이다. 이 책에 담긴 중앙 집권적 재정 기구의 운영에 관한 정보는 어윤중이 1882년(고종 19) 감생청(減省廳)이라는 개혁 추진 기구의 책임자로 활동할 때 호조(戶曹) 중심의 재정 운영 체계의 확립을 도모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개화기 조선의 경제 제도 개혁에 활용한 자료였다고 판단된다.

사법성 사무의 파악을 지시받은 엄세영이 남긴 총 7책의 『일본사법성시찰기(日本司法省視察記)』는 사법성 등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갖춰 놓은 사법 체계와 민법(民法) 초안을 제외한 법전 전부를 채록한 보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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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법성시찰기』
『일본사법성시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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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법성시찰기』 1권에는 사법성과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大審院)을 비롯한 각급 재판소의 사무장정과 직제 등이 수록되어 있다. 2권에는 1882년 시행 예정인 형법(刑法)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3, 4권은 치죄법(治罪法)과 소송법(訴訟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5권은 감옥칙(監獄則)에 대한 내용이고, 6권은 메이지 유신 직후에 만들어진 형법전인 신율강령(新律綱領)과 개정율례촬요(改定律例撮要)로 구성되어 있다. 7권은 개정율례(改正律例)를 수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엄세영이 “대개 형법, 치죄법, 헌법, 소송법, 민법, 상법이 프랑스 사람이 말하는 육법(六法)이다. 일본이 이를 다 본뜨지 못하였고, 갖추기는 하였더라도 소송법과 같이 시행하기에 이르지 못한 것도 있으므로 사무장정, 형법, 치죄법, 소송법, 감옥칙, 신율강령·개정율례촬요, 개정율례 7책을 한문으로 옮겨 엮었다.”고 밝힌 대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당시까지 갖춰 놓은 사법 체계와 신구 형법을 망라해 수록한 것이다.313)엄세영(嚴世永), 『일본사법성시찰기(日本司法省視察記)』 1. 허동현 편, 『조사 시찰단 관계 자료집』 3, 국학 자료원, 2000. 5쪽.

개화기에 자주적인 법제 정비가 부국강병의 근대 국가로 성장하기 위 한 초석(礎石)이었다는 점과 당시 개화와 자강 운동을 주도한 개화파 인사들의 법의식(法意識)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세영이 남긴 문헌들은 개화파의 근대법 인식 태도와 조선의 근대 서구법 수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공부성 사무를 파악, 보고할 임무를 맡은 강문형은 『공부성(工部省)』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공부성의 연혁, 직제, 소관 업무, 사무장정을 비롯해 산하 기관의 직능과 업무에 이르기까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갖추어 놓은 산업 진흥 정책 추진 체계에 관해 파악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공업·광업·농업에 사용되는 증기 기관, 수차(水車), 풍차(風車), 기중기, 착암기(鑿巖機), 자동 성형 기계, 선풍기, 정미(精米) 기계, 파종 기계 등 각종 근대 기계류의 성능과 특징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아울러 유리 제조법과 정전기의 발생 원리, 충전지의 원리, 발전기의 원리, 지상·지중·해저의 전신 가설법과 원거리 전신 시 전신 신호 보강법 등 전신 가설에 따르는 과학 기술도 실려 있다. 여기에 소개된 여러 제도와 각종 기계류는 1881년(고종 18) 이후 조선의 관련 기구 설립, 운영과 기계류 도입에 참조,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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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성』
『문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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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성을 담당한 조준영이 남긴 『문부성(文部省)』에는 문부성의 연혁, 직제, 사무장정을 비롯해 대학·사범 학교·여자 사범 학교·외국어 학교·체조 전습소 등 각종 학교의 교과 과정과 규칙, 도서관·교육 박물관 등 유관 기관의 규칙 등 일본이 도입한 서구식 근대 교육 제도에 관한 정보가 망라되어 있다.

육군성 사무를 맡았던 홍영식은 일본 육군의 군사 행정 및 관리 체계의 파악에 주력하여 2권의 『일본육 군총제(日本陸軍總制)』를 남겼다. 이 책들에는 근위병(近衛兵) 선발 방법, 신병 훈련 과정, 사관 학교 등 각종 군사 학교의 교과 과정과 교과목, 군사 운영 전반에 대한 검열 제도, 군법(軍法), 연금 제도 등 군제 운영 전반이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각 단위 부대별 병력 배치 현황과 병종별(兵種別) 병력 편제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다.

또한 이 문헌들에는 전시 체제에서의 각 병대별(兵隊別) 병력 증원, 여단(旅團) 편제, 사단(師團) 편제, 군단장(軍團長) 이하 참모부, 포병부, 공병부 등 군단 산하 제 기구의 직무를 포함하여 육군 운영비의 회계·경리 방법, 육군의 계급별·군종별 봉급액 등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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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조전』
『일본육군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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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의 조련 방법을 살피는 임무를 맡았던 이원회는 주로 군사 훈련 방법과 육군의 전기(戰技), 전술(戰術)에 관한 정보 수집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그는 기병, 포병, 공병, 치중병(輜重兵, 수송병) 등 병종별 단위 부대 편성 방법, 부대 전술, 전투 대형, 신병 훈련, 체조 교련법 등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군사 훈련 방법 및 전기, 전술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총 4권의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남겼다.

외무성 사무의 조사를 맡았던 심상학은 총 4권의 『외무성(外務省)』을 남겼다. 이 책들에는 일본의 외무성 소관 사무, 외교 실무와 관행 등에 관한 규칙과 서식, 미국·영국·독일·중국·프랑스·러시아·포르투갈·네덜란드·스위스·벨기에·이탈리아·덴마크·스페인·스웨덴·오스트리 아·페루·하와이 등 17개국과 체결한 각종 조약의 원문, 만국 우편 연합 파리 조약(萬國郵便聯合巴里條約)과 만국 전신 조약서(萬國電信條約書) 같은 국제 조약은 물론 일본 내 외국인 거류(居留) 및 활동에 관한 제 규정과 관계 서식 등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수용한 서구적 외교 제도와 조약문이 망라되어 있다.

이 밖에도 공사·영사의 임무, 조약 체결, 외교 사절 접대나 국서 교환 절차 같은 외교 관행, 공사관 개설 절차, 일본의 해외 공사관 운영비 지급 방법, 외국인 거류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의 규모와 사용 방법 등 서구적 관행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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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묵의 시찰기
민종묵의 시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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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 업무를 조사하여 보고한 민종묵은 자신이 작성한 시찰기의 목차와 이에 대한 해설을 담은 『일본국제조례목록(日本國際條例目錄)』을 포함하여 『각국조약(各國條約)』, 『거류조례(居留條例)』, 『무역칙류(貿易則類)』, 『육개항장(六開港場)』, 『세관규례(稅關規例)』, 『각국세칙(各國稅則)』 등을 남겼다. 그리고 이헌영은 『무역장정(貿易章程)』, 『세관사무(稅關事務)』, 『각항세관직제(各港稅關職制)』 등의 문헌을 남겼다.

이 책들에는 세관의 직제, 실무와 관행 등에 관한 규칙과 서식, 17개국과 체결한 조약과 무역 장정, 무역 실무에 관한 각종 서식, 청일 양국의 현행 세칙, 일본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마련한 ‘개정 세액안(改定稅額案)’과 이를 구미 각국의 세액과 비교한 ‘세칙 비교표(稅則比較表)’ 등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현행 통상 관계 제도 및 관행과 조약, 부산항의 수출입 동향 등 일본에서 입수할 수 있는 통상과 세관 운영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놓았다.

이 문건들은 민종묵과 함께 세관 사무를 파악하여 보고할 임무를 맡았던 이헌영이 남긴 기록들과 더불어 이들이 귀국한 직후 파견한 제3차 수신 사 조병호(趙秉鎬)의 세칙안을 작성하는 데 참조 자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1881년 이후 조선 조정의 세관 창설 등에도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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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관
부산 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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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조사 시찰단의 조사들은 일본이 근대 서구 문물을 도입하여 정치·경제·군사·산업·사회·문화·교육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이룩해 놓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두루 둘러보았다. 그 결과 조사들은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삼권 분립 사상에 입각한 정치 제도, 서구 법사상에 기초한 근대적 사법 제도, 근대적 군사 제도, 재정·예산·조세 등의 경제 관련 제도, 실리 위주의 외교와 통상 제도, 실용주의적 근대 교육 등에 관한 지식과 정보, 즉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룩한 국력 발전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여 이를 문견사건류와 시찰기류의 보고서로 집약해 놓았다.

이런 점에서 조사 시찰단은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의 주요 계기로 작용하였던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에 비견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단체이다. 사절단을 이끈 전권 대사(全權大使)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와 부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귀국 후 정권의 헤게모니(Hegemonie)를 장악한 실세들이었다. 이들은 정부 각 부서의 중견 실 무 관리 41명과 유학생 43명 등 100여 명을 이끌고 1871년 11월 장도(壯途)에 올라 1873년 9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러시아·이탈리아·스위스 등 구미 12개국의 앞선 문물과 제도를 둘러보았다. 이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사절단을 따라갔던 역사가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1876년에 총 5권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가 “이 사절이 거둔 모든 성과를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편집, 간행한다.”고 책머리에 썼듯이, 천황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자신들의 경험을 국민과 함께 나눔으로써 일본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 자산이 되었다.314)田中彰, 앞의 책, 46쪽 ; 松本健一, 『日本の近代 : 開國·維新』 1, 中央公論社, 1998, 347∼355쪽 ; 福井純子, 「『米歐回覽實記』の成立」, 『『米歐回覽實記』を讀む』, 法律文化社, 1995, 429∼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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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의 출항
이와쿠라 사절단의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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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사 시찰단이 남긴 문건들은 1880년대에 활자화(活字化)되어 민간에 유포되지 않았으며, 국왕이나 일부 위정자들의 정책 결정용 참고 자료로 쓰였을 뿐이다. 따라서 조사 시찰단이 거둔 성과가 민간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315)조사들의 일본 견문 보고서 대부분은 고종의 개인 장서인 집옥재(集玉齋) 도서로 보관되어 왔다. 이태진, 『고종 시대사의 재조명』, 태학사, 2000, 300∼303쪽. 그렇지만 이 문헌들은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열망하던 개화파 인사들을 포함하여 식자층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들은 1882년 이후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의 일본 시찰 욕구를 자극하였고 조정의 일본 유학생 파견을 촉발하였다. 또한 지석영(池錫永) 등 일부 유생을 각성시켜 적극적인 개화 정책의 추진을 촉구하는 일련의 개화 상소(開化上疏)를 국왕에게 올리게 하였다. 이 보고서에 소개된 일본 근대 문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는 당시 지식인이 가지고 있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의거한 부정적 일본관, 나아가 서구 문물관을 허무는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이 문건들의 역사학적 가치는 기존의 ‘급진·온건 개화파’ 관료들의 개혁사상을 대표하는 문헌으로 주목되고 활용되어 온 김옥균의 『치도략론(治道略論)』(1882), 박영효의 ‘건백서(建白書)’(1888),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 등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또한 이들 기록에 보이는 일본에 대한 인식은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遊)』(1876),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1880), 제4차 수신사 박영효의 『사화기략(使和記略)』(1882) 등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폭과 깊이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문건들은 조사 시찰단 연구만이 아니라 1880년대 개화와 자강을 추진하려던 조선 왕조 위정자들이 일본 또는 서구 문물에 대해 가졌던 인식 태도와 심도(深度)를 가늠하는 기본 자료이다. 또한 조선의 근대 서구 문물 수용사, 나아가 개화와 자강 운동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중요한 자료이다.316)허동현, 「조사 시찰단의 일본 견문 기록 총람」, 『사총』 48, 역사학 연구회, 1998, 26∼53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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