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3.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다
  • 국민 국가 수립론과 동도서기론
허동현

어윤중, 홍영식 같은 국민 국가 수립론자가 일본에서 경험한 일본형 국민 국가의 여러 장치는 이들의 국가 구상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이들에게 일본형 국민 국가는 향후 조선에서 실현 가능한 국가 모델로 굳어졌다. 이는 어윤중이 구상한 국가의 설계도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327)허동현, 「어윤중의 개화사상 연구 : ‘온건’ 개화파 내지 친청 사대파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사상사학』 17, 한국 사상사 학회, 2001, 442∼467쪽.

우선 어윤중은 일본의 국가 통합 장치를 조선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군주는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군림하고,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근대적 개혁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 장악한 집권적 정부 형태를 구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여 국권을 확립하고 백성이 근대 국민으로 거듭나서 군민동치(君民同治)를 담당할 주체로 성장할 때까지 입헌 정체(立憲政體)를 유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위에서부터의 부국강병책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관료제의 효율적 정비가 관건이었다. 관료들이 국정 운영의 주체가 되어 국가 자원과 국민 역량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조직하는 방안을 제시하 였다. 과거제 폐지, 성과급 제도 도입, 관리의 상공업 종사 허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대외 자주권 확보와 산업 진흥에 필수적인 근대 사법 체계의 수용, 특히 서구에 불평등 조약 체결의 구실을 제공하는 잔혹한 봉건적 행형(行刑)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밖에 근대적 군사 체제를 확립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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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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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경제 통합을 위한 조감도이다. 그 첫걸음으로 물적·인적 교류와 정보·지식 교환의 통로인 교통망, 통신망의 근대화와 이를 바탕으로 일본과 마찬가지로 정부 주도 아래 근대 산업을 진흥하고 민간 부문의 상업을 육성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재정 조달 방안으로 재정 관할권의 중앙 집권화, 세제의 근대화를 비롯해 재벌의 육성을 통한 자본의 집중화, 관세 자주권 회복을 통한 재원 조달, 외자 도입을 모색하였다. 즉, 그는 조선 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차관 도입과 조정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국민, 문화 통합 방안이다. 어윤중은 조선의 발전이 지체된 원인을 유학의 숭상에서 찾으면서 일본과 같은 위에서부터의 개혁을 이끌 정신적 지주로서 유학을 대신할 수 있는 서구의 근대 사상과 기독교 수용을 고려하였다. 그리고 근대 국민의 형성을 위해 신분제 타파와 교육의 진흥도 도모하는 혁신적인 사회 개혁론을 입안하였다. 또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적극 받아들이고 서구 국가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흡수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였다.

그 밖에도 아시아 연대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이는 일본의 선린(善隣)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당시 일본에 필요한 전략적 구호에 불과함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또 중국을 능가하는 국력을 가진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을 예의 주시하였다. 비록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는 시대였지만, 한편으로 조선이 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혁신적 국민 국가 수립론은 급진 개화파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의 이상과 맥을 같이하는데, 이후 이들이 천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 정강(政綱)의 원형을 이룬다. 어윤중이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보낸 1881년 12월 20일자 편지에서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을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切友)’이라고 소개하면서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이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328)慶應義塾, 『福澤諭吉全集』 21, 岩波書店, 1964, 37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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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개화파
급진 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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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김옥균이 일본을 둘러보는 내내 어윤중의 일본과 중국 기행록인 『중동기(中東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와 박영효가 자신의 회고담에서 1882년(고종 19)에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것이 갑신정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 사실 등은 어윤중이 급진 개화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문벌 폐지, 인민 평등, 교육 진흥, 치도(治道), 청결 위생의 강조, 종교의 자유 등 김옥균과 박영효의 사회·문화 개혁안은 어윤중에게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어윤중과 홍영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사들에게도 일본 시찰 경험은 조선의 미래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깊게 밴 유교적 가치관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경험은 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들은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와 제도를 온존(溫存)시키는 범위 내에서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후생에 도움이 되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 이는, 이른바 동도서기론을 바탕으로 한 국가 개혁을 구상하였다. 동도서기론자들의 국가 구상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329)허동현, 앞의 책, 2000, 259∼260쪽.

첫째, 일본의 국가 통합 장치 가운데 왕정복고, 집권적 정부 형태, 삼권 분립의 권력 구조, 행정 체계와 관료 제도의 효율성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민권 확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사법 제도와 경찰 제도, 군제와 군사력에 큰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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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팔이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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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절용애민(節用愛民)’의 전통적 경제관으로 일본을 바라본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눈부신 성장은 높이 샀지만, 이로 인한 국가 재정과 민간 경제 파탄에 대해서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어윤중과 달리 일본식 산업 진흥 정책을 선별적으로 채택하여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편리함과 재정 수입 증대 효과가 있는 교통·통신 시설, 우수한 근대식 광산 채굴 설비와 공법, 기술 인력의 양성, 국민 계몽과 기술 자립을 위한 박물원과 산업 박람회 개최, 농민 계몽 사업을 비롯한 농업 진흥 정책의 수용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셋째, 일본의 사회와 풍속의 변화는 대체로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직업·신분 제도에 변화가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아울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관점에서 신문의 계몽 기능, 서양 의학, 맹아원(盲啞院) 같은 사회 복지 시설 등에 대하여 긍정적이었다. 결국 선별적으로 서양의 사회 제도나 기술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의 원동력이 바로 서구 근대 사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구 근대 기술의 우월성만 인정하고 그 기술 문명을 꽃피운 토대의 중요성은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시아 연대론에 내재한 일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적 침략성 을 간과하였다. 일본의 침략 여부는 조선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조선이 스스로 힘을 갈고닦아 강국이 되거나 사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 생존 전략은 피할 수 없는 서구에 대한 문호 개방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응하여 서구의 기술과 무기 체계는 받아들이되 전통적 체제나 가치는 유지,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 국민 국가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미봉책이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응하여 양보와 타협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수세적 대응책이자 실효성이 없는 무대책(無對策)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동도서기론자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충격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들의 선별적 서구 문물 수용론은 개화 상소 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동도서기론의 대두를 비롯하여 1880년대 초반에 조선 왕조가 추진한 일련의 근대화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조사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문명개화’의 충격은 여러 가지 보고서나 일본 견문기 형태로 위정자와 식자층에게 전해졌으며, 이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나라의 정책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조사 시찰단의 일본 파견은 개인을 넘어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 반향을 이끌어 냈다고 하여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 조선과 일본의 문화 교류사에서 역전 현상이 일어난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수립한 국민 국가 수립론과 동도서기론은 1880∼1890년대 조선이 추진한 개화와 자강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자 이를 추동한 쌍두마차였다. 개화기에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근대화 모형이 중국식과 일본식 혹은 동도서기론과 국민 국가 수립론이었다고 할 때, 돌이켜 보면 후자가 훨씬 바람직한 모델이었다.330)최영호, 「갑신정변론」, 『한국사 시민 강좌』 7, 일조각, 1990, 69∼70쪽. 전자는 서양 기술의 우월성만 인정하고 그 기술 문명을 꽃피운 토대인 서구 근대 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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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기록화
임오군란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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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모델의 원형을 제공한 어윤중은 조정의 정책이 동도서기론 쪽으로 기울어지고,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에 청나라의 압력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개혁 구상을 실행한 실천적 정치가였다. 또 그의 국가 개혁 구상은 국민 주권 국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으로 급진 개화파에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어윤중의 점진적인 개혁 노선은 성공 확률이 거의 없는 유혈 쿠데타를 감행함으로써 오히려 조선 근대화를 지연시킨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급진 노선보다 현실적이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력이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은 이후 조선의 근대화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시사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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