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4. 조사 시찰단이 남긴 역사적 교훈
  • 조사 시찰단과 이와쿠라 사절단의 면면
허동현

1881년의 조사 시찰단과 1871년의 이와쿠라 사절단은 앞선 외국의 근대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견문한 것을 자국의 개혁에 반영하고자 한 점에서 조일 양국의 근대화 운동 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고위 관료 12명과 수행원 27명, 일본인 통역 2명을 포함한 12명의 통역관 및 하인 13명으로 구성된 총 64명의 조사 시찰단은 1881년 4월 11일부터 윤7월 1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메이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낱낱이 살펴보았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보다 10년 전인 1871년 11월부터 1873년 9월까지 1년 10개월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순방하였다. 이 사절단은 특명 전권 대사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해 참의(參議)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대장경(大藏卿) 오쿠보 도시미치, 공부대보(工部大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외무소보(外務少輔) 야마구치 나오요시(山口尙芳) 등 정권의 실세들과 정부 각 부서의 중견 실무 관리 41명 등 공식 사절 46명을 비롯하여 18명의 수행원과 43명의 유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정권의 실세들이 직접 해외 시찰에 나선 일 본과 왕명에 따라 수동적으로 시찰에 임한 조사 시찰단의 자세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이래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넉 달 전인 1871년 여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여 근대 국가로 첫걸음을 막 내딛은 일본의 신생 조정은 조정 수뇌의 절반을 사절단의 대표로 삼고, 그 밑에 막말(幕末)의 사절 참가자들을 서기관으로 배속하였다. 게다가 정부 각 부처에서 파견한 전문 이사관까지 참여시킨 100여 명 규모의 사절단을 해외에 파견하였다.331)田中彰, 『岩倉使節團 『米歐回覽實記』 : 同時代ライブラリ174』, 岩波書店, 1994, 2∼3쪽. 이 사절단의 성격과 목표는 그때 이들을 전송한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의 송별사에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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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의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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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과의 교제는 국가의 안정과 위기에 관련되며 사절의 능력 여부는 국가의 영욕에 관계된다. 지금은 대정 유신(大政維新), 해외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이니 그 사명을 만 리 떨어진 곳에서 완수하여야 한다. 내외 정치, 앞날의 대업이 성공하고 못 하고가 실로 이 출발에 달려 있고 그대들의 대임(大任)에 달려 있지 않은가. 대사는 천부의 훌륭한 자질을 지닌 중흥의 공적이 있는 원로이다. 동반하는 여러 경(卿)들은 모두 국가의 주석이며 함께하는 관원들도 한때의 인물들이다. 모두 이 훌륭한 뜻을 한마음으로 받들어 협력하여 그 직분을 다하여야 한다. 나는 그대들의 뜻이 실현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가라! 바다에서 증기선을 옮겨 타고 육지에서 기차를 갈아타며, 만 리 각지를 돌아 그 이름을 사방에 떨치고 무사히 귀국하기를 빈다.332)田中彰, 앞의 책, 44쪽.

이와쿠라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독일·러시아·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 등 구미 선진 국가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중동과 아시아의 낙후된 상황도 관찰하였다.333)田中彰, 앞의 책, 46∼194쪽.

산조 사네토미의 송별사에도 나오듯이 전권 대사 이와쿠라 도모미와 부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귀국 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실세였다. 시찰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오쿠보 도시미치는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서’, 기도 다카요시는 ‘헌법 제정의 건언서(建言書)’를 제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국가 구상, 다시 말해 일본형 국민 국가의 창출을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334)田中彰, 앞의 책, 210∼212쪽.

이들은 서구 근대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일본이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 국가로 순조롭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제, 산업, 군사, 교육 모든 부문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시찰에서 돌아와 내정 개혁을 외치며 정한론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정한론을 반박하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작금(昨今) 정부는 여러 산업을 일으켜 부강의 길을 꾀하고 있다. 대부분은 수년 뒤를 기다려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육해, 문부, 사법, 공학, 개척 사업 등과 같이 모두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그 효과를 기대할 것이 못 된다.”335)田中彰, 앞의 책, 204∼208쪽. 그리고 사절단의 중견 관리나 유학생들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하여 일본형 국민 국가의 형성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로부터 10∼20년 후에 근대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떠난 조선의 조사 시찰단은 이와쿠라 사절단과 달리 비공식 시찰단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근대 문물 수용 태도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시찰 임무를 맡았던 12명의 조사와 수행원이 약 4개월 동안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하고 살펴보았지만, 이들의 경험이 조선의 근대화 작업에 전폭적으로 활용되기 힘들었다는 한계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우선 조사 시찰단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개인 자격으로 갔으며, 또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정척사파의 세력이 강하였다. 또 일본의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후의 사절단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었다.

첫째, 일본이 1860년대부터 시작한 근대 문물의 수용 노력을 우리는 20년 후에, 그것도 일본의 시각을 통해 변형된 이미지를 간접 경험하였다. 약 4개월에서 1년 남짓의 짧은 시찰 기간 또는 유학 기간은 일본형 국민 국가나 서구 근대의 지적 성과를 충분히 소화하고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특히 조사 시찰단이 접한 서구 근대의 지적 성과는 대체로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 즉 ‘오역(誤譯)’과 ‘오독(誤讀)’된 근대를 통하여 이해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이들은 같은 시대의 일본 지식인이 겪은 지적 혼돈보다 더한, 서구와 일본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일본적으로 변형된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의 미로(迷路)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336)지금은 ‘freedom and people’s rights movement’를 자유 민권 운동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메이지시대에는 일본인 개개인의 개별적인(individual) 권리를 집합 개념으로서 민권(people’s right)으로 잘못 번역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든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Social Statics(1851)를 『사회정학(社會靜學)』이 아닌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으로 오역함으로써 이 책이 자유 민권 운동의 성전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 사례이다(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임성모 옮김,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54, 88∼89, 107쪽). ‘번역된 근대’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Lydia Liu, Translingual Practice : Literature, National Culture, and Translated Modernity-China, 1900-1937,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임성모 옮김, 앞의 책, 219∼226쪽 참조. 특히 근대 서구에서 이입된 개념들—일본에서 만들어져 번역된 한자어들—을 처음으로 접한 조사 시찰단원은 이를 이해하는 데 문자의 이면(裏面)에서 생기는 개념의 차이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337)아키즈키 노조미(秋月望), 「스에마쓰 지로(末松二郞)의 필담에 나타난 ‘근대’ : 1881년의 ‘신사 유람단’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근대 교류사와 상호 인식』 I,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2001, 25∼34쪽. 서구 근대 사조는 일본의 전통과 만나면서 형식과 내용 면에서 변형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본인도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서구의 지적 산물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1862년 영국에 들른 그는 그때 이미 난학자(蘭學者, 네덜란드를 통해 받아들인 서구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서구 자연 과학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근대의 산물인 민주주의의 기본 제도는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던 그에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정치상의 선거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선거법이란 것이 어떤 법률이고, 의회라는 것은 어떠한 관청이냐고 질문하면, 저쪽 사람은 웃기만 한다. 무엇을 묻는지 잘 알고 있다는 태도이다. …… 또한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당파 같은 것이 있어 서로 지지 않고 밀리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싸운다고 한다. …… 태평무사한 천하에서 정치적인 다툼을 하다니. 도대체 알 수가 없다. …… 저 사람과 이 사람이 적이라면서도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신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338)福澤諭吉, 『福翁自伝』, 慶應義塾, 『福澤諭吉全集』 7, 岩波書店, 1970, 107∼108쪽.

그러므로 일본어로 중역(重譯)된 개념을 빌려 서구 근대를 이해하였던 조사 시찰단의 혼돈은 더 컸다. 조사 민종묵은 18, 19세기 혁명의 시대에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근대적 개념의 ‘자유’를 조선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339)오늘날까지도 ‘자유권’ 문제는 국가와 법을 초월하는 자연법적 권리로 보는 입장과 근대 국가 성립과 더불어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 의해 보장된 실정법적 권리로 보는 입장이 크게 대립하고 있다. 최종고, 『한국의 서양법 수용사』, 박영사, 1982, 320쪽. 그는 “한 변사가 여러 번 소리쳐 말하길 ‘나라의 대세는 인민에게 달려 있다.’라 하니, 이는 자유권을 일컫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낯선 개념을 처음 대하였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구 사상을 처음 접하였을 때 못지않은 난감함을 느꼈을 것이다.340)민종묵, 『문견사건초』, 허동현 편, 『자료집』 12, 2000, 101쪽. 조사 엄세영도 일본의 서구화된 사법 제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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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묵
민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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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 예심, 공판 등의 제도를 두어 관이 아주 작은 일을 저울질하고 세밀하게 파헤치니 자연 고법(古法)과 부합한다. 징역(懲役)이라 일컫는 것은 한(漢)나라의 성조(城朝, 성을 쌓는 노동을 시키는 형벌)나 당(唐)나라의 적수(謫戍, 죄인을 변방에 수자리 살러 보내는 제도)와 같은 것이며, 그 속원(贖圓, 보석)이라 하는 것은 우(虞)나라의 속금(贖金,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이나 주(周)나라의 벌환(罰鍰, 일정액의 돈을 내어 죄를 면하게 하는 제도)의 제도에 해당한다. 사구(司寇, 형벌과 경찰을 맡아 보던 고대 중국의 관직)의 사악한 행위를 방지하는 제도를 본뜬 것이 경찰(警察), 순사(巡査)의 제도이고, 국인(國人)들이 죄를 준다는 ‘국인여죄(國人與罪)’의 뜻을 취한 것이 대언(代言), 방청(傍聽)의 제도이다. 무릇 민인(民人)의 건강과 위생을 지킴에 그 극단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 소위 법이란 것은 형명(刑名), 법술(法術)의 유(流)가 아니라 바로 치국(治國)의 계약(契約)이기 때문이다.341)엄세영, 『문견사건초』, 허동현 편 『자료집』 3, 2000, 419∼420쪽.

그러나 엄세영은 자신이 평생 쌓고 지켜 온 유교적 가치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서구화된 일본의 사법 제도를 이해하였다. 과연 그는 “예심, 공판, 징역, 경찰, 대언인(변호사)” 등 일본이 받아들인 서구적 사법 제도가 ‘법은 곧 형(刑)’이라는 동양의 형벌 중심의 형명지학(刑名之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법체계인 서구 법사상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둘째,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문물 탐험을 회상하면서 수신사나 조사 시찰단이 보인 일본 시찰 태도를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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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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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빈민 구조소(貧院), 맹아원, 정신 병원(癲狂院), 박물관, 박람회 등을 보니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 유래와 효용을 듣고 심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요즈음 조선 사람이 처음 일본에 와서 보고 듣는 것마다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선 사람은 대개 단지 놀라기만 하고 돌아가지만, 당시 나와 동행한 일본인은 놀라는 데 그치지 않고 몹시 부러워하며 그것을 일본에도 실행하겠다는 야심을 단단히 굳혔던 것이다.342)福澤諭吉, 「福澤全集緖言」, 慶應義塾, 『福澤諭吉全集』, 岩波書店, 1958, 28∼29쪽.

과연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처럼 조선인은 새로운 것을 보고 놀라기만 하고 세상사에 무심한 채 잠자고 있었을까? 그의 야유를 들어도 마땅할 만큼 조선의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인식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이는 이미 우리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이 밖에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조사 시찰단은 일본 탐험을 통해 근대화 운동의 쌍두마차 격인 동도서기론과 국민 국가 수립론이라는 대조적인 근대 문물 수용론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전통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대다수 조사들의 한계는 막부 말의 초기 사절에게서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극복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조사들의 자세와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은 『조야신문』 1881년 6월 14일자에 실린 기사 한 대목이다.

이번에 우리 나라에 온 조선인들…… 은 여러 차례 육군성을 방문하여 육군의 기본 틀에서부터 제병(諸兵) 훈련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다해 연구하는데, 본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그 주요 내용을 반드시 깨쳐야만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수행원 두 명은 이미 이타바시 화약 제조소에 가서 화약 제조법을 익히고 있다.343)『조야신문』 1881년 6월 14일자.

어윤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인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히 감행하므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국가의 체제를 세울 수 있었으니”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 사람들의 진취성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거제가 폐지되어야 하는데, “과거를 혁파하면 공명 진취를 도모하는 무리들이 모두 앞다투어 외국에 나가 재주와 기예를 습득하여 돌아올 것이다.” 다만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외에 벨기에, 스위스 같은 나라”로부터도 그들의 뛰어난 점을 받아들여 “힘을 다해 미리 주도하게 준비하여 부강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344)어윤중, 『수문록』, 허동현 편, 『자료집』 13, 2000, 13, 7, 15, 24쪽. 그러나 모든 실패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또 그 실패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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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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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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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것처럼,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 근대가 이룩한 정신적·물질적 성과의 요체를 파악하여 이를 일본에 적용함으로써 서구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진취적인 성향의 인물이자 메이지 조정의 실세로 구성되었다. 그에 비해 조사 시찰단은 능력이 출중한 이른바 정예 관료 출신의 조사들이었지만, 어윤중과 홍영식을 제외한 대부분은 국왕의 하명에 따라 피동적으로 참여한 봉건 군주의 가신(家臣)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 그 수행원들은 조사들과의 사사로운 관계로 선발되었으며, 윤치호나 유길준처럼 일본 유학이 예정되어 있던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관직 경험이 없고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밖에 역관 출신의 통역과 하인 등 20여 명도 조사들이 근대 문물제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큼 각성되지 못하였다.

셋째, 조사 시찰단원에게 일본 시찰 경험은 국민 국가 수립 혹은 서구 기술과 무기 체계의 수용을 도모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들의 국가 구상은 이후 조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조사 시찰단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교해 볼 때, 취약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시찰 성과가 당시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 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가 났다. 조사 시찰단은 1881년 약 4개월 동안 메이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낱낱이 살펴본 결과를 총 80여 책의 보고서에 응집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10년 전인 1871년 11월부터 1년 10개월에 걸쳐 구미 제국을 순방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동행한 역사가 구메 구니타케는 그 성과를 1876년에 5권의 『미구회람실기』를 통해 발표하였다. 이처럼 이와쿠라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되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원은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이 같은 사고를 실천에 옮겨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국민과 함께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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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회람실기』
『미구회람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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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시대 일본인은 한자를 도구로 서구 문물을 번역하여 받아들이고 언문일치(言文一致) 문체를 개발함으로써 일본식 근대를 만들어 냈다. 근대 국민 국가 건설 과정에서 말과 글이 일치하는 구어체(口語體)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국민 통합의 기본 전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균일하고 균질한 생각을 공유하는 ‘국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근대 국가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그것의 관건은 언문일치의 문체를 만들어 내는 데 달려 있었다. 따라서 이와쿠라 사절단원들은 자신의 경험을 활자화하여 국민과 공유하는 데 힘을 썼지만, 조사 시찰단원들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넷째, 조사 시찰단의 조사들은 자신들이 왕의 밀명을 얼마나 잘 수행하 였는지 보고하기 위해 약 2개월 동안 서사(書寫)에 능한 아전(衙前)들을 동원하여 ‘문견사건’과 ‘시찰기’ 형식의 보고서를 한문으로 작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단으로 장정한 수서본(手書本)을 고종에게 바쳤다.345)조사 시찰단이 남긴 각종 문헌에 관한 자세한 해제(解題)는 허동현, 앞의 글, 1998, 23∼53쪽 ; 허동현 편, 「해제 조사 시찰단 관계 자료집」, 『자료집』 1, 2000, 1∼29쪽 참조. 이들의 보고서에 담긴 근대 일본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는 당시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열망하던 개화파를 비롯하여 식자층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위정척사론에 의거한 부정적인 일본관과 서구 문물에 대한 시각을 허무는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보고서는 국왕이나 일부 위정자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참고 자료로 이용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들이 거둔 성과가 일반 백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조사 시찰단이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들은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된 구메 구니타케의 책과 달리 백성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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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성』과 『일본외무성사무목록』
『외무성』과 『일본외무성사무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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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사 시찰단을 따라 일본에 유학하였던 유길준은 언문일치 문체 개발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83년(고종 20) ‘세계대세론(世界大勢論)’이라는 논설에서 국한문 혼용을 처음으로 시도해 유학을 통해 얻은 지적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려 하였다. 이러한 유길준의 노력은 1895년(고종 32)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해 저술한 『서유견문』의 발간으로 결실을 보았지만, 1,000부를 찍은 이 책은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그가 역적으로 몰리면서 망명객이 되는 탓에 금서(禁書)가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인의 지견(知見) 향상에 공헌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달리 역사적으로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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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
『서유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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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견외(遣外) 사절단을 파견하기 이전의 조선과 일본은 사절단 파견 시기나 대상국,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차이가 벌어진 것일까? 종래 일본 학계에서는 서세동점이 시작된 19세기에 들어와 일본이 서구 열강의 외압(外壓)에 대응할 수 있는 경제적·문화적·정치적 역량이 조선보다 훨씬 컸다고 보거나,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과 달리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을 지도자나 지식인층의 대응 능력이 탁월하였다는 데에서 찾는 견해가 지지를 받아 왔다.346)최상용, 「일본의 근대화를 생각한다」, 고병익 외,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 관계』, 문학과 지성사, 1992, 102∼103쪽. 그러나 이러한 역사 해석은 조선과 일본이 외압에 대응하면서 각기 특수 상황에서 내린 정치적 결단과 역사적 선택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종속 국가로 양극화된 결과에서 소급하고 유추함으로써, 다분히 일국주의적(一國主義的) 발상이자 승자의 결과론적 해석이 되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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